나무는 겨울 추위와 맞서 투쟁하지 않는다|숲과 인간의 생존 프로젝트

나무는 겨울 추위와 맞서
투쟁하지 않는다

남효창
숲연구소 이사장


자작나무 숲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만큼, 최근엔 자작나무를 많이 식재하는 편이다.

멀리서 봐도 수피의 특징 때문에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이맘때쯤이면 나무는 막바지 월동 준비를 한다. 겨울나무가 무엇보다 황급히 해야 할 일은 포도당을 전분(녹말)으로 엮어내는 작업이다. 나무가 광합성을 통해 얻는 것은 단당류인 포도당이다. 포도당은 세포와 세포 사이를 쉽게 이동할 수 있다. 때문에 겨울철 비교적 따뜻한 시간이면 나무 몸속의 물이 활력을 되찾게 되고, 물과 함께 포도당은 쉽게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 물이 얼게 되면, 나무는 생존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포도당 여러 개를 엮어놓은 다당류인 전분으로 보관하면 포도당의 자유로운 이동을 막을 수 있다. 잘 얼지 않는 전분을 나무의 외곽 부분, 즉 나무의 껍질(수피) 쪽으로 그리고 물 분자들은 나무의 내부 안쪽으로 배치한다. 이것이 나무가 월동 준비에 가장 신경 쓰는 작업이다. 나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월동 준비는 포도당을 지질 성분으로 환원하는 작업이다. 방한복 역할을 한다고 할까? 나무가 혹독한 겨울에도 전라의 모습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까닭이다. 자작나무는 가지나 줄기를 불에 태우면 자작자작 소리를 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질 성분(예: 지방) 같은 기름 성분들이 타며 내는 소리로 자작나무는 시베리아처럼 혹독한 기후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포도당을 지질 성분으로 바꿔내는 일에 성공한 나무이다. 물론 자작나무뿐 아니라 대다수의 나무들은 지질 성분을 이러한 이유에서 생산해서 보유하고 있다. 자작나무라고 해서 모두 지질 성분의 함량이 높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현재 자작나무가 어떤 기후 조건하에 있느냐에 따라 지질 성분의 함량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나무가 생산해내는 지질 성분은 방한을 위한 한 가지 목적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혹시 나뭇잎이나 과일 표면에 희뿌연 가루나 또는 끈적이는 물질을 관찰한 적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지질 성분의 일종이다. 그러한 현상은 동해(凍害) 피해를 막기 위한 것보다는 자외선 차단이나 다른 생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거나 또는 체내의 수분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겨울을 나기 위한 나무의 전략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전분을 만들거나 지질 성분의 함량을 높인다거나 하는 전략만으로 월동을 완벽하게 할 수는 없다. 모든 생물도 마찬가지이지만 생리적 현상을 가동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성분이 물 분자이다. 하지만 체내의 물 함량이 너무 많거나 또는 너무 적으면 생명체의 활동에 이상 현상이 생긴다. 즉 생물은 자신에게 알맞은 적당량의 수분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적당량의 수분 함량이 나무에겐 일정하지 않다. 계절마다 다르다. 겨울철 나무는 최소한의 수분 함량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작나무 수피. 종이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엔 이 자작나무 껍질에 글을 썼다. 경주 천마총에 있는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백화수피제(白樺樹皮製) 천마문 장니(障泥, 말다래로 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가죽 같은 것을 말의 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은 기구를 말한다)가 그것이며, 팔만대장경의 일부도 자작나무로 만들어졌다.


