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사람들 – 부처님의 제자들은 누구인가
1. 들어가는 말
(1) 불제자 공부가 필요한 이유
부처님께서는 탄생 시에 “삼계가 모두 고통에 빠져 있으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선언하셨다. 또한 『법화경』에는 부처님께서는 ‘개시오입(開示悟入)의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즉 ‘부처의 지혜를 열어 보여 중생으로 하여금 깨달아 들어가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출현하셨다고 되어 있다. 이는 중생을 가르쳐 해탈의 길로 인도하겠다는 자비의 선언이며, 그 구체적 실천이 바로 제자들의 양성이었다. 성도 직후 잠시 전법의 어려움을 염려하기도 하셨지만1) 선현의 권청을 받고 전법을 결심하셨고2), 마왕 파순(Māra)이 반열반에 들도록 유혹하자 “나의 비구·비구니, 우바새·우바이 사부대중이 지혜롭고, 계율을 잘 지키며, 능히 법을 배우고 전파하여 외도의 비판을 꺾을 수 있을 만큼 교단이 확고해지기 전에는 결코 열반에 들지 않겠다.”라고 거부하셨다.3)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대체로 제자들과의 문답에서 나타났고4),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방법도 제자들에게 하신 지도와 제자들의 삶을 통하여 드러났으며, 그 내용을 후대에 전달한 것도 제자들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제자들을 공부하는 것 역시 불교 이해의 핵심 부분이다.
(2) 불제자의 개념과 범위
불제자의 기준은 다층적이며 모호하다. 통계조사에서는 ‘응답자의 주관적 자기 인식(Self-identification)’을 기준으로 삼고, 사회학적 조사에서는 이에 더해 ‘종교활동 참여 빈도’와 ‘내면적 종교의식’을 함께 고려한다. 교단 측에서는 수계(受戒) 여부‧교적 등록‧보시 기록‧ 신도증 발급 등을 형식적 근거로 삼는가 하면, 간경·주력·염불·참선 등 실질적 수행 실천 여부를 잣대로 들기도 한다. 이에 따라 명절이나 초파일에만 사찰을 찾는 ‘문화적·심정적 불자’부터 불교 교학에 귀의하는 ‘원리적 불자’까지 폭넓게 거론된다.
그러나 자각과 해탈은 도외시하고 단지 세속적 복락만을 구하는 단순 기복 신앙이나, 불교의 가르침과 문화를 한낱 교양이나 취미로 향유하는 태도는 진정한 불제자의 범주에 넣기 어렵다는 비판적 견해도 있다.5)
불제자가 영산 당시 부처님의 부촉을 받은 직계제자만을 뜻한다고 할 수는 없다. 출가제자도 당대에 이미 고손제자까지 수만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법과 율을 전해온 모든 승가와 외호자, 그리고 오늘날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를 실천하는 현대인에 대하여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3) 수계
수계(受戒)는 불제자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하고 계율을 지키겠다는 공식적 서약이다. 초기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오라, 비구여(Ehi Bhikkhu)!”라고 부르시거나 삼귀의를 외우는 것으로 출가 수계가 이루어졌으나, 교단이 성장함에 따라 출가자와 재가자의 수계에 관한 엄격한 갈마(羯磨, 의결 절차) 제도가 정립되었다.
(4) 제자들이 사용한 언어와 문자
부처님 재세 시 바라문 출신 제자들이 교법을 베다식 산스크리트어로 정형화할 것을 청했으나, 부처님은 “각자의 고유한 언어(sakāya niruttiyā)로 나의 가르침을 배우라”고 하셨다. 이에 따라 초기 전법에는 고대 인도의 동북부 방언인 마가다어(Māgadhī) 계통의 민중어(프라크리트어)가 널리 쓰였다.
이 구전 전승은 기원전 1세기경 스리랑카에서 제4차 결집6)을 통해 빨리어(Pāli)로 패엽(貝葉)에 문자로 기록되어 남방 상좌부 경전의 기준이 되었다.
한편 인도 북부 및 서북부(간다라 등)에서는 간다리어(Gāndhārī, 카로슈티 문자 표기)가 쓰였으며, 교단이 점차 학문화·보편화됨에 따라 북방 설일체유부와 대승불교 교단은 표준 고전어인 산스크리트어(梵語, 브라흐미 문자 및 데바나가리 문자 표기)를 공식 문헌어로 정착시켰다. 이후 이 문헌들이 실크로드를 거쳐 한문(漢文)과 티베트어로 번역·정착됨으로써, 오늘날 불제자들이 전승하는 경전 언어의 거대한 삼대 축(빨리어·산스크리트어-한역·티베트역)이 완성되었다. 불경 번역을 위하여 티베트문자·몽골의 파스파문자와 뒤 이은 토도(Todo) 문자 및 소욤보 문자·서하문자가 제정되었고, 팔리어 경전 기록과 주석을 위해 스리랑카·미얀마·태국의 문자도 개량되었다. 훈민정음 창제에도 불경 번역 및 범자 음운학의 영향이 깊게 미쳤다.
2. 부처님 재세시의 제자들
(1) 부처님의 교화방법
초전법륜의 5비구, 배화교도 가섭 3형제 및 그 문도 1,000명, 마하가섭, 이복동생 난타(Nanda), 그리고 부왕 정반왕과 도리천의 생모 마야부인7) 등은 부처님께서 찾아가 제도하신 특별한 사례였지만, 부처님께서 세속 대중과 일상에서 마주한 가장 중요한 교화 통로는 단연 탁발이었다. 이른 아침 가사를 수하고 발우를 든 채 마을로 들어가 빈부를 가리지 않고 차례대로 돌되, 하루 일곱 집을 넘기지 않는 ‘차제걸식(次第乞食)’을 일과로 행하셨다. 45년간 안거 기간을 제외하고 매일같이 이어진 탁발을 통해, 적게는 7만에서 많게는 15만 명이 부처님을 만나 복전(福田)의 인연을 맺은 것으로 추정된다.
나아가 부처님은 승가 제자들과 모여든 대중을 상대로 법문을 설하셨을 뿐만 아니라, 초기 4부 니까야(Nikāya)에 전하는 5,400여 편의 경전과 전통적으로 ‘중생의 8만4천 번뇌에 맞추어 설하셨다’는 8만 4천 법문에서 보듯, 인간·천인(天人)·비인(非人) 등의 질문에 응하여 근기와 고통에 따라 맞춤형 처방을 내리신 대기설법(對機說法·응병여약)을 핵심적인 교화 방법으로 삼으셨다.
(2) 주요 출가제자의 입문 일지
- 초전법륜과 최초의 60인 아라한, 전법선언 (성도 1년 차): 성도 약 2개월 후 녹야원(사르나트)에서 교진여(Koṇḍañña)를 비롯한 다섯 수행자가 설법을 듣고 법안을 떠 최초의 승가가 성립되었다8). 이어 인근 바라나시 부호의 아들 야사(Yasa)와 그의 절친한 벗 4명, 그리고 지방의 친구 50명이 차례로 출가하여 아라한과를 얻었다. 부처님은 이들 60인의 아라한 제자들에게 “자, 비구들이여!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두 사람이 한 길로 가지 말고 제각기 따로 가라”는 ‘전법선언(Caratha bhikkhave cārikaṃ)’을 하시고 각지로 파견하셨다.
- 가섭 3형제의 귀의와 죽림정사 기증 (성도 1년 차 말): 마가다국 왕사성으로 향하시던 부처님은 우루벨라에서 불을 섬기던 배화교의 거두 가섭 3형제(우루벨라·나제·가야 가섭)와 그 문도 1,000명을 신통과 연기법으로 귀의시키셨다. 국가의 대제례를 주관하던 가섭 형제가 붓다의 제자가 되어 왕사성에 입성하자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은 깊이 감복하였고, 교단의 안정적 수행 거점으로 최초의 대사원인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조성하여 헌납하였다. 이로써 승가는 일거에 1,000명이 넘는 대교단으로 급성장하였다.
