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행복해질 수 없는가?
마티유 리카르
티베트 불교 스님, 작가
철학자 베르그송은 우리 인간이 행복의 개념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정의해 각자가 나름의 해석을 추가할 수 있게 했다고 말한다. 삶의 매 순간의 질을 결정하는 행복이란 과연 무엇인가? 나는 행복이 극히 건강한 마음 깊이에서 우러나는 잘 산다는 느낌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즐겁다거나 스쳐가는 기분이 아니라 최적의 존재 상태를 가리킨다. 행복은 또한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세상을 바꾸기는 힘들지만 그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꾼다는 것이 순진한 낙관주의나 역경을 상쇄하기 위해 억지로 지어낸 행복감을 의미하진 않는다. 혼란된 마음이 일으키는 불만과 좌절에 끄달리는 한 “난 행복해”라고 아무리 말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이다. 행복의 추구는 장밋빛 안경으로 세상을 보는 것도 아니요, 세상의 고통과 부조리에서 눈을 돌리는 것도 아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환희 상태를 지속시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행복은 마음을 중독시키는 혐오와 집착 등의 독을 제거하는 일이다. 또한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고 외관과 실재의 간격을 좁히는 일이다. 그러려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관한 지식을 습득해야 하고 사물의 본질을 깊이 통찰해야 한다. 고통은 실재에 대한 오인지와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재와 통찰
불교에서 실재 또는 궁극적 현실은 사물에 대해 우리 마음이 무언가를 덧씌우거나 변화시키지 않은 상태, 즉 사물의 참 본성을 말한다. 우리가 지어낸 개념은 인식과 실재 사이에 간격을 만들어내고 끝없는 갈등을 야기한다. 그래서 타고르는 말했다. “우리가 세상을 잘못 읽어내고는 오히려 세상이 우리를 기만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일시적인 것을 영원하다 생각하고, 고통의 원천을 (부와 권력과 명성과 즐거움에 대한 욕망을) 행복이라 여긴다.
여기서 지식은 많은 정보의 습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우리는 외부 세계가 독자적 실체를 지닌 사물로 구성되었으며 개개의 사물은 우리가 믿는 특성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나날을 살아가며 우리는 사물에 ‘좋고’ ‘나쁨’의 성격을 부여한다. 이를 판단하는 ‘나’ 역시 실체적으로 실재한다 생각한다. 불교에서 ‘어리석음’이라 부르는 이 오류는 집착과 혐오라는 강력한 반사작용을 낳고 이는 고통으로 이어진다. 이를 에티 힐레숨(Etty Hillesum)은 “그 거대한 장애는 언제나 마음이 만들어낸 상일 뿐 실재인 적이 없다”고 표현했다. 윤회라 불리는 이 무지와 고통의 세계는 존재의 근본 조건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된 실재 개념이 만들어낸 정신적 우주에 불과하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항시 변화하는 무한한 원인과 조건이 결합되어 창조되고 있다. 비 온 후 잠시 떠올랐다가는 형성 요건 중 하나라도 없어지면 사라지는 무지개처럼 현상은 상호 의존적 방식으로 존재할 뿐 자율적이고 지속적인 존재는 없다. 모든 것이 관계일 뿐 그 무엇도 인과의 힘을 떠나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본질적 개념을 이해하고 내면화했다면 세상의 본성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통찰이다. 통찰은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우리 고통의 주원인인 눈먼 마음과 그것이 생산해내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점차 놓아버리는 것이다.
참깨에 기름이 들어 있듯 모든 존재에는 완성될 잠재력이 있다. 무지는 이런 잠재력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마치 자기의 판잣집 아래 보물이 묻혀 있는 것을 모르는 거지처럼 말이다.
불교에서 ‘수카(sukha)’라 불리는 행복 또는 낙(樂)은 우리가 눈먼 마음과 번뇌에서 벗어났을 때 나타나는 지속적 웰빙 상태이다. 세상을 왜곡의 베일 없이 있는 그대로 보게 해주는 지혜다. 또한 내적 자유와 타인에게 발산하는 자애로 가게 해주는 기쁨이다.
