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행일지[대한불교조계종 신행수기 공모전 수상작]
만삭의 며느리 갓바위 부처님께 인도했던 어머니, 내 불연의 시작
참 불자의 삶 지켜보며 사경하고 기도하는 것이 이제는 일상이 돼
어머니 극락왕생 발원하며 백련암에서 광명진언 100일 기도 회향
부처님께 의지하며 평생 기도와 보시를 실천한 어머니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대법행 보살님 둘째 며느님이시죠? 해인사에서 어머니와 같이 기도하던 보살입니다. 어머님이 이렇게 오래 절에 안 오실 분이 아닌데, 전화도 안 되고. 그런데 동네 어르신이 대법행 보살님께서 돌아가셨다고 말씀하시네요.”
어머니는 평생 부처님께 의지하며 살아오셨다. 홀로 다섯 명의 자식을 키운 고단한 삶을 갓바위 부처님께 털어놓으셨다. 내가 만삭일 때 어머니가 갓바위 부처님께 다녀오자고 하셨다. 끝없는 돌계단을 네 발로 기어가듯이 울며 겨자 먹기로 올라갔다. 위험한 일이었지만 어머니의 기도 덕분인지 건강한 딸을 낳았고 나 역시 아이 손잡고 갓바위에 다녔다.
어머니는 새댁 때부터 갓바위 암자와 인연을 맺었고, 나도 함께 다니게 되었다. 매년 스님께 인사드리며 새해를 맞이했다. 부처님오신날에는 못 이기는 척 절에 갔지만, 알록달록 예쁜 연등과 청아한 목탁 소리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렇게 절에 다닐 때는 참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바쁠 때도 같이 절에 가줬으면 바라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부처님을 열심히 믿지 않아서 그렇다는 둥,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거듭하셨다. 현세 기복적인 불교를 강요하는 어머니가 난 싫어졌다.
“어머니, 부처님이 무슨 신도 아니고, 안 믿는다고 벌주고 믿는다고 복 주면 그건 너무 옹졸한 부처님 아니에요?”
남편은 괜한 분란 일으키지 말라고 나를 나무랐다. 그러던 즈음 우리 동네에 불교대학이 생겼다.
‘어머니부터 불교대학에 보내드려야겠다!' 생각하고 얼른 등록했다. 어머니는 어릴 적 총명했지만 아버지 때문에 중학교에 가지 못해 평생 공부 못 한 한을 가지고 사셨다. 늘 책을 읽고, 버려진 전단까지도 주워 읽으실 정도였다. 그런 어머니라 불교대학을 엄청난 자랑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다니셨다. 드디어 제대로 된 불교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나에게 고마워하셨다. 어머니는 솔선수범으로 공부하고 기도하고 봉사하는 노보살님으로 젊은 도반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행복하게 절에 다니셨다.
나도 불교대학에 다니며 경전을 공부했다. 큰아이를 데리고 다녔는데, 연말 개근상을 받을 때 큰스님께서 딸아이에게 “니가 엄마보다 더 훌륭하다”하시며 사탕을 주셨다.
자식들이 바쁜 40~50대에 접어들자 어머니가 금요일마다 무거운 소금 자루를 배낭에 넣고 갓바위에 올라가셨다. 칠순이 훌쩍 넘었는데도 말이다. 적은 돈으로 많은 사람에게 보시하고 싶은 마음에 택한 것이 소금이었다. 음식에 반드시 들어가는 소금처럼 어머니는 언제 어디서나 꼭 필요한 존재셨다. 주말에는 절에서 종무소 일을 도왔다. 그렇게 몇 년을 다니던 어머니도 연로해지고 허리가 고장 나 더 이상 갓바위에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본가에서 합천 해인사에 다니기로 했다.
시골 본가에 들어간 어머니는 동네 어르신들과 잘 지내셨다. ‘무주상보시'가 생활화된 어머니였기에 현관문 앞에는 동네 분들이 놓고 간 먹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글을 모르는 할머니들이 은빛학당으로 공부할 때는 어머니가 조교 역할을 하셨다. 금요일에 해인사에 가서 예불에 동참하고 철야기도까지 하셨다. 보청기를 하고도 소리를 잘 듣지 못하셨기에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 스님의 입 모양을 보며 법문을 들었고, 철야기도 때도 단 한 번도 졸지 않고 꼿꼿하게 앉아서 하셨기에 해인사에서 신심 깊은 대법행 노보살님을 모르는 분이 없었다.
어머니는 공부를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셔서 항상 책 읽고 공부하는 둘째 며느리를 과분하게 예뻐해주셨다. 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전화 드리면 스피커 폰 너머로 “누꼬? 우리 둘째 며느리다. 지금 대학원 안 다니나.” 며느리 자랑에 신이 나셨다. 철학을 공부하니 불교 교리와 일맥상통하는 것이 많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연기에 의해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텅 빈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나누고 베푸는 보살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일상의 행복이라 생각한다.