- 사리불과 목건련의 귀의 (성도 2년 차): 왕사성에서 회의론자 산자야(Sañjaya) 문하의 수제자 사리불(Sāriputta)과 목건련(Moggallāna)이 아설시(Assaji) 비구의 위의와 연기게송(緣起偈)에 법안을 얻고, 동료 문도 250명과 함께 승단에 귀의하였다.(금강경의 1,250인은 위 가섭 3형제와 사리불·목건련의 문도를 뜻한다)
- 카필라성 귀향과 석가족·천민 우바리의 집단 출가 (성도 2~3년 경): 정반왕의 초청으로 고향 카필라성에 귀향하셨을 때 이복동생 난타(Nanda)와 친아들 라훌라(Rāhula: 최초의 사미)가 순차로 출가하였다.9) 이어 아나율(Anuruddha)·아난(Ānanda)·제바달다(Devadatta) 등 석가족 귀족 청년들과 궁정 이발사 우바리(Upāli)가 동시에 출가하였다. 이때 붓다는 세속의 계급을 타파하기 위해 천민 출신 우바리를 먼저 수계하게 하여 다른 왕족 출가자보다 위계가 앞서게 함으로써 승가 내의 절대적 평등을 천명하셨다.
- 비구니 승가의 성립 (성도 5년경): 정반왕이 입적하자 마하파자파티(Mahāpajāpatī Gotamī)가 500명의 석가족 여인들과 스스로 삭발하고 바이샬리까지 맨발로 걸어와 출가를 간청하였다. 아난 존자의 간곡한 중재와 여덟 가지 엄격한 준수 규범인 '팔경법(Aṭṭha Garudhammā)' 수용을 전제로, 부처님은 마침내 여성의 출가를 승인하셨고 인류 역사상 최초의 비구니 승가가 탄생하였다.
- 말년의 분열 위기와 수습 (입멸 수년 전): 말년에 위 제바달다가 극단적인 5사(五事: 두타행 강조)를 제안하며 교단 분열을 획책하고 붓다 살해를 시도하는 등 심각한 파승가(破僧伽)의 위기를 일으켰으나, 사리불과 목건련의 설법으로 수습되었다.
법랍 10년이 넘은 장로 비구들이 독자적으로 제자를 받아들이면서10) 부처님 재세 시에 이미 손제자와 고손제자까지 이어지는 다층적 승단이 형성되었다. 대승경전에는 수천만 명의 대중이 운집해 법을 들었다는 묘사가 흔히 나타나고, 스리랑카 역사서인 《마하왕사》에는 부처님이 세 차례 스리랑카를 방문했다는 전승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갠지스강 중류 유역의 인구 규모와 맨발 도보 이동 및 육성 설법이라는 여건을 고려하여 실증적으로 추산할 때, 45년간의 전도 기간 동안 부처님을 직접 대면하거나 가르침의 감화를 받은 인원은 수십만명 가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주요 비구 제자11)
- 사리불(舍利弗 Sāriputta, 智慧第一): 붓다의 우촌(右村) 상수제자. 법을 체계화하고 논리적으로 해설하는 능력이 뛰어나 초기 아비달마 교학의 모태를 구축함. 붓다보다 먼저 입멸. 그의 사리탑을 중심으로 후일 나란다 대학이 세워졌다.
- 목건련(目犍連 Moggallāna, 神通第一): 붓다의 좌촌(左村) 상수제자. 강력한 신통력으로 외도들을 굴복시킴. 아귀도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도한 일화(우란분절의 기원)로 유명하다. 사리불 입적 직후 붓다 입멸 전에 질투에 찬 바라문의 사주를 받는 강도들에게 습격당하여 순교하였다.
- 마하가섭(摩訶迦葉 Mahākassapa, 頭陀第一): 의식주에 얽매이지 않고 철저한 고행·청빈을 실천. 영축산 등지 숲에서 살았고, 붓다 입멸 후 제1차 경전 결집을 주도하였으며, 계족산에 들어가 미륵불에게 부처님의 가사를 전하기 위해 멸진정에 들어 있다 한다.12)
- 아나율(阿那律 Anuruddha, 天眼第一): 마하나마의 친동생. 설법 중 졸다가 질책을 받은 뒤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하다 시력을 잃었으나, 심안(心眼)과 천안을 얻었다.
- 수보리(須菩提 Subhūti, 解空第一·無諍第一): 일체의 집착과 실체가 없음을 꿰뚫어 보는 ‘공(空)’의 도리를 가장 깊이 이해함. 『금강경』의 대화 상대자이다.
- 부루나(富樓那 Puṇṇa Mantānīputta, 說法第一): 뛰어난 변재와 포교 원력으로 변방 서로나국(Sunāparanta)의 험악한 주민들을 감화시킨 대표적 전법자이다.
- 가전연(迦旃延 Mahākaccāna, 論議第一): 붓다의 짤막하고 심오한 법문을 논리적이고 명료하게 부연·해석하는 교학적 논증의 대가. 중서부 인도 지역 아반티(Avanti)국 출신으로서 푸라나(Purāṇa 富蘭那) 장로의 스승이며, 그의 교화지역 산치가 후일 상좌부 교학의 중심이 되었다.
- 우바리(優波離 Upāli, 持戒第一): 석가족 왕실의 천민 이발사 출신. 교단 규율의 제정 배경(인연)과 조항을 완벽히 숙지하여 제1차 결집 때 율장(律藏)을 송출하였다.
- 라훌라(羅睺羅 Rāhula, 密行第一): 붓다의 친자. 어린 나이에 사미로 출가하여 교만하지 않고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엄격히 계율과 위의를 닦았다. 붓다 반열반 전에 입적하였다.
- 아난(阿難 Ānanda, 多聞第一): 붓다의 사촌 동생이자 25년간 그림자처럼 시봉한 시자. 가장 많은 법문을 직접 듣고 기억하여 제1차 결집 때 경장(經藏)을 송출하였다(그가 바로 ‘如是我聞’의 ‘我’이다).
- 빈두로(賓頭盧 Piṇḍola Bhāradvāja): 16 나한 중 첫 번째로 꼽히는 인물. 나반존자의 원형이라고도 한다. 밧사국 우다야나왕의 국사였다가 출가하여, 육신통을 증득했다. 왕사성의 장자가 높은 대나무 장대 끝에 매달아 둔 백단향 발우를 얻기 위해 신통으로 허공을 날아 이를 취했다가 붓다의 꾸중을 들었고, 대중 앞에서 함부로 신통력을 드러내는 것을 금하는 계율이 제정되었다.
- 앙굴리마라(Aṅgulimāla): 1,000명을 살해하면 해탈한다는 외도 스승의 잘못된 가르침에 속아 999명을 살해하고 1,000번째로 부처님 만나 해치려다 교화되어 출가함. 지극한 참회와 자비행으로 아라한과를 증득하여, 악인 성불의 상징이 되었다.
- 제바달다(Devadatta): 붓다의 4촌 동생이면서도 엄격한 금욕주의를 표방하며 승가를 분열시키고 붓다를 시해하려 하였다.13)
(4) 주요 비구니 제자14)
- 마하파자파티 고타미(Mahāpajāpatī Gotamī, 長老第一): 마야부인의 동생이자 붓다의 양모. 카필라성 여성 500명과 함께 출가하여 최초의 비구니 승가를 창설하고 이끌었다.
- 케마(Khemā, 智慧第一): 마가다국 빔비사라왕의 왕비 출신. 절세의 미모에 자부심을 가졌으나 붓다가 환영으로 보여준 아름다운 여인의 급격한 노쇠와 부패를 보고 무상을 체득, 출가 직후 상수 비구니가 되어 남성의 사리불에 필적하는 지혜를 발휘.
- 연화색(蓮華色, Uppalavaṇṇā, 神通第一): 청련화(연꽃) 같은 미모로 인해 세간의 거친 유혹과 수난을 겪고 출가함. 목건련에 비견되는 뛰어난 신통력을 성취하여 비구니 교단의 양대 상수제자로 활약.
- 바타 쿤달라케사(Bhaddā Kuṇḍalakesā, 速證第一): 외도의 논쟁가로서 전 인도를 유행하며 사리불과 논쟁 끝에 귀의. 법문을 듣자마자 단시간에 번뇌를 끊고 아라한과를 얻은 기민한 근기의 비구니.
