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불교, 어떻게 볼 것인가? | 사유와 성찰

조선 불교,
어떻게 볼 것인가?

김용태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HK교수


‘조선 불교’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숭유억불, 쇠퇴와 침체, 여성과 서민 위주의 신앙 등일 것이다. 이는 그동안 꽤 어두운 회색빛으로 불교 전통의 자화상을 그려왔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조선은 성리학을 기치로 내건 나라로 불교는 유학자들의 비판과 정부의 정책적 억압을 거치며 급격히 내리막길을 걸었고, 당시 사회의 비주류였던 여성과 기층민의 신앙으로 겨우 명맥만 유지해왔다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그 결과 선과 교학의 전통, 종교로서의 사회적 역할과 기여 등 조선 시대 불교의 실제 역사상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 조선 500년간 불교는 공격과 수탈을 끊임없이 당해 사찰의 존립 기반을 잃고 승려는 천민으로 대우받는 등 폐불 직전의 상황에 이르렀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조선 시대 불교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통념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일까? 아니면 편향적 선입견에 의한 비역사적 인식일까? 우선 인정해야 할 것은 조선 시대에 정치와 사회의 주류 질서에서 불교가 배제되면서 고려 말까지 누려왔던 사회적 위상이 흔들리고 기득권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실상은 당시부터 후대까지 역사 인식과 서술에 충분히 반영되었다. 그런데 불교사 인식의 생성 과정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점은 19세기의 기억이다. 전통의 상이 조형되던 근대기에는 바로 직전인 19세기의 기억이 뚜렷이 남아 있었고 그것이 역사 인식에 알게 모르게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19세기는 국가와 사회의 공적 시스템이 균열을 일으킨 시기였고, 이는 불교계에도 여파를 미쳐서 경제적 부담과 사적 침탈이 가중되는 등 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에 따른 잿빛 기억이 20세기 초에 전통의 상을 형상화할 때 투사되었고, 여기에 식민사관의 타율성·정체성론이 덧씌워지며 부정적 역사상이 더 선명해졌다.

특히 경성제대 교수 다카하시 도루의 『이조불교』(1929)가 나오면서 조선 시대 불교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학술 담론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고, 억압과 쇠퇴, 침체와 멸절이 조선 불교를 상징하는 기본 틀로 굳어졌다.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이러한 도식은 바뀌지 않았고, 1960년대부터 1980년대를 거치며 식민사관을 비판·극복하려는 학계의 노력이 가시적 성과물을 냈지만 조선 시대 불교에 대한 기존의 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 결과 한국사에서 조선 시대의 특징을 말할 때 성리학과 유교 사회만 꼽게 되었다. 이는 조선적 전통의 외연을 상당히 좁히는, 확장성을 가로막은 역사 인식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 불교의 실상은 어땠을까? 조선 500년 동안 불교는 기반을 유지했고 가장 중요한 종교 신앙으로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조선 후기에도 교학과 수행, 신앙 면에서 전혀 퇴보하지 않았으며, 현재 전하고 있는 전통 사찰, 불상과 불화, 불서의 대부분은 17세기 이후 중창되고 조성되었다. 이렇게 축적된 유무형의 자산은 현재 한국 불교 전통의 원형과 근간을 형성했다. 간화선의 선양과 임제종 법통 전승, 선과 교의 병행과 화엄 교학의 중시, 염불 신앙의 대중적 확산은 조선 후기에 그 골자가 갖추어졌다. 이 점에서 조선 불교는 고려 이전의 불교 전통과 현재를 잇는 연결 고리이자 가교라 할 수 있다. 시야를 더 넓혀보면, 한국인의 사유와 가치관의 골자를 이루는 것은 유교만이 아니며 1,700년 가까이 한국인의 삶과 어우러져온 불교야말로 가장 중요한 정신적·문화적 자산이다. 삼국부터 고려까지는 불교, 조선은 유교라고 하는 일면적이고 단절적인 도식을 적용하기보다는, 오랜 역사와 줄곧 함께해온 불교, 유교와 불교가 공존한 조선적 전통을 한국사 인식의 기본 틀로 설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조선 시대 불교가 억압과 쇠퇴의 내리막길만 걸었다는 기존의 인식을 바꾸고 전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먼저 여말선초기는 정치와 사상 등 상부구조에서 불교에서 유교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진 유불 교체의 시기였다. 다만 조선 개국과 함께 성리학이 대세가 되고 사회 전체가 유교적 체제로 갑자기 전환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이 세워지고 100년이 지난 15세기 말까지도 불교의 지지 기반은 여전히 강력했고, 17세기 이후 유교 사회가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춘 뒤에도 왕실과 민간 차원의 불교 신앙은 지속되었다. 따라서 ‘조선 500년=유교 사회’라는 등식은 지나친 도식화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그동안 조선 불교를 상징하는 개념으로 쓰여온 ‘숭유억불’에 대해 생각해본다. 유교를 높이고 불교를 억누른다는 뜻의 숭유억불은 얼핏 조선의 시대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용어처럼 보인다. 그러나 숭유억불이나 숭유배불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조선 시대 문헌 자료에는 보이지 않는다. 유교와 불교를 극명히 대비시킨 숭유억불 용어는 사실 후대의 인식이 반영되어 탄생한 일종의 조어이다. 현재 확인되는 바로 숭유억불이란 말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1906년 10월 16일자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이다. “한국은 조선 500년에 숭유억불하여 불교가 크게 쇠퇴했고 일본은 불교를 숭배하여 집집마다 불상을 두고 사람마다 불음을 암송하여 나라의 종교가 되었다”라고 해, 일본의 숭불 전통과 조선의 숭유억불을 비교하고 있다.