먼저 ‘나’를 구상해내고 거기에 집착한다.
다음엔 ‘내 것’을 구상해내고 물질세계에 매달린다.
물레방아에 갇힌 물처럼 우리는 계속 쳇바퀴처럼 돌아간다.
모든 존재를 포용하는 자비를 나는 칭송한다.
— 찬드라끼르띠 [월칭(月稱)]
자아를 확고하게 굳히기
혼란의 다양한 양상 중에서도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개인적 정체성의 개념, 즉 자아에 대한 주장이다. 불교는 본래적이고 본능적인 ‘나(I)’와 습관에 의해 형성된 개념적 ‘자아(self)’를 구분한다. 여기서 ‘나’는 ‘나는 깨어 있다’거나 ‘나는 춥다’고 생각할 때의 ‘나’이다.
불교 철학자 한 데 위트(Han de Wit)는 “자아는 경험의 장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며, 두려움에 기반한 정신적 움츠림”이라고 했다. 세상과 타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고통이 무서워서, 살고 죽는 것에 대한 불안 때문에 우리는 자아라는 물거품 안에 숨으면 보호받으리라 상상한다. 세상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내고 고통을 피하고자 한다. 실제로는 반대로 고통을 불러들인다. 자아에 대한 집착과 자만심이 고통을 가장 잘 잡아당기는 자석이기 때문이다.
진실로 두려움이 없으려면 어떤 상황이 닥쳐도 그를 해결할 내적 자원을 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이는 자기도취 속으로 움츠러들어 깊은 불안감을 지속시키는 두려움의 반응과는 다르다.
자아에 대한 강력한 집착은, 내 몸과 내 이름과 내 마음과 내 소유물과 내 친구들이 ‘내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이는 타자를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혐오해 내치려는 욕망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자기와 타자에 대한 개념이 마음속에 굳어진다. 이런 잘못된 이원성이, 이간시키려는 욕망, 혐오, 질투, 자만심, 이기심 등 모든 번뇌의 원인이 된다. 이때부터는 세상을 우리가 만들어낸 환상으로 왜곡된 거울을 통해 보게 된다. 우리는 만물의 참 본성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이는 좌절과 고통으로 이어진다.
독립적인 자기가 실재한다는 믿음은 자기중심성에서 나오고, 나의 운명이 남들의 운명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고 우리를 설득한다. 내가 싫어하는 동료를 보스가 혼내면 좋아하고, 아무런 감정이 없는 동료가 혼나면 무관심하고, 나를 심하게 혼내면 큰 상처를 받는다.
기만적인 자아
이제 정직하게 점검해보아야 할 것은 존재의 중심에 있는 자아의식이다. 몸과 말과 마음을 탐구해보면 이 자아라는 것이 단지 말이고 이름표고 관습이고 지칭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이 이름표가 스스로 진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아의 기만을 벗기기 위해서는 끝까지 조사해보아야 한다. 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의심이 들 때 안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려면 방마다 구석마다 숨을 만한 곳을 다 찾아봐야 한다. 그래야만 마음이 놓인다. 나의 존재를 정의한다고 생각되는 자아라는 허상 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찾아내려면 내적 탐구 조사를 철저히 해야 한다.
철저한 조사 후에 자아는 몸의 어디에도 있지 않으며, 몸 전체에 두루 퍼져 있는 확산된 실체도 아님을 알게 된다. 우리는 자아가 의식과 관련되어 있다고 선뜻 믿지만 의식 역시 찾기 힘든 흐름이다. 삶의 체험에서 볼 때 과거의 의식은 죽었고(다만 그 결과만이 남아 있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현재는 지속되지 않는다.