- 파타차라(Paṭācārā, 持戒第一): 남편·두 자식·부모·형제를 일시에 잃고 미쳐 날뛰다가 붓다의 자비로 제정신을 찾고 출가. 극단적 비극을 극복한 경험을 바탕으로 상처 입은 여인들을 위로하고 계율을 철저히 수지함.
- 야소다라(耶輸陀羅 Yasodharā, 大神通第一): 붓다의 출가 전 부인이자 라훌라의 모친. 비구니 승가로 출가하여 신통력을 얻고 묵묵히 정진하여 해탈을 증득하였다. 전생을 꿰뚫어 보는 대신통에 뛰어났으며, 붓다 반열반 전에 대중 앞에서 큰 신통을 보이고 절절한 고별 게송을 남긴 후 입적하였다.
(5) 주요 재가 제자
- 수닷타(Sudatta, 給孤獨長者): 코살라국 사위성의 거부. 금괴를 깔아 제타 태자의 숲을 사서 기원정사(祇園精舍, Jetavana)를 건립하여 붓다에게 헌납하였다. 평생 빈민을 구제하고 승가를 공양한 최대의 재정보시자.
- 빔비사라(Bimbisāra, BC 558~491경): 마가다 국왕. 붓다의 성도 초기 귀의하여 불교 최초의 대규모 사원인 죽림정사(竹林精舍, Veḷuvana)를 기증하였고. 국가적 공권력과 보호막으로 교단의 안정적 포교를 뒷받침하였다.
- 파세나디(Pasenadi, 파사익): 코살라국의 군주. 부처님과 동갑내기 친구처럼 깊은 영적 대화를 나누며 국정 운영의 도덕적 규범을 불교적 다르마(정법)에서 구하였다.
- 우다야나(Udayana, 우전왕): 밧사(Vatsa)국 군주. 바라문을 존중하다가 숙부 빈두르의 교화로 귀의. 최초의 불상(우전왕상)을 조성하였다.15)
- 지바카(Jīvaka Komārabhacca): 고대 인도의 전설적인 명의(醫聖). 부처님과 승가 대중의 주치의 역할을 맡았으며, 승가에 망고나무 숲(지바카 암바바나)을 기증하고 아픈 비구들을 무상으로 돌보고 치료하였다.
- 칫타(Citta, 질다 장자): 재가자 신분으로 심오한 교학을 체득하여 출가 비구들과 연기·무아를 논쟁하여 감탄을 자아내고, 스스로 불환과(아나함과)를 증득한 대표적 교학 거사.
- 위사카(Visākhā, 鹿子母): 앙가국 부호의 딸이자 사위성 유력 가문의 며느리. 사위성에 대규모 동원정사(東園鹿子母講堂, Pubbārāma)를 건립해 승가에 기증하였고, 승가의 포살과 공양을 도맡아 조달하고, 비구니들의 생활 애로사항을 붓다에게 건의하여 계율 제정에 기여한 교단의 으뜸 어머니(총후원자).
- 말리카(Mallikā): 파세나디왕의 왕비. 낮은 신분(꽃 파는 여인)에서 왕비가 된 인물로, 지혜롭고 신심이 깊어 파세나디왕을 불교로 인도하고 교단을 적극 옹호하였다.
- 사마바티(Sāmāvatī): 밧사국 우다야나왕의 왕비. 이교도 첩의 모함으로 궁궐에 불이 나 타 죽는 순간에도 자신을 해치려는 이들에게 원한을 품지 않고 자비관(慈悲觀)을 닦아 성자의 과위를 얻은 자비행의 표상.
- 유마힐(Vimalakīrti, 유마거사): 바이샬리의 부호이자 대승불교가 제시한 이상적인 재가 거사의 전형. 세속의 일상(사업·가정)을 영위하면서도 방편의 지혜로 병을 칭탁하여, 문병 온 사리불을 비롯한 십대제자와 문수보살 등 여러 보살들을 '불이(不二)의 실상 지혜'로 압도하며 재가자의 지위와 보살도를 출가자 이상으로 격상시킴.
- 승만 부인(Śrīmālādevī): 코살라국 파세나디왕과 말리카 왕비의 딸이자 아유타국의 왕비. 여성 재가자의 신분으로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아 ‘여래장(如來藏)’과 ‘일승(一乘)’의 깊은 교의를 사자후로 설파하여 붓다로부터 미래 성불의 수기를 받은 대승 여성 보살의 정점.
초기 교단의 재가 제자들이 주로 계율을 지키고 물질적 보시(재보시)로 승가를 외호하는 복전(福田)의 역할을 담당했다면, 대승불교에 이르러서는 유마거사(Vimalakīrti)와 승만부인(Śrīmālādevī)처럼 출가 성문승을 뛰어넘는 심오한 반야·여래장 지혜를 설파하는 ‘주체적 실천자이자 보살(Bodhisattva)로서의 재가 제자상’으로 진화하였다.
3. 불교의 변천과 전승 및 관련된 주요 제자들
(1) 불교 교단의 성립과 변천
싯다르타 고타마가 정각을 이룬 보드가야(Bodh Gaya), 첫 설법(초전법륜)을 펼친 사르나트(Sarnath), 그리고 마가다국의 수도 라즈기르(왕사성 Rajgir), 코살라국의 슈라바스티(사위성 Sravasti) 등 갠지스강 유역에서 기원전 6~5세기 첫 불교 교단(상가)이 성립되었다.
붓다 반열반 직후 법과 율을 보존하기 위해 제1차 결집이 행해졌고16), 100여 년 후 바이샬리 비구들의 10가지 계율 완화 논쟁(십사불법 十事非法)을 정리하기 위해 제2차 결집이 열렸다. 그러나 아라한의 한계를 둘러싼 대천(大天) 비구의 5사설 등을 거치며 교단은 엄격한 전통을 고수하는 보수적인 '상좌부(Theravāda)'와 개혁적인 '대중부(Mahāsaṅghika)'로 근본분열되었고, 이후 기원전 3세기 아쇼카왕 시기의 제3차 결집 전후로 18부 또는 20부의 지말분열로 이어졌다.
아쇼카왕의 후원을 받았던 상좌부 본류는 정통 분석을 고수하는 분별설부(Vibhajjavāda)였는데, 대승불교 운동과 슝가 왕조(기원전 185~73)의 바라문교 부흥으로 점차 서인도 산치와 비디샤 일대로 옮겼다가 남하하였고, 최종적으로는 마힌다 장로가 전한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로 명맥을 보존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팔리어 삼장과 미얀마·태국 등지의 남방 상좌부 불교가 오늘날까지 계승되었다.
한편 당시 소수견해로 취급되었던 설일체유부(Sarvāstivāda)17)는 델리 동남방 마투라(Mathura)·파키스탄 지역 간다라를 거쳐 중앙아시아에서 북인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쿠샨 왕조에서 만개하였고, 그 지역에서 대승불교도 흥기하였다. 대승불교는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에 전파되어 방대한 한역 경전과 선불교를 낳고 한국·일본·베트남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인도네시아를 거쳐 필리핀에도 전해졌다.
5세기 이후 인도 중·북부에서는 나란다·비크라마실라 등 대승원을 중심으로 중관·유식과 밀교(금강승)가 고도로 발전하여 티베트와 부탄·몽골로 전파되었다.
반면 인도 본토에서는 승원이 대형화되며 민중과의 일상적 접점이 약화되고 힌두교(바크티 신앙)의 대두로 붓다가 비슈누의 화신으로 흡수되는 내적 변화를 겪었다. 여기에 5~6세기 백훈족(에프탈)의 침입18)과 12세기 말 이슬람 세력의 거대 사원 소훼가 겹치며 불교는 인도 본토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2) 아쇼카왕과 팃샤 장로, 전법사
기원전 3세기, 마우리아 제국의 아쇼카 대왕(Aśoka, 재위 BC 268~232)은 칼링가 전쟁의 참상을 참회하고 불교에 귀의했다19). 왕은 목갈리풋타 팃사(Moggaliputta-Tissa) 장로를 모시고 수도 파탈리푸트라에서 제3차 결집을 후원했다20). 왕실의 면세 혜택을 노리고 승단에 들어온 사이비 출가자들을 환속 처분하여 교단을 정화하고21), 부파 간 논쟁을 비판적으로 정리한 『카타왓투(논사, 論事)』를 편찬하여 분별설부 상좌부의 정통 교의를 확립했다22). 또한 전국에 8만 4천 불사리탑을 건립하고 불교 유적을 정비했다.