일본인 학자 후루타니 기요시가 쓴 1911년의 글에서도 ‘배불숭유’를 언급하면서 조선 시대는 한 편의 불교 쇠망사라고 보았다. 이후 다카하시의 『이조불교』를 거치면서 유불 교체와 숭유억불, 그로 인한 불교의 쇠퇴와 침체가 조선 시대 불교의 특질로 고착화되었다. 그렇지만 조선 500년간 숭유억불 정책이 일관되게 행해졌다고 보는 것은 비역사적 인식이며, 각기 다른 시기별 상황과 전개, 그 역사상의 변화에 유의해야 한다. 불교 내적으로도 선과 교, 신앙과 의례 등 다양한 전통이 복합적으로 계승 발전해왔음에 주목해야 하며, 나아가 조선 사회 전체로 시야를 넓혀 그 시대성을 추구해야 한다.

조선 시대 불교의 전체 상을 그리기 위해서는 여러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있다. 국가 정책과 연동된 승려의 사회적 지위와 대우, 승단 내의 계층적 분화와 역할, 사원경제와 법규, 유교 사회에서 불교의 종교성, 저술과 주석서에 나타난 불교 사상, 불교와 유교의 사상적 교차 지점, 문학과 문화 예술에서의 불교적 특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해야 할 주제와 대상이 많이 남아 있다. 이는 결국 조선 시대에 불교가 과연 무엇이었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문제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나아가 조선 불교 연구는 동아시아사 차원에서 또 다른 확장성을 지닌다. 한국은 고유성과 동아시아 공통의 보편성을 공유하고 있다. 한자 문명권인 동아시아는 오랜 기간 동질적 ‘불교문화권’을 이루어왔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민간신앙, 유교, 도교, 기독교 등 역사적으로 강력한 경쟁자는 늘 있었지만, 불교를 매개로 한 인적 교류와 사상 및 문화의 전파, 공통 정체성의 형성은 동아시아의 역사적 특성을 이루었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거시적 관점에서 조선 불교를 바라보고 조선적 시각을 통해 동아시아를 해석하려는 인식의 전환이 필수적이다.

조선 시대 불교는 중국의 명·청이나 일본의 에도시대 불교와의 비교를 통해 차이와 공통분모를 추출할 수 있다. 동아시아 근세 불교는 주류 사상이나 다른 종교와의 갈등과 공존, 실증 및 주석 위주의 문헌학적 풍토, 전통에서 근대로의 이행 과정에서 종교의 역할 등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또 미술사를 제외한 근세 불교 연구는 다른 시대나 분야에 비해 여전히 미진한 상황이다. 이는 현존 자료가 가장 많은 시대임에도 동아시아 불교사나 사상사에서 정당한 비중이나 가치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조선 불교 연구는 동아시아 근세를 새롭게 조명하고 보편사적 담론을 생성하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김용태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한문불전번역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조선 불교사상사: 유교의 시대를 가로지른 불교적 사유의 지형』, 『토픽 한국 불교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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