매년 이맘때면 우리가 김장을 하고 집안을 단속하듯, 나무도 전분을 만들고 지질을 만들고 물을 관리하며 자신을 단속한다.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나는 늘 구불구불한 비포장 길을 내려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와 말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하루를 보낼 때가 많다. 특히 입동이 지나고 소설이 지나 대설과 동지 절기로 접어들면, 이 비포장 길을 에워싸고 있는 숲은 적막하고 나무들은 고독하게 서 있다. 잣나무에서 큰 잣송이(잣 열매)가 길 위에 뚝 떨어진다. 이내 청서(청설모)가 달려와 잣송이를 이리저리 굴리고, 고개를 돌려 주변을 경계하더니 위험을 감지하고 쏜살같이 숲으로 달아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조심스럽게 그 길을 빠져나온다. 청서는 습관대로 잣나무의 잣송이를 땅으로 떨어뜨렸지만, 그것이 간혹 사람들이 지나가고 자동차가 지나가는 비포장 길로 굴러 내릴 때가 있다. 청서는 자신의 몸보다 몇 배나 더 무거운 잣송이를 이동시킬 수 없기에 길 위에서 씨앗(잣)을 빼 먹어야 한다. 씨앗을 빼 먹는 청서의 행동을 숨어서 조심스럽게 관찰한다. 씨앗을 빼 먹는 청서의 행동은 매우 신중하다. 잣송이 주변으로 붙어 있는 끈적이는 송진 같은 성분 때문이다. 송진 같은 끈적이는 물질이 손이나 주둥이에 묻는 날이면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잣송이는 끈적이는 물질을 많이 생산해내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동해 피해를 막기 위한 수단보다는 잣나무의 자손 격인 씨앗을 청서와 같은 동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다. 잣송이 안의 씨앗이 충분히 성숙할 때까지 끈적이는 성분은 남아 있게 된다.


청서가 떨어뜨린 잣송이. 마치 파인애플을 연상시킬 만큼 서로 닮았다. 잣 씨앗을 감싸고 있는 비늘 조각 같은 것을 실편이라 하는데, 충분히 무르익고 건조해지면 실편 조각들이 벌어지면서 잣 씨앗들이 쉽게 빠져나오게 된다. 끈적이는 송진 같은 물질이 잣 씨앗들을 보호하기 위한 지질 성분이다. 오른쪽은 청서가 잣 씨앗을 빼 먹은 흔적


청서 못지않게 길에서 자주 만나는 동물은 고라니와 너구리 그리고 멧돼지이다. 그들에게 이 시기는 마치 일의 마감을 앞둔 사람처럼, 추수를 앞둔 농부처럼 매우 소중한 시간들이다. 이 시기를 놓치면 먹이가 귀해 가난한 긴 겨울을 온전하게 지낼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많은 음식을 섭취해두어야 한다. 고라니도 너구리도 모두 포동포동하게 살이 올라 있다. 그들에겐 무엇보다 음식을 통해 지방을 많이 비축하는 일이 중요하다. 흰 눈이 내리면 몇 날 며칠 먹이를 얻을 수 없기에 매우 분주하게 움직인다. 유감스럽게도 고라니와 멧돼지는 유해조수(有害鳥獸)로 언제든 사냥을 할 수 있는 동물들이다. 특히 노루보다 좀 작은 고라니는 세계적으로 아주 희귀한 사슴과 포유류에 속한다. 그만큼 서식지가 한정되어 있는 동물이며, 그 희귀한 동물이 우리나라가 주요 분포 지역이다. 참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어찌하랴. 언제든 포획할 수 있는 동물로 분류되어 있으니 말이다. 

멧돼지나 고라니가 유해조수로 분류된 까닭은 간단하다. 사람들이 사는 공간으로 내려와 사람들의 삶에 피해를 준다는 단 한 가지 이유에서다. 우리가 먼저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침범하고 마음대로 그들의 서식지를 개발하고 변형한 것에 대한 인식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들이 숲에서 살면서 그들 스스로 평형을 이루고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온 그들의 삶의 방식을 우리 인간이 뒤흔들어놓고서는 도시로 출몰하는 생물들에게 사형이라는 모진 판결을 내린다. 이것은 분명 인간의 잘못된 자연관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에 중심점을 하나 찍는다. 인간은 그 중심에 자기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고 자신이 모든 것을 다스리는 신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마치 하늘이 돌고 있다고 생각하는 천동설을 주장하는 것과 흡사한 자연관 말이다. 하루빨리 그들이 유해조수가 되지 않게 원상태를 복원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지상의 유일한 지적 생물이라고 자칭하는 인간이 해야 하는 최소한의 생태윤리이고 우리를 존재케 하는 자연에 대한 양심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땅에 존재하는 유일한 유해조수로 낙인찍히지 않을까?