아쇼카왕은 무력 대신 '법에 의한 정복(담마위자야)'을 선포하며 9개 방면으로 전법사를 파견했다.
① 남방 : 아들 마힌다 장로(Mahinda, BC 285~205경)와 딸 상가밋타 비구니(Sanghamittā, BC 282~203경)를 탐바판니(스리랑카)로 파견해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 나뭇가지와 삼장을 전수, 훗날 상좌부 불교가 전 세계로 계승되는 불멸의 보루를 세웠다.23)
② 동남아 : 소나(Soṇa)와 우타라(Uttara) 장로를 수완나부미24)로 파견해 몬족과 동남아 대륙부에 불법의 토대를 닦았다.
③ 서북방 : 마하락키타(Mahārakkhita) 장로를 헬레니즘 박트리아(요나)로 파견하여 그리스계 문명과의 만남을 이끌었고, 맛잔티카(Majjhantika) 장로를 카슈미르·간다라로 보내 실크로드 북방 전파의 관문을 열었다.
④ 서인도 해안 : 그리스인 출신 승려인 요나 담마락키타(Yona Dhammarakkhita)를 아파란타카로 파견하였다.
⑤ 중동 및 지중해 서방 등 : 아쇼카왕의 석주 칙령(제13장)에 따르면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2세,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2세 등 서방 군주들에게도 전법 사절단을 파견하여 동서 문명 간 사상 교류의 귀중한 족적을 남겼다.
(3) 상좌부의 주요 고승들
붓다고사(Buddhaghosa 覺音, 5세기경, 인도·스리랑카) : 스리랑카 마하비하라(대사파)에서 팔리어 삼장의 싱할라어 주석들을 집대성함. 저작 『청정도론(Visuddhimagga)』은 계·정·혜 삼학에 입각해 초기불교와 아비담마 수행 체계를 완전히 구조화하여 오늘날까지 상좌부 교학의 절대적 표준이 되고 있다.
붓다닷타(Buddhadatta, 5세기경) 와 담마팔라 (Dhammapāla, 5~6세기경) : 『아비담마바타라』 등 주요 주석서를 통해 상좌부의 심리학적 법(dhamma) 분석 체계를 완결지었다.
신 아라한(Shin Arahan, 1034~1115경, 미얀마): 몬족 출신의 고승으로 바간 왕조의 아노라타왕을 교화하여 상좌부 불교를 국교로 선포하게 함으로써 바간 불교문화의 황금기를 열었다.
레디 사야도(Ledi Sayadaw, 1846~1923, 미얀마) : 승려들의 전유물이던 아비담마 교학과 위빳사나(Vipassanā) 수행법을 재가 신도에게 최초로 개방하고 체계화한 근대 상좌부 부흥의 선구자이다.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 1904~1982, 미얀마) : 복부 관찰을 중심으로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차림(sati)’하는 실용적 위빳사나를 확립하고 1954~1956년 제6차 결집을 주도하여 현대 글로벌 마음챙김 운동의 직접적 모태를 놓았다.
아잔 차(Ajahn Chah, 1918~1992, 태국) : 태국 숲속 수행 전통(Thai Forest Tradition)의 대표 지도자로 엄격한 계율과 일상 통찰을 가르쳤으며, 잭 콘필드 등 수많은 서구 제자를 양성하여 서구에 상좌부를 뿌리내렸다.
(4) 설일체유부(Sarvāstivāda)의 주요 고승들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1세(재위 127~150경)는 부파 간 교리 대립을 정리하기 위해 협존자(脇尊者 Pārśva)와 세우(世友 Vasumitra)의 주도로 카슈미르에서 500여 명의 고승을 소집하여 제4차 결집을 단행했다. 이를 통해 설일체유부의 방대한 삼장 주석서인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30만 송)이 편찬되어 아비달마 교학이 고도로 체계화되었다.
또한 동시대의 대문호 마명(馬鳴 Aśvaghoṣa, 80~150경)은 『불소행찬』 등을 지어 대승의 서막을 열었다.
(5) 대승불교의 주요 고승들
① 인도 내부의 교학 집대성
용수(龍樹 Nāgārjuna, 150~250경) :『중론』과『대지도론』을 통해 연기(緣起)가 곧 무자성(無自性)이며 공(空)임을 논증하는 중관파(Madhyamaka)를 열어 대승불교의 초석을 놓았다.
무착(無著 Asaṅga, 395~470경)과 세친(世親 Vasubandhu, 400~480경) 형제 : 외계 대상은 실재하지 않고 마음의 식만이 현현한다는 유식학(唯識學)을 열었고, 이는 5세기 이후 굽타 왕조의 지원 아래 나란다(Nālandā) 대학에서 종합·집대성되었다. 세친은『아비달마구사론』을 지어 설일체유부의 교학을 정리하고, 대승으로 전향하여『유식삼십송』 등을 남겼다.
디그나가(陳那 Dignāga, 480~540경)와 다르마키르티(法稱 Dharmakīrti, 600~660경) : 불교 논리학(인명학)과 인식론을 고도로 발전시켜 인도 정통 철학파와의 대논쟁을 주도했다.
② 대승불교의 전파
카라반 교역로를 따라 간다라→박트리아→파미르고원→타림 분지 오아시스(호탄·카슈가르·쿠차·투르판)→돈황→장안·낙양으로 전해진 북방대승불교는 안세고(安世高, 2세기 중·후반)·축법호(竺法護 Dharmarakṣa, 233~316경)·구마라습(Kumārajīva, 344~413) 등 역경승에 의해 한역 문화권으로 전달되었고, 간다라 미술에 의한 불상도 전파되었다.
계절풍 무역을 이용하여 인도 남단→벵골만→말라카 해협→수마트라(스리비자야)→중국 남부로 전해진 남방대승불교는 금강지(金剛智 Vajrabodhi, 669~741)·불공(不空 Amoghavajra, 705~774) 등이 전하였고, 스리비자야는 나란다에 필적하는 학술 중심지였으며, 세계 최대 불교 건축물인 보로부두르 대탑도 남아 있다.
③ 한역 경전과 선종의 성립
도안(道安, 312~385): 격의(格義)불교를 극복하고 번역 기준을 세우며 승려 성씨를 '석(釋)'으로 통일하였다.
구마라습(Kumārajīva, 344~413): 『반야경』·『법화경』·『유마경』·『중론』 등을 명쾌한 한문으로 번역하여 대승 교의를 반석 위에 올렸다.
현장(玄奘, 602~664): 인도 나란다 대학에서 유식을 수학하고 귀국해 『대반야경』·『성유식론』 등을 신역하였다.
지의(智顗, 538~597, 천태종)와 법장 (法藏, 643~712, 화엄종): 각각 법화 중심의 일념삼천·원융삼제와 화엄 중심의 사사무애법계 교의를 완성하였다.
혜능(慧能, 638~713): 『육조단경』을 통해 불립문자(不立文字)·견성성불(見性成佛)의 남종선을 확립함. 삼무일종의 법난 속에서 자급자족(백장청규)과 문자 밖 실천을 중시한 선종(禪宗)이 살아남아 중국 불교의 주류가 되었다.
