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선객,
다시 휴암 스님을 생각한다
노부호
서강대학교 경영학과 명예교수
휴암 스님이 입적하신 뒤에도 처음 몇 해는 기기암도 가보고 했는데 학교 일 등으로 정신없이 지내면서 한번 가보아야지 하는 생각만 스쳐 지나갔을 뿐 나에게 아름다운 추억과 정신적 성장을 제공했던 기기암을 가까이하지 못했다. 휴암 스님의 사상을 재조명하는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그간 경영학 공부하느라 불교와 관련해서는 글도 쓰지 않았고 불교 문제에 대해서 깊이 있는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쓸 수 없다고 했어야 했는데 불교를 통해서 휴암 스님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생각할 때 쓰지 않을 수 없다는 의무감이 나를 엄습했다. 그래서 일단 쓰겠다고는 말했지만 어떻게 써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고 한동안 고민해야 했다. 스트레스도 받았다. 일단 방향은 『한국 불교의 새 얼굴』(대원정사, 1987), 『장군죽비』(상하권, 명상, 1994) 그리고 휴암 스님의 마지막 육성이 된 "누가 감히 불교를 사랑하나" (대중불고, 2541. 10)에 기초를 두고 휴암 스님의 사상을 한번 정리해보고자 하였다. 이 중 『장군죽비』는 방대한 분량이기도 하지만 휴암 스님의 사유의 폭과 깊이를 따라가기 힘들어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고 여러 가지 미비한 점이 많을 것이란 점을 미리 밝혀두고자 한다.
『장군죽비』는 어떤 책인가?
그는 『장군죽비』에서 '왜 깨달음이 문제시되는가' 라는 질문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것은 깨달음의 문제가 불교인의 최우선의 가치이고 또한 깨달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우리들 자신의 모든 현실적 관심과 활동들이 허깨비요 여몽환포영일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한 불교적 진리관의 자각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다음 질문은 '일상적인 활동 속에도 과연 깨달음이 가능한가', 그리고 '참선적인 방법을 역사로부터 영영 추방시켜버리고도 깨달음과 존재의 해탈이라는 길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1) 깨달음의 방법들 2) 깨달음의 상태의 성격 3) 깨달음을 성취하려는 현실의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등을 검토해봐야 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논의 속에서 그는 불교 진리의 문제점과 한국 불교의 문제점을 밝혀내고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불교의 깨달음
불교에서는 깨달음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대해 논의가 부족하였다고 생각했는데, 휴암 스님이 처음으로 깨달음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가를 자기 체험에 기초를 두고 논리적으로 설명하였다. 나는 여태까지 다른 스님으로부터 이렇게 논리적인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그간 깨달음과 관련하여 들은 것은 어느 스님은 콧구멍 없는 소 이야기를 듣고 깨달았다느니 돈오돈수와 같은 추상적인 이야기뿐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없이 콧구멍 없는 소, 돈오돈수, 돈오점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지금까지 깨달음에 대한 논의는 구체적이기보다 추상적이고 이성적이기보다 신비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휴암 스님은 깨달음이란 "내가 없어지고 일체의 대상들이 내가 된다는 것으로 대상적 존재들에 대한 분별의 의식을 죽인다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삼독과 의지는 존재의 실체성에 대한 애착을 뿌리로 해서 돋아난 것들이기 때문에 존재가 뿌리째 뽑혀 존재의 바탕이 공한 줄 알 때 비로소 근치가 가능한 것으로 의식의 하나인 "삼독은 범부중생의 단순한 의지적 노력으로는 근본 치유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존재는 관법으로만 녹일 수 있다. 부처님 이래의 사념처관이나 수식관 등 일체의 관법들이 노리는 바는 그저 열심히만 하면 적정에 이르고 대정의 용광로 속에서 마음이 자연히 죽어지는 현상이 결과적으로 수반되어진다"는 것이다.
