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딸라(sitala)! 번뇌가 사라진 쿨(cool)한 삶을! 시딸라 스님 편|슬기로운 수행생활

시딸라(sitala)! 번뇌가 사라진 쿨(cool)한 삶을!

시딸라 스님 편

캄보디아 승왕(상기리자) 조문하는 시딸라 스님 (가운데)

태국 출라롱콘왕실사원의 왓벤짜 주지 스님과 함께한 시딸라 스님 (오른쪽)

항시 기도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불교
계룡산 연천봉 아래 있는 신원사에 다니며 집안 부엌이나 장독대에 정안수를 떠놓고 기도하던 어머니. 누군가를 위해 항시 기도하던 그 모습이 유년시절의 내겐 ‘불교’였다. 불교란 무엇인가? 어머니로 인해 생겨난 의문을 풀고자 운허 스님의 불교사전을 탐독하며 불교의 개념을 익혔다. 말하자면 어머니는 나를 불교의 길로 이끈 첫 스승이다.

어머니로 인해 잠재의식처럼 자리 잡은 그 의문이 다시 떠오른 건, 1971년 육군2사관학교(이후 3사관학교로 통합)를 졸업하고 수년이 지나 소령으로 진급했을 무렵이다. 민통선 인근 지역 산골짜기에서 ‘송학사’라는 간판을 보고 ‘송악사 가는 길’이라는 노래 가사에 나오는 사찰로 오인해 들른 곳이 다름 아닌 군법당이었고, 그곳에서 군종병인 직지사 출신의 스님과 군법사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서울로 발령받으면서 불교를 정식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길에 대해 조언을 구해, 종로 대각사의 광덕 스님으로부터 불명을 받고 대원불교대학과 대불련 등에서 공부하며 활동했다. 1985년 전역한 후로는 조계종 포교사단 대학팀장으로 여러 대학에서 대불련 지도법사로 활동했고, 통일부 산하 하나원의 포교강사로도 활동하며 불교대학원과 간화선 모임을 통해 공부와 수행을 이어갔다. 이 무렵 위빠사나 수행처가 서울에 개원되면서 위빠사나를 접하게 되었고, 한국에 방문한 미얀마의 우 조띠까 스님을 친견하고 법문을 들을 수 있었는데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아직 모르는 것이다”라는 말씀이 지금도 큰 울림으로 남아있다.

미국의 인공지능 과학자인 김사철 박사가 방한 시 포교사로서 그를 모시고 안민포럼과 여러 기업의 강의를 다닐 때 그의 강의 또한 기억에 크게 남아있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 “수따마야!(내말을 들어보렴), 찟따마야!(사견을 갖지 말고 순수한 마음으로 들어보렴) 바와나마야!(내 말대로 한번 실천해보렴)”라며 <깔라마경>을 소개하는 것도 그러했지만 우주선 엔진의 8기통을 불교의 8정도와 상호관계로 설명하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의 남다른 강의를 통해 불교가 종교를 넘어 우리생활 전반과 연결되어있음을 배울 수 있었다.

여러 법연을 통해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면 할수록 대자유인에 대한 열망이 간절해져 출가의 싹이 자라났다. 그러나 일찍이 가정을 이룬 상태였기에 아들이라도 출가시키고 싶은 바람에 당시 초등학생에 불과한 아들을 설득하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결국 가족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지만, 그 바람이 쉽게 포기되지 않아 아들에게 “네가 대학 졸업 후나 군대 제대 후 생각이 바뀔 수도 있으니 그때 다시 논의해보자”며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군에서 제대한 아들은 출가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만일 내가 출가를 한다면 네가 가장으로서 집안을 책임져줄 수 있는지, 아들에게 부탁이자 제안을 해봤어요. 이후 4년쯤 지나 고맙게도 아들의 답변과 가족의 동의를 구할 수 있었죠. 출가를 하기엔 늦은 나이라 처음엔 태고종으로 출가를 고려하던 차에 미얀마의 마하시선원과 쉐우민국제센타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었어요. ‘수행의 불교’로 알려진 미얀마에선 출가연령에 제한이 없었고, 다른 한편으론 이뭣고(是甚麼), 무(無), 뜰 앞의 잦나무 등 안 해본 화두참구가 없었지만 의정(疑情)이 생기지 않던 내게 간화선보단 위빠사나가 더 잘 맞는 수행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테라와다불교 사원(미얀마)

등불 같은 지침, 도움을 청하면 쿨하게 도울 것!
2006년 6월8일은 그에게 남다른 날이 아닐 수 없다. 59세에 출가자로서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시딸라(sitala)! 미얀마의 쉐우민국제센타에서 그는 이름그대로 ‘쿨(cool)한’ 법명을 받게 되었다. 시딸라는 번뇌가 없어져 시원(cool)한 상태를 뜻하는 팔리어이다. 여기에 스스로 ‘시원’이라는 순 우리말을 붙여, 그날 이래로 그는 부처의 제자인 비구로서 시딸라 혹은 시원 스님으로 통하게 되었다.