④ 한국 불교의 거장들: 호국과 회통을 바탕으로 원효(元曉, 617~686)가 일심과 화쟁(和諍)을 세웠고, 의상(義湘, 625~702)이 해동 화엄종을 열었다. 고려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은 정혜쌍수와 돈오점수로 조계종의 종지를 확립했으며, 태고 보우(太古 普愚, 1301~1382)와 조선 억불 속에서 나라와 법맥을 수호한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으로 이어져 선교일치(禪敎一致)의 통불교 전통을 완성했다. 고려 말에는 마가다(중인도 비하르) 지역 출신인 지공(指空 Dhyānabhadra, 1300경~1363) 선사로부터 나옹(懶翁 惠勤, 1320~1376)과 무학(無學 自超, 1327~1405)으로 이어지는 삼화상(三和尙)의 법맥을 통해 인도 불교의 선풍과 계율을 직수입하여 수용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 허황옥의 남자형제 장유대사를 통하여 가야에 불교가 전해졌다는 견해도 있다.
⑤ 일본 불교의 전개: 헤이안 시대 사이초(最澄, 767~822, 천태종)와 쿠카이(空海, 774~835, 진언종)를 거쳐, 가마쿠라 시대에는 호넨(法然, 1133~1212)과 신란(親鸞, 1173~1262, 정토진종), 니치렌(日蓮, 1222~1282), 지관타좌의 도겐(道元, 1200~1253, 조동종) 등 민중 구제 중심의 종파 불교로 분화되었다. 에도 시대 단가제도와 근대 메이지 유신의 육식처대(肉食妻帶) 합법화로 세습 사원 중심의 독특한 구조를 형성했다.
(6) 밀교(금강승)의 주요 고승
인도 후기 나란다(Nālandā)와 비크라마실라(Vikramaśīla)에서 집대성된 밀교(Vajrayāna)는 히말라야를 넘어 티베트로 원형 전수되었다. 파드마삼바바(Padmasambhava, 8세기경)가 탄트라 밀교를 전파하여 닝마파를 열었고, 샨타라크시타(Śāntarakṣita, 725~788경)가 삼예사를 세워 계율을 전수했으며, 아티샤(Atiśa, 982~1054)가 교단을 정화하고 현밀융합의 카담파(후일 겔룩파의 모태)를 열었다.
이후 티베트 불교는 몽골 제국과 동아시아 전역으로 외연을 확장했다.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국사(國師)·제사(帝師)였던 파스파(Phags-pa, 1235~1280)는 제국의 공용 문자인 파스파 문자를 창제하여 티베트 밀교 전적과 불경을 번역·보급하는 제도적 기틀을 놓았다. 한편, 몽골은 파스파 문자 외에도 위구르 문자 계열의 전통 몽골 문자를 활용하여 방대한 티베트 대장경(강규르·텡규르)을 몽골어로 완역·간행함으로써 유목 세계 전역에 불교 경전을 확립했다.
이러한 인도-티베트-원나라의 밀교 계맥 속에서 인도 나란다 출신의 승려 지공(指空, Dhyānabhadra, ?~1363)은 원나라 수도 대도(베이징)에서 활동하며 황실과 지식인 사회에 선(禪)과 인도의 정통 밀교 사상을 전파했고, 이후 고려로 건너가 나옹과 이색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인도 후기 불교와 북방 밀교의 사상적 흐름을 한반도로 잇는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7) 근현대 문명사적 전환: 서구 확산, 인도 본토 회귀, 그리고 역수입
19세기 서구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주목에 이어 에드윈 아놀드(Edwin Arnold, 1832~1904)의『아시아의 등불』, 불교기를 제정한 헨리 스틸 올코트(Henry Steel Olcott, 1832~1907)의 스리랑카 불교 부흥 지원, 리스 데이비즈(T. W. Rhys Davids, 1843~1922)의 팔리성전협회(PTS) 설립과 원전 영역, 독일인 출가승 니아나틸로카(Ñāṇatiloka, 1878~1957)의 서구 승려 양성을 통해 불교에 대한 인식이 ‘철학적 종교’로 전환되었다.
인도 본토에서는 1956년 불가촉천민 지도자 B. R. 암베드카르(1891~1956)가 수십만 군중과 불교로 집단 개종하여 신불교(Navayāna) 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인권과 평등의 기치 아래 불교를 부활시켰다.25)
20세기 서구 사회에는 스즈키 다이세츠(1870~1966)와 스즈키 슌류(1904~1971)가 선(Zen)의 충격을 던졌고, 한국의 숭산 행원(1927~2004) 스님은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의 화두선으로 전 세계에 관음선종을 세웠다. 베트남의 틱낫한(1926~2022) 스님은 참여불교(Engaged Buddhism)와 일상 속 마음챙김을 전파했고, 제14대 달라이 라마(1935~현재)는 현대 뇌과학자들과 ‘마음과 생명 연구소’를 세워 명상의 과학적 대화를 주도했다.
나아가 존 카밧진(Jon Kabat-Zinn, 1944~현재)은 숭산 스님 등에게 명상을 배운 뒤 MBSR(마음챙김에 기반한 스트레스 감소) 프로그램을 창설하여 종교적 색채를 벗겨낸 심신 치유 기법으로 표준화하였고, 잭 콘필드(1945~현재) 등은 통찰명상협회(IMS)를 통해 위빠사나를 대중화했다. 오늘날 서구에서는 스티븐 배철러(1953~현재)의 ‘세속 불교’와 비쿠 보디(1944~현재)의 정통 니까야 교학 간 논쟁을 통해 현대적 토착화가 모색되고 있으며, 과학화·의학화된 마음챙김은 다시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로 역유입되는 거대한 문명 순환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1)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직후, 부처님께서는 “내가 깨달은 이 법은 깊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며, 사유의 영역을 넘어섰고, 미묘하여 오직 현자만이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애욕과 집착을 즐긴다. 집착에 빠진 사람들에게 연기(緣起)의 이치와 모든 형성된 것의 가라앉음·집착 버림·갈애 부숨·열반은 보기 어렵다. 내가 만약 이 법을 설한다 하더라도 남들이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피로요 곤혹일 뿐이다.”라고 염려하시어 설법을 주저하셨다.
2) 대범천이 세 번에 걸쳐 “눈에 먼지가 덜 묻은 자(티끌이 적은 자)도 있으니 부디 법의 문을 열어달라”고 간청했다. 붓다는 ‘연못의 연꽃들(물속에 잠긴 것·수면에 닿은 것·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것)’을 관찰하신 뒤, 번뇌가 두터워 지금 당장은 깨닫기 어려운 중생이 많지만, 조금만 빛을 받으면 곧 꽃을 피울 중생이나 이미 준비가 되어 진리의 햇살을 받기만 하면 피어날 근기(根機)도 있음을 확인하시고 “중생을 위해 불사의 문을 열겠다”며 설법하시기로 결심하셨다.
3) 『디가 니까야』 제16경 「마하파리닙바나 수타(대반열반경)」. 그러나 45년 뒤 바이샬리의 차팔라 탑묘에서 마왕 파순이 다시 찾아와 “이제 사부대중이 번창했고 가르침이 널리 퍼졌으니 열반에 드소서”라고 했을 때는, “알았다. 석 달 뒤에 여래는 반열반에 들 것이다”라며 수명유행(壽命留行, 생명의 지속을 내려놓음)을 선언하셨고 쿠시나가라로 가셔서 반열반에 드셨다.