깨달음과 관련하여 그는 승가인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누었다. 첫째, 순수하게 수행과 정진을 통해서 깨달음의 길을 가는 부류와 둘째, 처음부터 현실적 활동 그 자체를 자신의 승가 생활의 주제로 하여 뛰는 부류인데 이들은 고민이 없다고할 수 있다. 그러나 승가인으로서 진정 고민이 있다고 할 사람들은 셋째 부류인데 출가 수행가로서 자신의 입지를 처음부터 깨달음의 길을 가는 것으로 했지만 현실과 역사에 대한 어떤 형태의 책임감도 망각할 수 없어 양자 병행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민은 앞뒤만 바뀌었지 생업에 종사하며 깨달음의 길을 병행해가야 한다는 측면에서 범부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활동과 수행을 동시에 해서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이 휴암 스님의 결론이다. "중생이란 나 의식 있는 한 남 의식 없앨 수 없고 남 의식 있는 한 나 의식도 없앨 수 없는 존재인데 어떻게 남 위한다는 선행 공덕으로 번뇌와 생사의 원흉인 의식 그것을 끊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제의 구제를 위해서는 선행 공덕적 활동은 일단 보류하고 중지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불교의 개혁
불교에서 개혁이란 무엇인가? 휴암 스님은 진실하고 순수해지는 것이 개혁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불교를 사랑한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하고 있다. 불교는 욕망을 버리고 욕심을 버리는 것인데 문중 찾고 내 상좌 네 상좌 찾는다면 이것은 불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진실한 사람을 원하는 마음이 사무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큰스님이라면 욕심을 버리고 불교의 진리를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자기 문중이 마음속에 아른거리는 그런 상태로 과연 큰스님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 불교는 진실이 결여되어 있고 위선 투성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 '정진백수자니라', 그렇게 할 만한 힘이 없는게 분명한데 정진백수자니라 하고 있거든, 그러니까 한국 불교는 위선의 투성이라." "어느 절에서는 정초기도를 한다고 법당 안에 플랜카드를 턱 걸어놨는데 '정초 삼재 기도 법회'라 해놓고 운영한다면 신뢰할 수 있을까? 나는 안 된다고 봐. 그러니까 그건 위선 아니야?" 수행자는 많은 일을 하려고 생각해서도 안 되고 큰일을 하려고 생각해서도 안 되고 단지 진실한 참된 일을 하려고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는 조금 어렵더라도 불고가 진실을 찾아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 한국 불교는 무속화되고 물질주의에 물들고 돈과 이익과 명예 앞에 아무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불교의 힘
한국 불교가 왜 힘이 없는가?
사상의 부재, 가치의 부재 때문이라고 휴암 스님은 주장하였다. 한국 불교는 윤리적 자아반성이나 양심의 문제를 입체적으로 취급하는 능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불교는 존재를 건지기 위해 정신을 죽인다는 것이다. 분별망상의 치성에 지나지 않는 분별심, 시비심, 양심, 이런 류의 세계를 죽이는 생리가 있다는 것이다. 근원적으로 마음이 무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노루를 살리기 위해 거짓말하고 그것으로 족하고 뒷소리는 아예 필요없다는 성향이 있는 것이다.
그는 "요즘도 명색이 종단의 최고 큰스님들이라는 분들 중에 '무당을 통해서라도 불교인만 만들면 된다' 하고 있을 정도다"라고 말하면서 불교의 양심 결여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존재론적 구제 진리의 성격상 나타나는 것으로 수천 년의 집단 유전을 통해서 불교계와 승가인들에게 체질화되어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하면서 불교 진리의 운영에 변화가 있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진실은 정신을 바로 세우는 것인데, 한국 불교에 진실이 결여되었다는 것이다. 힘은 숫자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정신에서 나온다는 것이 휴암 스님의 주장이다. 불교가 정신을 바로 세워 신뢰를 회복하고 하나의 공동체로 일치를 이룰 수 있을 때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가 표방하는 "근원적인 주체라는 이 하나의 명제가 어떻게 인간의 현실적인 삶의 원리가 될 수 있는가를 제시함으로써 사상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승려들이 정말로 정진을 빠져리게 해야 되고 깊은 사색을 하면서도 문제의식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도들에게 삶의 원리를 제시해 주어 근원적으로 내가 적정할 수 있는 그런 삶의 자세와 방법을 우리가 끊임없이 개발해 내어 신도들에게 가르쳐 주고 암송시켜 하나하나가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되고 그럴 때만이 한국불교가 해볼만한 불교가 된다"는 것이다.