“미얀마에서의 첫 인상과 느낌은 계율이 살아있다는 거였어요.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속에 서로를 위한 배려가 있고, 배움에 있어서도 시스템적인 교육이 아닌 자연스러움이 있다고 할까요. 가령 테라와다 사찰에서는 법당에서 법납 순으로 앉는데, 사미나 행자가 맨 뒤에 앉아 앞의 큰스님들을 보고 따라하며 스스로 몸에 익혀 학습하는 자연스러움이 있어요. 그래서인지 수행자라는 긴장감보단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이 있는 것 같아요.”

이와 관련해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수계 후 쉐우민센터의 명상실에서 여러 나라 스님들과 명상을 하다 졸음에 빠진 적이 있었다. 한국의 선방이라면 입승 스님의 죽비가 한쪽 어깨를 소리 내어 쳤을 것이고, 그렇게 졸음을 쫓아냄과 동시에 도반들의 수행을 방해한 것 같은 미안함과 긴장감을 지닌 채 수행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쉐우민 명상지도자인 사야도는 내 어깨에 살짝 손을 대며 이렇게 얘기했어요.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명상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방에 가서 쉬었다가 조건이 갖추어지면 나와 명상을 하십시오.’ 나지막한 소리였지만 그토록 큰 울림의 사자후는 처음 느껴보았죠.”

상주 백화산 야외 법회 모습

처음 미얀마에 가서 국제불교대학(ITBMU)에서 수학 중인 우 뿐냐 스님을 만나 공부할 당시 수업료를 일체 받지 않는 문화에 대해서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수업료를 받는 것은 영업행위의 일환이라며 국가의 지원과 보시로만 학교를 운영한다는 스님의 설명에 감탄을 했다. 그때 쉐우민, 파아옥, 마하시, 고엔카 센터 등을 7년 정도 오가며 다양한 수행법을 배웠고, 국내에도 담마코리아라는 고엔카 센터가 생기면서 그곳에서도 수행할 수 있었다. 그 외에 스리랑카를 비롯해 인도의 수행센타와 파고다에서도 수행을 이어갔고, 신체의 7장소 또는 32장소를 돌아가며 알아차림과 집중수행을 하는 태국의 전통적 수행법도 배울 수 있었다. 당시 왓람펑수행처에서 알게 된 치앙라이 왓돈탄 주지스님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그의 배려로 왓돈탄에선 언제든 수행생활을 할 수 있고 태국에서 출가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을 땐 그곳에서 출가식을 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한편 스님은 의정부의 왓 담마까야, 경주의 왓 바와나 사원, 김해의 미얀마 비도우 선원, 왓 김해 위빠사나 태국사원 등 국내 테라와다 사원 등에도 도움이 필요할 때면 언제든 발 벗고 나서 돕고 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늦은 나이에 출가하고 싶어도 용기나 정보가 부족해서, 또는 출가를 생계나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오인하는 일부 부정적 시선이나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출가에 어려움을 느끼는 이들에게 조언과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

“광덕 스님에게 재가자로서 불명을 받을 당시 스님께서 법문 중에 하신 말씀이 잊히지 않아요. 대중들에게 ‘너 주지나 해먹어라!’며 호통을 치셨는데, 출가자들에게 종무직 맡아 사찰관리자로 살지 말고 수행에 전념하라는 사자후로 생각되었죠. 출가 후 그 말씀이 한 번씩 상기되더군요. 그래서 내 평생 사원이나 수행센터를 갖지 않고 강의 요청이나 도움이 필요한 인연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마음가짐을 다지곤 합니다.”

은사 스님을 모시고 한국 사찰순례 중인 모습

은사 스님을 모시고 오대산 월정사 부도 참배가는 길

특별함이 없는 행복, 일상에서 해피하게!
강한 울림의 가르침은 수행의 길을 나가는데 오래토록 길을 밝혀주는 등불과도 같다. 부산 태종사의 도성 큰스님(뿐냐산또)의 가르침 또한 출가자로서 바른 마음가짐을 다지는데 큰 지침이 되어주었다.