4) 부처님께서는 각종의 질문자(여러 인간뿐 아니라 天人과 非人 등 포함)의 온갖 질문에 대하여 답하셨고, 이치에 대하여 설하기도 하셨다. 시공을 초월하여 열반 후에도 가르침을 주시고 계신다고도 한다. 또한 (뜻이) 확정된 경(了義經, nītattha suttanta)과 (숨은) 뜻을 알아내야 할 경(不了義經, neyyattha suttanta)을 구분하시고,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다”라는 말씀은 확정된 경이고, “‘비구들이여 한 사람, 두 사람 …중략…이 있다.’라는 식으로 세속적 언어로 말씀하셨더라도 ‘궁극적 의미에서는 사람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 숨은 뜻을 알아내야 한다”라고 하시면서 이에 관하여 거꾸로 우기는 것을 경계하셨다.〔대림스님 옮김(2012), 『앙굿따라 니까야1』, 초기불전연구원, 209~210면〕. 후대의 제자들은 이 자료들을 모아 부처님의 깨우침의 전모 또는 가르침의 전체 구조를 추정하는 구사론(俱舍論 Abhidharmakośabhāṣya)을 제작하였고, 또한 ‘불요의경의 숨은 진의’를 적극적으로 규명하여 요의(了義)로 발흥(發興)시킨다는 취지로 공(空) 사상·유식학 등 여러 이론을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5) 단순 기복신앙에서 진정한 신앙의 대상은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 또는 자아’이며, 기원의 대상인 신불(神佛)은 그 목표 달성을 위한 일꾼에 불과하다. 또한 기원을 위해 바치는 공물이나 희생, 노력은 목적 달성을 위해 지불하는 대가로 전락한다. 설사 그 목표가 세속적 복락을 넘어 ‘영생’이나 ‘영혼의 구원’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거래적 구조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이는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지적하듯 유한한 자아의 세속적 욕망을 궁극적 관심으로 대체한 우상숭배(Idolatry)이자, 칸트가 비판한 자기애(Eigenliebe)에 바탕을 둔 ‘헛된 시중(Afterdienst)’이며, 기독교 정통 신학에서 경계하는 자아 숭배 및 맘몬(물신) 숭배와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교화는 광대무변하여 중생을 이끄는 방편(方便) 또한 넓으므로, 그 시작이 기복이나 취미라 하여 반드시 무의미하다고 단정할 것은 아니다 예컨대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바시라(婆施羅) 선사가 '먼저 세상 물건을 주어 그 마음을 충만케 하고, 다시 법재(法財)를 베풀어 환희케 하며, 마침내 보리심을 내어 생사를 멸하는 도를 닦게 한다'고 하였듯이, 기복적 방편도 궁극의 지혜와 해탈로 인도하기 위한 자비의 마중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6) 이는 스리랑카의 기준에 의한 것이고, 북방의 4차 결집은 서기 100~150년경(카니슈카 1세 재위기) 카슈미르지역에서 협존자(脇尊者, Pārśva), 세우(世友, Vasumitra), 마명(馬鳴, Aśvaghoṣa) 등 고승 500명이 결집하여 삼장에 대한 30만 송의 대주석서인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을 편찬한 것을 말한다.
7) 마야부인은 붓다 탄생 7일 만에 별세하였으나, 부처님은 성도 7년 차에 생모가 환생한 도리천(忉利天)으로 올라가 석 달 동안 법을 설하여 해탈케 하셨다. 그 기간 동안 지상에서는 부처님을 그리워한 코삼비의 우전왕(Udayana) 등이 최초로 불상을 만들어 모셨다는 전승이 전해진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천신들의 호위 아래 상카시아로 하강하신 후 신체 형상을 짓는 것 대신 법과 탑에 귀의할 것을 강조하셨기에, 훗날 간다라에서 본격적인 불상이 조성되기 전까지 초기 불교 미술에서는 부처님의 존상을 직접 새기지 않고 보리수·법륜·불족적·빈 보좌·코끼리 등으로 상징화하여 표현하였다.
8) ① 교진여(憍陳如 Kondañña)는 바라문 학자 출신 최연장자로서 가장 먼저 법을 깨달았을 때 부처님이 감탄하여 “꼰단냐가 알았구나(Aññāsi vata bho Kondañño)”라고 말하셨기에 '안냐 꼰단냐(Añña-Kondañña, 아약교진여 阿若憍陳如)'로 불린다. 일찍 입멸하였다. ②발제(跋提 Bhaddiya)는 석가왕족 출신으로 태자를 보필하고 함께 수행하도록 파견되었으며 두 번째로 깨우쳤다. ③바파 또는 파제(婆頗/婆提 Vappa)는 왕실에서 보낸 수행자로서 세 번째로 깨우쳤고, 제1차결집 때 별중(別衆)결집의 중심이 되었다고도 한다. ④ 마하남(摩訶男 Mahānāma)도 석가왕족 출신이나 정반왕의 후계자와는 동명이인이다. ⑤ 아설시 또는 마승(阿說示/馬勝 Assaji)은 최연소자로서 마지막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단정하고 위의(威儀) 있는 모습으로 탁발을 하는 것을 본 사리푸트라가 스승의 가르침을 묻었을 때 읊은 연기송(緣起偈, "모든 법은 인연으로 생겨나고 인연으로 사라진다...")으로 사리푸트라와 목갈라나가 부처님께 귀의하게 되었다.
9) 이복동생 난타(Nanda)는 결혼식과 태자 취임식이 예정되어 있던 날 아침, 축하하러 궁궐에 오신 부처님께서 탁발한 발우를 건네주시는 바람에 얼떨결에 그 발우를 들고 부처님을 따라 정반왕이 처소로 마련해 올린 니그로다라마(Nigrodhārāma)까지 갔다가 출가하게 되었다. 이어 며칠 뒤 어린 아들 라훌라(Rāhula)는 모친 야소다라로부터 “아버지께 가서 상속을 달라고 청하라”는 말을 듣고 부처님 처소로 찾아갔으나, 부처님은 세속의 재물 대신 영원한 진리를 상속해 주고자 사리불(Sāriputta) 존자에게 맡겨 최초의 사미(Sāmaṇera)로 출가시켰다. 하나 남은 대통(손자)마저 출가하자 큰 충격과 슬픔에 빠진 부왕 정반왕이 간곡히 한탄하며 청원하였고, 이에 부처님께서는 “부모의 승낙을 받지 않은 미성년자는 출가할 수 없다”는 계율을 제정하셨다.
한편 정반왕 사후 왕위에 오른 곡반왕의 장자 마하나마(Mahānāma)는,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코살라의 파세나디(Pasenadi, 파사익)왕으로부터 청혼을 받고, 여종과의 딸 바사바캇티야(Vāsabhakha ttiyā)를 공주라고 속여 보냈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비두다바(Viḍūḍabha, 유리왕)가 부처님 만년에 부왕 파사익을 몰아내고(그는 마가다로 도피하다 사망하였고, 기원정사 숲을 보시한 기타 태자는 살해되었다) 왕위를 찬탈한 뒤, 출생의 치욕을 씻고자 세 차례에 걸친 부처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석가족을 침공하여 도륙하였다. 그러나 그는 귀로에 아치라바티강의 급작스러운 홍수로 수만 명의 군사와 함께 익사하였고, 왕통이 끊긴 코살라는 마가다국의 아자타삿투(Ajātaśattu, 그는 파사익왕의 생질이자 사위이기도 했다)에게 병합되었다. 스리랑카의 불교 역사서 『대사(Mahāvaṃsa)』에 의하면, 학살을 피해 모리야(Moriya) 지역으로 도피한 석가족의 후예에서 아소카왕이 출현하여 불교를 크게 진흥하였으니, 실로 인연과보는 헤아리기 어렵다.
10) 비구니는 법랍 12년이 넘어야 하고 2년에 1명만 제자를 둘 수 있었으며, 제자는 먼저 비구니 승가에서 계를 받고 이어 비구 승가의 인가를 거치는 2부승 수계를 거쳐야 했다. 비구의 정식 수계에는 10명의 비구(삼사三師와 7명의 증명법사)가 필요했지만, 승려가 귀한 변방의 예외로 5명(3師 2證)으로도 할 수 있었다. 반면 부처님께서 초기에 직접 제자를 맞이하실 때는 "오라, 비구여(선래비구)"라는 부름 외에 별도의 제한된 의식 절차가 없었다.
11) 각묵 옮김(2024), 「테라가타 장로게」 1, 2, 3., 초기불전연구회, 참조.
12) 미륵하생경·〔김윤수 역주(2019), 증일아함경Ⅳ, 운주사, 제48 십불선품 326~327면〕·〔현장 한역·변기 찬록·이미령 번역, 『대당서역기』 9권(ABC, K1065 v32, p.441a01)〕등에는 가섭존자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미륵불 출현시 석가부처님 가사를 전해드리라는 명을 받고, 마가다국 계족산 바위로 들어가 멸진정에 들어 있다고 한다. 계족산은 비하르주 가야(Gaya)시 동남방 30㎞ Gurpa Hill(해발 300m 가량 바위산)로 추정된다.