겨울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은 가볍다. 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자신의 앙상한 가지들을 바람에 내맡긴다. 태풍에도 나무들의 육중한 몸들이 넘어지지 않는 지혜를 보여준다. 무겁게 자신의 삶을 짓누르는 겨울 추위 앞에서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몸을 가볍게 한다. 어떻게 세상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달통한 생물처럼. 항상 느끼는 일이지만, 양지 바른 숲 속 나무 아래서 나무들과 밀담을 나누는 삶의 방법을 찾지 못했다면… 생각하기 싫은 삶이 그려진다.


메마른 잎을 겨우내 매달고 있다가 다음 해 봄 새순이 돋아날 때 떨어뜨린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 떡갈나무의 전략이다.


이제는 확연하게 주변의 모든 나무들의 잎들은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들만 남았다. 물론 잣나무나 소나무 같은 상록침엽수는 빼고 말이다. 가지 사이사이로 햇살이 빛나고 멀리 건너편 바닥이 드러난 숲을 마주한다. 간혹 메마른 가지에 갈색 빛의 나뭇잎을 떨구지 않고 매달려 있는 떡갈나무 같은 친구들도 보인다. 왜 다른 나무들처럼 마른 잎을 떨구지 않는 것일까? 잎을 떨구는 나무들은 자신의 몸에 붙어 있던 잎들을 의도적으로 떨어뜨린다. 잎이 붙어 있던 그 자리를 엽흔(잎이 붙어 있었던 자리에 남은 흔적)이라 한다. 마른 잎을 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대부분의 나무들은 잎을 떨구는 동시에 몸에서 지질 성분인 수베린(suberin)이란 물질을 생산해서 노출된 그 자리에 칠을 한다. 동해 피해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 잎이 떨어지면 그 자리에 속살이 드러난다. 아주 연약한 나무 내부의 세포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떡갈나무와 같은 친구들은 마른 잎을 떨구지 않고 겨우내 매달고 있다가 이듬해 봄, 새로운 잎이 돋아날 때가 되어서야 마른 잎을 떨어뜨린다. 건강하고 성숙한 한 그루 떡갈나무는 수만 장의 나뭇잎을 매달고 있다. 그것들이 다 떨어지면 노출된 수만 개의 엽흔에 수베린이란 물질을 생산하지 않아도 된다. 마른 잎이 붙어 연약한 그곳을 보온해주는 것이다. 


중곰솔(소나무와 곰솔 사이에서 태어난 소나무). 잎을 떨구지 않고 겨울에도 필요한 양분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잎의 면적을 대폭 줄이고 대신 잎의 개수를 많이 늘리는 일, 그리고는 잎이 얼어버리지 않게 바늘 같은 잎에 많은 지질 성분을 보유하는 일이었다.


그냥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들처럼 보일지 모른다. 한곳에서 수백 년 또는 수천 년을 그리고 큰 변화를 느낄 수 없는 모습으로 서 있기에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무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의 그 자리에서 아주 능수능란하게 바람을 다스리고, 빛을 다스리고, 물길을 다스리고, 숲의 모든 생물을 다스린다. 마치 감미로운 바람처럼 아주 부드럽게.

방금 중곰솔이란 나무에 앉았다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곧바로 날아가버리는 어치도 나무를 닮아 자신의 삶을 거침없이 살아가는 듯하다.

나무도 새도 고라니까지도 자유가 무엇인지 몸으로 실천하며 마음껏 살고들 있다. 그들의 삶이 힘들지 않고 지쳐 보이지 않는 이유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규정 지워진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삶을 물 흐르듯 즐길 수 있는 능력 때문이 아닐까.  



남효창|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산림생태학으로 석사 학위를, 산림환경정책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학교 산림환경정책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숲을 연구하다가 귀국, 2000년까지 서울대학교 임업 과학연구소 특별연구원으로 재직했다. 현재 숲연구소 이사장, 마인바움 대표이사로 있다. 저서로 『나는 매일 숲으로 출근한다』, 『나무와 숲』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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