“출가하고 3년 후쯤 큰스님과 인연되어 태종사에서 십년 정도 생활했어요. 당시 큰스님을 일시에 바꿔놓은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큰스님이 해인사와 대흥사의 주지로 계실 때는 누구도 눈을 마주치면서 논쟁을 못했다고 해요. 그만큼 기가 세셨고 화도 많으셨다는데, 태종사에 머물던 젊은 스리랑카 스님이 그 모습에 실망해 짐을 싸서 가려했던 사건이 있었어요. 그때 큰스님께서 자신의 화 하나 알아차리고 다스리지 못하면서 무슨 수행자라 할 수 있겠냐며, 스리랑카 스님에게도 부끄럽지만 자비보살로 정평 나있는 은사인 지월 스님을 뵐 면목이 없다고 하셨죠. 그 사건 후로 큰스님께선 누구든 도움을 청하면 조건 없이 도와주고 모든 사람에게 친절과 자비를 베푸셨어요.”

스승의 큰 깨우침으로 인해 그 제자는 스승에 이어 나름의 계율로서, 등불과도 같은 지침으로서 삼게 된 것이 있다. 누구든 도움을 청하면 조건 없이 쿨하게 도울 것! 그런 스님에게 명상이나 수행 또는 출가에 관심 있는 이들을 위한, 쿨한 조언을 청해본다.

“바른 마음가짐을 기본으로 바른 정보를 입력시켜야 바른 길로 갈 수 있어요. 그러기위해선 신뢰할만한 불서들을 읽으며 불교에 입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초)전법륜경>에는 사성제와 팔정도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특히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내용이 나와요. 부처님의 마지막 발자취와 유훈이 담긴『대반열반경』에는 ‘모든 형성된 것은 소멸하기 마련인 법(Vayadhamma Sankara 와-야담마-상카라)이다. 방일(放逸)하지 말고 해야 할 바를 성취하라(Appamādena saṁpādetha 압바마데나 삼빠-데-타)’는 말씀이 나와 있어요. 또 <깔라마경>이라는 경전엔 진리를 찾는 방법과 함께 ‘판단해서 실제로 실천했더니 허물이 있어 안 좋은 결과를 준다는 것을 알았다면 알게 된 순간에 즉시 버려라. 반면 실천했더니 좋은 결과를 얻었다면 계속하라. 이렇게 안 좋은 것들은 버리고 좋은 것들을 실천할 때 모든 존재를 위해 사무량심(四無量心)인 자애(멧따), 연민(까루나), 같이 기뻐함(무디따), 평정심(우펙카)이 일어나며, 이렇게 실천하여 산다면 다음 생이 있든 없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부처님 말씀이 나오죠. 이렇듯 기본적인 불서만 보더라도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문제의 해법과 진리의 길이 안내되어있어요. 그래서 불서를 통해 바른 배움을 익히는 한편, 다양한 수행법을 최소 3개월 정도 배워 실천해본 후에 자신에게 잘 맞는 수행법을 찾는 것이 중요해요.”


태국 담마까야 스님들과 함께한 모습

새벽 4시 반, 시원 시딸라 스님의 일상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새벽예불과 명상을 시작으로 주변정리와 운동, 공양과 휴식을 끝내면 오전 9시, 이 시간과 저녁 5시엔 <니까야>를 독송한다.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시간이다. 편안함은 곧 행복이다. 행복은 특별한 데 있는 게 아니다. 행복을 특별한 것으로 인식하는데서 문제가 생긴다. 테라와다 불교나라에선 일상에서의 행복을 중시한다. 일상에서 수시로 해피, 해피하게! 그것이 행복의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나의 편안함은 이웃을 행복하게 만든다. 이웃의 편안함은 곧 나의 행복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그들을 위해 항시 축원한다.

“고통과 괴로움에 놓인 존재들이 모든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위험과 두려움에 처해있는 존재들이 모든 위험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기를! 근심과 걱정 있는 존재들이 모든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나기를! 사두(Sadhu:善哉) 사두 사두!”

그 옛날 어머니의 기도와는 다른 방식이지만 그와 같은 마음으로서….

함영
1998년부터 글을 지어 다양한 매체에 기고했고, <빅이슈 코리아>에서 편집장을 지냈으며, 글짓기와 기획 및 출판 등으로 곰탕을 끓여 꽃을 꽂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밥맛이 극락이구나>, <인연으로 밥을 짓다>, <곰탕에 꽃 한 송이>, <노란 문 공양간이 열리면>, <스승들이 납시어 어른스크림을 사드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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