13) 제바달다는 아자타삿투(아사세)와 결탁하여, 자신은 부처님의 교단을 장악하고 아사세는 마가다 왕권을 찬탈하기로 모의하였다. 제바달다는 오사(五事)를 내세운 계율 엄격화를 구실로 500 비구를 이탈시켜 분열을 꾀했으나, 사리불과 목건련이 이들을 설득하여 수습하자 분을 이기지 못해 피를 토하였다. 이후 병고 끝에 부처님께 참회하러 찾아왔으나, 기원정사 입구에서 땅이 갈라지며 생함지옥하였고, 마지막 순간에 부처님께 귀의를 맹세하였다. 아사세는 부왕 빔비사라를 유폐하여 살해하고 모친 위제희 부인을 감금한 뒤 찬탈에 성공했으나, 죄책감과 종양으로 시달리다 명의 지바카의 권유로 부처님께 귀의하여 참회하였다. 5사는 분소의(糞掃衣: 재가 신도가 보시하는 가사를 받지 말 것), 상걸식(常乞食: 탁발하여 얻은 음식만 먹고, 재가 신도의 청을 받아 가정이나 사원에서 대접받는 식사를 하지 말 것), 일식(一食: 하루에 단 한 번, 한 자리에서만 식사하고, 여분의 식사를 하거나 나누어 먹지 말 것), 노지좌(露地坐, 수하좌: 지붕이 있는 사원이나 정사에 머물지 말고, 나무 아래나 지붕 없는 한데에서만 기거할 것), 불식육(不食肉: 물고기와 고기를 먹지 말 것)이었는데, 부처님께서는 예외를 인정하여 완화하셨다.
14) 각묵 옮김(2024), 「테리가타 장로니게」, 초기불전연구회; Jonathan S. Walters 역(2017), 「Legends of the Buddhist Saints: Apadānapāli 」, (Open Access, CC BY-NC-SA 4.0 라이선스) 참조.
15) 그는 부처님께서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해 도리천에 가신 3개월 동안 부처님을 사모하여, 목건련 존자의 도움으로 장인을 보내 32상 80종호를 살핀 뒤 적우두벽단목으로 5척 크기의 최초 불상을 조성하였다. 초기 불교는 경외심으로 인해 오랫동안 ‘발자국·바퀴·보좌·보리수’ 등 상징물로만 부처님을 표현하였으나, 전승에 따르면 부처님이 하강하실 때 이 목조 불상이 걸어 나와 맞이하자 머리를 쓰다듬으며 “열반 후 큰 불사를 일으키라”고 수기(授記)하셨다고 한다. 이 전승(『증일아함경』, 『대당서역기』)은 기원 전후 간다라·마투라에서 불상 제작이 태동할 때 근거로 원용되었다.
16) 부처님 반열반 당시, 마하가섭은 500명의 비구 대중과 함께 파바(Pāvā)에서 쿠시나가라로 향하던 중 세존의 입멸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었다. 대중 가운데 범부 비구들이 비탄에 잠겨 통곡하자, 그 대열에 섞여 있던 늙어서 출가한 비구 수밧다(Subhadda, 부처님의 최후 제자인 수밧다와는 동명이인)가 '벗들이여, 그만 슬퍼하시오. 우리는 이제 저 대사문에게서 해방되었소! 그동안 이것은 해도 된다, 저것은 안 된다며 우리를 옭아맸으나, 이제 우리는 원하는 바를 마음대로 행할 수 있게 되었소'라는 망발을 하였다. 이를 직접 겪은 마하가섭은 교단의 기강 해이와 파계(破戒)의 확산을 막고 불법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다비식 직후 전격적으로 제1차 결집을 결의하고 단행하게 되었다.(가섭은 “벗들이여, 비법(非法)이 번성하고 법이 쇠퇴하기 전에, 비율(非律)이 득세하고 율이 사라지기 전에, 우리는 법과 율을 결집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결집은 한때 제바달다와 결탁하여 부왕을 살해한 과오를 뉘우치고 부처님께 귀의했던 아사세왕이 '① 500인의 장로들이 3개월간 안거하며 법과 율을 결집할 집회 시설, ② 우기 동안 참여자들이 머물 18개 대사원의 보수와 청소, ③ 참여자들에게 공급할 의복·음식·침구·의약품의 조달과 회의 방해를 막기 위한 외곽 경비' 등의 국가적 후원 아래 이루어졌다. 한편 아사세왕의 하리양카 왕조는 5대에 걸쳐 부왕을 살해하는 패륜을 거듭하다가 백성들의 반발로 대신(大臣) 시슈나가(Śiśunāga)에게 왕위가 넘겨졌다. 시슈나가를 거쳐 집권한 난다(Nanda) 왕조는 중서부의 강국 아반티(Avanti)를 완전히 병합하고 북인도 전역을 석권하기도 하였으나, 북서부 펀자브·탁실라 지역에서 알렉산더 후예(그리스계 수비대)들과의 항쟁을 통해 군사적 역량을 다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에게 정복당하면서 마우리아 제국으로 재편되었다. 아쇼카는 찬드라굽타의 손자이다.
17) ‘삼세실유 법체항유(三世實有 法體恒有)’와 ‘아공법유(我空法有)’를 주장하였는데,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경전(Sūtra)만을 올바른 척도(量, pramāṇa)로 삼자는 경량부(經量部 Sautrāntika)의 견제를 받다가, 후에 아공법공(我空法空)을 주장하는 용수 등의 대승이론으로 비판되었다.
18) 훈족은 카스피해 북부와 볼가강 유역의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에 살던 20만 규모의 유목 연합체였다. 이 중 서진한 흑훈족은 4세기 후반 유럽을 압박하여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했고, 451년경에는 아틸라(Attila)의 영도 아래 프랑스 갈리아 지역까지 침공하여 서로마 제국의 혼란을 야기하였다. 한편 동남쪽으로 남하한 백훈(에프탈)족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간다라 등 중앙아시아와 북인도의 불교 거점을 파괴하였다. 『부법장인연전(付法藏因緣傳)』과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등에 의하면, 에프탈의 왕 미히라쿨라(Mihirakula, 彌勒掘)는 520년대에 제24대 조사 사자존자(師子尊者)를 살해하였는데, 잘린 목에서 붉은 피 대신 흰 젖(白乳)이 한 길이나 솟구쳐 올랐고, 직후 왕은 오른팔이 땅에 떨어지고 결국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는 서기 527년(신라 법흥왕 14년) 순교한 이차돈에 대해 『삼국유사』에 "목을 베자 피가 아닌 흰 젖이 한 길이나 솟구치고 꽃비가 내렸다"고 기록된 것과 순교 이적 모티프와 연대 및 내용 면에서 매우 유사하다.