어머니는 우리 집에 오실 때마다 내 책을 꺼내 들여다보셨다. “한글인데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하시며 늦은 밤 공부하는 며느리 앞에서 ‘반야심경' ‘금강경' ‘광명진언'을 사경하셨다. “피곤하신데 주무세요”하면 어머니는 하나도 안 피곤하다며 나와 함께하셨다. 어머니는 그렇게 마냥 밝고 건강한 분이었다. 아니, 영원히 그런 분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막내아들이 도박으로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우울증으로 살아갈 힘을 잃게 되자 시골집으로 와 살게 되었다. 다섯 남매를 잘 키워낸 자존심으로 살던 구순의 어머니는 막내아들과 함께 살며 몸과 마음이 급격하게 쇠약해졌다.
망가진 막내아들은 어머니 몫이 되어버렸다. 어머니는 당신이 아들을 바꿔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더욱 절에 의지했다. 허리도 못 펼 만큼 아픈데도 철야기도를 계속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하셨고 토요일 새벽, 갑자기 전화가 왔다.
그렇게 어머니는 홀로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어머니 모습은 너무나 평안했다. 어머니는 늘 당신은 마지막에도 기도하다 가거나 조용히 자는 길에 갈 거라고, 자식들 힘들게 하지 않고 단번에 갈 거라고 하셨다. 평소의 말씀처럼 어머니는 그렇게 가셨다.
몇 해 전 어머니랑 손잡고 봉안당을 알아보러 다녔다. 어머니 마음에 드는 곳을 정해 시조부모님과 아버님을 모셨다. 그곳에 작년 가을 어머니도 아버님 옆으로 모셨다.
49재를 못 지내 서운했지만, 때마침 백련암에서 ‘광명진언 100일 기도'를 한다는 연락이 왔다. 어머니가 늘 사경하고 외우시던 광명진언이었다. 100일 동안 매일 아침 기도하며 어머니가 좋은 곳에 가시기를, 편안하게 그곳에서 공부하며 사시기를 빌었다.
어머니 짐이 해인사에 있다는 말을 듣고 유품을 정리하러 갔다. 사용하던 이불과 땀으로 얼룩진 법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어머니가 사용하시던 108 염주와 ‘법보종찰 해인사'라고 곱게 쓴 돌멩이를 유품으로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가 남긴 신심과 자비, 딸의 삶에 이어지다
나의 친정 부모님은 기독교인이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못마땅했지만, 함께 불교 공부를 하며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어느새 나 역시 어머니처럼 경전을 읽고 사경을 하고 기도한다. 나도 모르게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다.
작년 10월 어머니가 돌아가실 즈음 회사 경영이 힘들어져 직원들 급여를 제때 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며 버티고 있다. 직원들도 사정을 알고 양해해주며 고통을 분담하고 오히려 위로해준다. 어머니처럼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다 보니 힘은 들지만 모두의 도움으로 잘 이겨내고 있다.
2년 전 석사 논문을 쓰고 조기 졸업했을 때 가장 기뻐하시던 어머니, 전화할 때마다 동네 할매들 다 들으라고 자랑하던 어머니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어 슬프다. 해인사에서도 기도할 때마다 유독 내 사진을 앞에 놓고 기도하셨다. 그렇게 나를 예뻐하고 사랑해주신 어머니, 이제 나도 큰딸과 둘째를 보며 자식을 위해 기도로써 용쓰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었던 어머니 마음을 이해한다.
기도하며 내 마음을 먼저 다스릴 줄 알아야, 평온한 마음으로 모든 인연을 편하게 대할 수 있으니 기도는 우리 삶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감로수와 같다. 매일 법문을 듣고, ‘금강경'을 사경하고 ‘신심명'을 읽고 쓰며 어머님의 모습을 떠올린다. 이젠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는 어머니지만 항상 내 마음 한가운데서 여전히 나를 응원해주신다. 부처님 법을 알게 해준 어머니 덕분에 나는 여전히 평온한 마음으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는다.
젊은 날 어머니는 내 곱고 기다란 손가락을 보며 “이 손은 공부나 하지 집안일이라곤 하나도 못 하게 생겼다”라고 핀잔을 주면서 설거지까지도 당신이 해주셨다. 겨울이면 차가운 내 손을 따뜻한 당신 손으로 꼭 잡아주셨다. 먼 훗날 그곳에서 다시 만나면 이젠 내가 어머니의 손을 꼬옥 잡아드릴 거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립습니다.
* 이 글은 <제12회 대한불교조계종 신행수기 및 제6회 발원문 공모전> 중, 전국여성불자회 회장상 수상작[윤은경(반야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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