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비워놓은 마음 – 경기도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아래에서

템플 스케치 | 절집으로 가는 길

노란 잎 사이, 붉게 물든 숲이 탑을 에워싼다.
말 없는 돌 앞 멈춘 걸음.

같은 가지에서도 서로 다른 빛으로 물든다.
아직 푸른 잎, 벌써 붉어진 잎, 저마다의 때를 지나고 있다.
어떤 마음은 쉽게 놓이고, 어떤 마음은 오래 머문다.

놓지 못한 마음을 탓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 바라본다.

기와지붕 사이로 노란 나무가 환하다.
가을 나무 아래 사람들이 지난다.
저마다 품고 온 마음도 가을 잎처럼 다르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걷고 있나?
지나간 일을 되짚느라 눈앞의 빛을 놓치고 있나?

생각이 잦아드니 기와의 선이 보이고,
가을 잎 사이로 빈 하늘이 보인다.

무상(無常).
푸르던 잎이 노랗게 물들었다.
지금의 빛도 오래 머물지는 못할 것이다.
나무가 잎을 내려놓고 나면 가지가 드러나고 기와지붕 위로 겨울 하늘이 넓어질 것이다.

가을엔 마음 한쪽에 빈자리를 마련한다.
다 하지 못한 말, 끝내 뜻대로 되지 않은 일.
당장 답을 찾으려던 마음을 쉬게 한다.

석탑 앞에서 손을 모은다.
이 가을을 볼 수 있어 고맙다.
함께 걸을 사람이 있어 고맙다.

십일월.
붙잡았던 마음을 조금 놓는다.

 

용문사는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용문산에 있는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 봉선사의 말사(末寺)이다. 913년 창건했다. 1907년 의병 활동 때와 1950년 6.25 전쟁 때 소실되었다. 1982년 중창되었다.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