19) BC 331년 북메소포타미아 가우가멜라(현 이라크 모술 인근 평원) 결전에서 오리엔트의 패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를 격파하고 동방 속주를 평정한 알렉산드로스 3세는 BC 327년경 약 4만~5만 규모의 군사를 이끌고 힌두쿠시산맥과 카이버 고개(해발 약 1,070m) 일대를 넘어 인도 서북부로 침공하였다. 그는 펀자브 지역에서 포로스 왕의 파우라바 왕국과 히다스페스 전투를 치러 승리하였으나, 배후에 포진한 마가다국(난다 왕조)의 막강한 전력에 대한 부담과 오랜 원정에 지친 장병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남쪽으로 선회하여 극도로 험난한 게드로시아 사막(현 파키스탄·이란 남부)을 거쳐 바빌론으로 회군하였다. 그는 BC 323년 6월 급사하였고, 찬드라굽타는 BC 322년 난다 왕조를 무너뜨리고 마우리아 왕조를 개창하였다. 이후 알렉산드로스의 후계 장군인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1세가 BC 305년경 인더스 유역을 재침공했으나 찬드라굽타의 강력한 방어에 막혀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셀레우코스는 전투 코끼리 500마리와 통혼 관계를 얻는 대가로 아프가니스탄 동부와 발루치스탄 일대의 지배권을 마우리아에 넘겼으며, 이 코끼리 군단을 활용해 서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했다. 찬드라굽타의 손자인 아쇼카 대왕은 정복 전쟁을 벌이던 중 칼링가 전투(BC 261년경)의 참상을 목도하고 불교로 귀의하여 법(Dharma)에 기초한 선정을 베풀며 인도 전역에 불교를 융성시켰다. 한편 셀레우코스 제국은 내부 분쟁 등으로 BC 3세기 중엽 동방 영토를 상실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파르티아가 일어나 서방과의 육상 교통로를 차단했고, 박트리아 총독 디오도토스 1세가 독립하여 아무다리야강 유역을 중심으로 그리스-박트리아 왕국(Greco-Bactrian Kingdom)을 세웠다. 이들은 점차 힌두쿠시를 넘어 북인도로 진출하며 인도-그리스 왕국으로 발전하였고, 메난드로스 1세가 나가세나(나선) 존자와의 대론(『밀린다왕문경』, Milinda Pañha) 끝에 불교로 개종하는 등 그리스 헬레니즘 문화와 불교가 융합된 ‘그리스 불교(Greco-Buddhism)’를 성립시켰다. 그 결과 헬레니즘 조각 양식이 불교 교리와 결합하면서 이전까지 불상을 만들지 않던 무불상(無佛像) 전통을 깨고 부처를 조각한 간다라 미술이 탄생하였다. BC 2세기 후반 유목민 월지가 박트리아를 정복하며 수립한 쿠샨 제국은 이러한 헬레니즘 문화와 불교적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쿠샨의 카니슈카 1세는 대승불교를 전폭적으로 후원하여 간다라를 국제 불교학의 중심지로 육성했고, 불교는 박트리아의 발흐·소그디아나·호탄·쿠차 등 실크로드 오아시스 도시망을 따라 중앙아시아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이는 훗날 안세고(파르티아인)·지루가참(支婁迦讖 Lokakṣema 대월지인)·강승회(康僧會, ?~280,소그드인) 등 중앙아시아 출신 역경승들을 통해 중국과 동아시아로 대승불교가 전래되는 사상적·문화적 교량이 되었다. 강승회는 안세고가 번역했던 초기 호흡 참선 경전인 『안반수의경』에 뛰어난 서문과 주석을 달아 선정(수식관)의 체계적인 수행법을 오국왕 손권(孫權)을 비롯하여 남방에 널리 보급했다.
20) 아쇼카 대왕의 후원으로 교단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자, 많은 외도들이 승려로 위장 출가하여 교리를 왜곡하였다. 이로 인해 승단 내부 갈등이 격화되어 정통 비구들이 외도들과의 의식을 거부하면서 수도 파탈리푸트라 대사원의 포살이 7년간 중단되었다. 사태를 수습하려던 왕실 칙사에 의해 유혈 참극까지 벌어지자, 아쇼카 대왕은 목갈리풋타 팃샤 장로를 초빙하여 승단 정화에 나섰다. 교리 시험을 통해 사이비 승려 약 6만 명을 강제 환속시켜 청정성을 회복한 후, 팃샤 장로를 좌장으로 1,000명의 아라한이 모여 제3차 결집(기원전 250년경)을 단행하여 이단 사상을 논파한 『논사(論事)』를 편찬해 아비달마 체계를 확립하였다. 결집 직후 9개 방면으로 국제 전도단을 파견하여 불교를 세계 종교로 발전시키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21) 이때 강제 환속당한 외도 세력과 특권을 잃은 브라만 계층의 누적된 반발은 훗날 마우리아 왕조를 무너뜨리고 일어선 슝가 왕조(Śuṅga, BC 185~BC 73경)의 브라만교 부흥과 불교 탄압 정책을 뒷받침하는 사회적 반동의 배경이 되었다.
22) 당시에는 교리 분쟁이 수습되는 듯하였으나, 분별설부(分別說部) 중심의 상좌부 정통에 반대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는 마가다를 떠나 서북부의 마투라(Mathurā)와 카슈미르·간다라 등지로 거점을 옮겨 교세를 확장하였다. 한편 마가다 본토에서는 점차 대중부(大衆部)가 득세함에 따라, 상좌부 계통은 서북방의 유부(有部)와 서남방 및 스리랑카로 이어진 분별설부로 각각 분화·남하하게 되었다.
23) 아쇼카는 왕자 시절 아반티의 총독으로 우자인에 부임하는 길에 상업 도시 비디샤(Vidiśā)에서 장자(상인)의 딸인 데비(Devī)를 만나 혼인하여 아들 마힌다(Mahinda)와 딸 상가밋타(Saṅghamittā)를 두었다. 그러나 데비는 상인(바이샤) 출신이었기에 아쇼카가 즉위한 후에도 파탈리푸트라의 수석 황후가 되지 못하였고, 수도로 가지 않은 채 고향 비디샤에 머물며 산치 언덕의 사원에서 불교 수행에 전념하였다. 성장한 마힌다와 상가밋타는 목갈리풋타 팃샤(Moggaliputta Tissa) 장로 등의 지도를 받아 출가하여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 제3차 결집 후 스리랑카(실론) 전도단 파견이 결정되자, 마힌다는 산치로 가 모친 데비와 함께 시간을 보낸 뒤 동인도 해안의 탐랄립티 항로를 거쳐 스리랑카로 건너가 테라바다(상좌부) 불교를 전파하였다. 스리랑카 왕실의 비구니 파견 요청으로 상가밋타는 부다가야의 보리수 묘목을 품고 가 비구니 교단을 열었다. 이후 아쇼카는 데비와의 깊은 인연과 마힌다의 전도 출발지였던 산치 언덕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대탑(산치 제1스투파)과 석주를 세웠다. 이 탑은 후대 슝가 왕조 시기에 석조로 대대적인 증축을 거쳤고, 사타바하나 왕조 때 사방에 화려한 조각의 탑문(토라나)이 더해지면서 현존하는 가장 완벽한 불교 대탑으로 완성되었다. 붓다가야의 원래 보리수는 7세기 초 힌두교 왕인 사샨카(Śaśāṅka)에 의해 뿌리째 뽑혀 불태워져 죽었고, 그 후 이식된 나무도 12세기 말 이슬람 세력의 침입으로 피해를 입었으며, 1876년 거센 폭풍우에 쓰러졌다. 마하보디 사원의 현 보리수는 1881년 영국 고고학자 알렉산더 커닝엄(Alexander Cunningham)이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에서 상가밋타가 모셔갔던 자식 나무에서 묘목을 가져와 심은 손자 나무이다. 이것이 상징하듯 스리랑카는 상좌부(上座部) 교단을 순수하게 전승시키고, 구전되던 팔리어 삼장을 패엽경(貝葉經)으로 문헌화하여 영구 보존하였으며, 5세기 붓다고사의 『청정도론(淸淨道論)』을 통해 상좌부 교학을 집대성하는 불멸의 공헌을 남겼다.
24) 산스크리트어·팔리어로 ‘황금의 땅’이라는 뜻인데, 미얀마·태국·캄보디아·라오스 등이 각자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태국은 자신들이 정통 계승지임을 천명하며 방콕 국제공항의 명칭을 '수완나품(Suvarnabhumi) 공항'으로 명명하기도 하였다.
25) 그는 인도 헌법을 기초하고 초대 법무장관도 역임하였는데, 1956년 22개 항목의 서약 중 하나로 불가촉천민에게 힌두교 신앙을 버리고 불교로 개종할 것을 선언하였다. 지정카스트(Scheduled Castes, 달리트)는 인도 인구의 약 16%를 차지하며(기타 후진 계급 등 중간 계층이 50% 이상), 이미 K. R. 나라야난(제10대)과 람 나트 코빈드(제14대) 대통령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현재 붓다가야 마하보디 사원이 힌두교도 주도의 공동 관리 체제하에 있어 인도 불교계의 최대 현안이 되고 있다.
구상진|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검사 생활을 했고, 서울시립대 법학과 교수 및 동 대학 로스쿨 원장, ‘법조불교인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변호사, ‘헌법을생각하는변호사모임’ 명예회장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불교와 자유민주주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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