불교의 계율
그는 『장군죽비』에서 "내적 고요를 잃지 않는 무심의 상태에서 인연 따라서 고기를 먹은 것과 허기진 배를 움켜 안고 정신없이 탐닉하면서 채식을 한 것과 어느 쪽이 진여에 더 가까울까?" 라고 질문하면서 계(戒)는 마음의 고요요 내적 적정이라고 주장하였다. "경허는 오입을 하고도 오입한 자국이 마음에 없다"고 말함으로써 계율이 존재의 구제에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오해될 소지를 남겼다. 그러나 계율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계율을 초월해야 함을 강조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불교의 계율은 존재의 실현을 위해서 있는 것이 그 일차적 의의이며 엄격한 의미에서 구체적인 현실의 실현을 위해 있는 연원은 아니다. 존재의 실현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계상은 주체자의 주체적 태도에 의해 얼마든지 자율적으로 배척, 초월되어도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계율 그 자체보다 방편을 써서 안이하게 대처하고 진실한 양심을 키워내지 못한 것이 한국 불교의 맹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술 안 먹고 고기 안 먹는 것을 계율이라 보지 않고 진실한 양심을 키워내고 전통을 쌓아가는 것을 계율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오히려 노루가 어디로 갔느냐고 묻는 포수에게 암주는 진실로 대처하여 그의 살생심을 항복받든지 아니면 계율을 지키다 죽는 역사를 남겨야 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는 개혁을 할 때는 "초비상 결제 기간이라 생각하고 잃어버렸던 계행, 소홀히 했던 계행을, 방치했던 계행을 다시 추스르고 기도하는 자세, 정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군자는 그 서투름을 용서할지언정 그 졸렬함을 용서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계행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행을 수행의 기초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교의 복사상
그는 또한 진실을 통해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복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시은이 많고 상좌가 많아야 복이 많다고 하는 한국 불교의 복사상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이라는 것이다. 수행자가 이 세상의 별이 되고 길잡이가 되는 것이 참된 행복이라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이것이 한국 불교에 결여되어 있고 진실하고 참된 한마음이 정말로 복이라는 진정한 복사상을 한국 불교가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중이다 상좌다 해서 서로를 가르다보니 각자 설 곳이 없게 되어 불교 집단이 박복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한국 불교의 새 얼굴』에서 과보적 인과사상은 현실의 인간을 과보적 존재로 보아 물질의 차이에 따라 인간을 차별화함으로써 물질의 노예로 만들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부자나 정승이 존재에 있어서 저 평범한 농부보다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휴암 스님은 인간을 물질에 기초를 둔 상대적 가치가 아닌 정신에 기초를 둔 절대적 가치로 대할 것을 주장하면서 "가난한 자나 억눌린 자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내세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현금(現今)에서 인간 본연의 가치와 긍지를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인본주의 사상을 역설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왜 불교는 자기만이 자기의 주인이고 자신이 일체의 주인이라면서 스스로 화복의 하인이 되는 과보적 인과사상을 앞장서서 전파하고 있느냐고 비판하고 있다.
나는 이번에 원고 청탁을 받고 오랫동안 목혀 두었던 『장군죽비』를 다시 꺼내 읽어보았고 다시 한 번 휴암 스님의 개혁정신과 사유의 깊이에 놀랐다. 『장군죽비』는 깨달음의 문제를 기초로 한국 불교의 문제를 다른 고전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장군죽비』를 가지고 한국 불교가 많은 토론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간 『장군죽비』에 대해 어떤 비평이 있었는지 찾아보았는데 어느 스님이 경허 스님의 계행과 관련된 휴암 스님의 논의를 부분적으로 비판한 것밖에 찾을 수 없었다. 지금 나와 있는 대부분의 불교 서적은 교양서다. 어떻게 우리들의 인격을 고양시키고 다른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잘하고 살 수 있는가, 그래서 많은 복을 누리고 살 수 있는가를 써놓은 책이 대부분이다. 체험의 진실을 사유의 깊이로 이야기하면서 불교의 근본문제인 깨달음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는 책은 없는 것 같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한국 불교는 왜 힘이 없나 했더니 이제는 알았다. 한국 불교는 진실이 없고 양심이 없고 그래서 사유의 깊이가 없다는 느낌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해서 이렇게 정곡을 찌르는 칼을 뽑았는데 제대로 나서는 검객이 없는가?
그는 "정말로 주체, 부처님이 너 자신을 의지하라. 너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 나는 그 말에 가슴에 충격을 받고 학생시절을 살았고, 그런 연장선상에서 해외 유학 가는 것도 다 포기하고,나는 출가를 한 게 아니라 산에 유학을 왔어 산에 유학을 오는 심정으로 불교에 귀의했다"는 비장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장군죽비』를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치열했던 구도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노부호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 경영학과 명예교수, 21세기비즈니스포럼 공동 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V이론에 의한 제3의 경영』, 『통제경영의 종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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