자아의 해체
좀 더 자세히 분석을 해보자면 개인적 정체성의 개념은 세 가지 양상을 띤다 : ‘나(I)’, ‘사람(person)’, ‘자아(self)’다. 이 셋이 서로 근본적으로 다르진 않으나 우리가 개인적 정체성에 집착하는 다른 방식을 반영한다.
‘나’는 현재에 산다. ‘나는 배고프다’, ‘나는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다. ‘나’는 의식과 사고 판단 의지의 중심점이다. ‘나’는 현재 상태의 경험이다.
‘자아’가 존재의 핵심에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은 이미 살펴보았다. 우리는 탄생에서 죽음까지 우리를 특징짓는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것이 자아라고 생각한다. 자아는 ‘나의’ 팔다리, ‘나의’ 장기, ‘나의’ 피부, ‘나의’ 이름, ‘나의’ 의식을 다 합친 것이 아니라 이것들의 독점적인 소유자다. 팔이 잘리면 자아는 단지 팔 하나를 잃었을 뿐 그대로 존재한다.
정체성의 취약한 얼굴
‘사람’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가진 이미지를 포함한다. 나의 정체성, 나의 위상은 마음 깊이 뿌리박혀 있고 타인과의 관계에 계속 영향을 미친다. 나의 이미지를 위협하는 하찮은 말도 참기가 힘들다. 절벽에 서서 모욕이나 아첨의 말을 외치고 그것이 메아리로 되돌아오면 마음에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 그런 모욕의 말을 내게 외치면 아주 기분이 나쁘다. 자기 이미지가 강할수록 ‘내가 인정받고 수용되고 있다’는 확신을 계속 얻으려 한다. 내가 의심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없다.
하지만 이 정체성의 가치는 무엇인가? ‘성격(personality)’이라는 말은 배우의 가면을 의미하는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에서 왔다. 이 가면을 통해(per) 배우의 목소리가 울린다(sonat). 이 가면을 쓰고 있는 한 우리가 사회에서 하는 역할과 우리 존재 상태 를 정직하게 구분하고 판단하는 일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흔히 잊어버린다.
보이지 않는 벽을 통과하여
자아의 허상적 성격을 이해하고 나면 가족과 주변 세상과의 관계가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 그런 유턴(U-turn)을 하면 마음이 불안하지 않을까? 경험에 의하면 그런 변화 는 좋은 변화만을 가져온다. 자아가 마음을 지배할 때 마음은 유리벽(자아에 대한 믿음)에 끝없이 부딪는 새와 같다. 세상은 축소되고 우리는 작은 감옥에 갇혀버린다. 벽에 놀 라고 당황한 마음은 그곳을 통과할 수 없다. 벽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 비록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지만 이 벽은 우리 내면세계에 벽을 세 워 구분하고 나누고 가린다. 그리하여 이타심과 삶의 기쁨이 흐를 수 없게 만든다. 자아라는 좁은 우주에 매달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고 염려를 한다.
자아의 좁은 세상은 소금 한 줌을 뿌리면 마실 수 없게 되는 한 잔의 물과도 같다. 반면 자아라는 장벽을 열어버리면 마음은 광대한 호수가 되어 한 줌 소금을 뿌려도 맛 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살아가면서 몇 순간만이라도 마음을 내면의 고요함 속에서 쉬게 하고, 분석과 직접적 체험을 통해 삶에서 자아의 자리가 어디인지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진정 가치 있는 일이다. 자아의식이 자기를 중히 여기는 마음이 존재를 장악하는 한 지속적 평화는 절대 맛볼 수 없다.
발췌, 번역|로터스불교영어연구원
● 이 글은 티베트 불교 비구 마티유 리카르(Matthieu Ricard)의 2006년 저서인 『행복 : 삶의 가장 중요한 기술을 닦는 법(Happiness: A Guide to Developing Life’s Most Important Skill)』을 요약해서 실은 2006년 7월 『Lion’s Roar』 에서 발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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