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하지 말고 발견하라: 무소득과 분별의 함정
[다시 듣는 법문] 법상 스님의 『반야심경』 이야기 (1)
오늘 주제가『반야심경』이야기입니다. 불교에 또는 절에 오는 분들은 절에서 뭔가 힘들고 괴로운 마음을 좀 위로받고 뭔가 행복을 얻거나 또는 깨달음을 얻거나 내가 괴로웠던 뭔가를 해결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으로 절에들 많이 오실 테죠. 뭔가 절에 가서 법회에 가서 오늘 뭐라도 하나 얻고 오자, 뭔가라도 하나 배우고 오자 이런 마음으로 올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팔만대장경을 함축하고 있는 경전, 반야경이라고 표현을 하기도 하고 그 반야경을 또 함축한 경전을『반야심경』이라고 하는데 즉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함축하고 있는『반야심경』의 의미상 핵심을 이루는 '무소득'이라는 단어가 있어요.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이러잖아요. 그 앞에 설법했던 경전의 모든 내용을 이렇게 설법한 이유는 '무소득'인 까닭이다,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뭔가를 얻고 싶어서 왔는데『반야심경』에선 얻을 게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언뜻 듣기에는 나는 절에 가서 뭔가를 좀 얻고 싶은데 뭔가를 좀 배워가지고 뭔가를 좀 체득하고 싶은데 얻을 것이 없다는 얘기가 불교의 핵심이라고? 그게 말이 되나? 그럼 내가 너무 공허해지는데 내가 절에 올 의미가 없는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왜 얻을 바가 없다고 하느냐 하면 얻을 바가 없는 이유가 본래 자신이 완벽하게 구족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깨달음은 자기에게 완전히 있고 행복, 평화, 자비, 지혜, 그 무엇이 되었든 열반, 해탈 그것은 내가 바깥으로 쫓아나가서 구해서 찾아서 가져서 얻어지는 뭔가가 아니란 말이죠. 자기한테 이미 있는 보배를 그냥 발견하는 공부인 거예요. 공부는.
그런데 너무나 애석하게도 이 세상은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은 인류 역사는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생각, 판단, 분별심을 가지고 뭔가를 자꾸 이렇게 가지려고 했던 거예요.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자신이 본래 완전하다는 사실을 원만구족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른 걸 뭔가 얻고 가지고 벌고 그러고 나면 좀 내가 온전해지지 않을까? 행복해지지 않을까?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 속에서 살았던 거예요. 일체중생이 진실을 보면 괴로울 수가 없단 말이죠. 본래 괴로움은 없단 말이죠. 그런데 진실을 보지 않고 전부 다 자기 생각 속에서 살았던 거예요. 그런데 그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생각은 망상이란 말이죠. 진실이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모든 사람이 전부 다 또 인류 역사를 살아왔던 모든 사람이 전부 다 생각 속에서 살고 그 인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온 생각과 견해와 사상과 주의와 철학과 그런 것들을 너도나도 전해주면서 학교에서 초등학교 6년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수 없는 한 20년 가까이를 공부시키면서 그동안 인류 역사에서 우리가 분별했던 분별 망상의 더미들을 가르쳐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은 즉 1~2명만 믿으면 긴가민가할 텐데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생각이 만들어 놓은 거 그걸 옳다고 믿고 그 속에서 뭔가 진리를 찾고 그 속에서 뭔가 취하고 버리려고 하고 그러고 살아왔다 보니까 너무나 당연하다고 믿게 된 거예요. 내 생각이 옳다고 믿게 된 거죠. 그 생각 때문에 괴로웠는데 우리는 또 다른 생각을 가지고 더 행복한 것을 얻으려고 한단 말이에요. 이 가르침에서 진리를 얻지 못하면 종교를 바꿔볼까? 다른 철학을 공부해 볼까? 저런 주의를 좀 공부해 볼까? 이런 식으로 뭔가 새로운 걸 공부하고 나면 더 뭔가 좋은 걸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쉽단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 모두가 이 생각의 늪에 빠져서 분별망상을 주인 삼아서 살아왔기 때문에 괴로웠을 뿐이란 말이에요. 즉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자기 식대로 재해석해서 사는 거죠. 그리고 내 식대로 재해석한 세상이 진짜다라고 믿으면서 그런데 그걸 왜 의심해 보지 않았느냐 아무도 의심해 보지 않아요. 왜 그랬느냐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그게 맞다고 느끼며 사니까 이게 아무리 거짓이어도요. 모든 사람이 전부 다 그게 맞다고 하면 맞다고 믿어요. 예전에 어떤 다큐를 봤더니, 사이비 종교 집단의 어떤 피해 이런 것들을 찍었던 건데 그 종교 집단 안에서는 갇혀가지고 어디 산 같은 데 안에 갇혀서 너무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사는데 그 엄청 많은 사람들이 거기 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있고 태어난 어린 아기부터 어른들까지 전부 다 거기서 노동을 하면서 사는데 먹여주고 재워주죠. 그런데 그 종교단체는 엄청난 사업체도 가지고 있으면서 부자인데 그 사람들한테는 최소한의 먹을 것밖에 안 주고 또 그러면서도 이렇게 그냥 먹여주고 재워주는 게 어딨냐 너희는 우리의 은혜 때문에 그렇다라고 얘기하니까 그걸 믿을 뿐만 아니라 그 교주 같은 분이 거기 있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쉽게 말해서 이런 종교행사 시간인가 보죠. 모아놓고 나오라 해서 막 뺨을 때린단 말이에요. 뺨을 때리고 욕을 하고 그러는데 모두가 죄송합니다. 하고 저희가 얼마나 잘못했으면 이렇게 때리실까요? 하고 손 아프시겠어요? 이러면서 막 가슴 아파하고 그런데 너무나 상식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모두가 저분이 때리는 건 맞는 거야. 이렇게 얘기하니까 그걸 믿더란 말이에요. 심지어 그분이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을 불러 가지고, 화를 막 버럭버럭 내다가 그분의 자식을 불러 가지고 본인이 그 아줌마 뺨을 때리다가 자식 보고 엄마 뺨을 때리라고 시킨단 말이에요. 그 옆에 사람들이 때려 때려 때려 막 소리 지르고 그러니까 이게 너무나 기본 상식에 안 맞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거를 맞다고 믿을 수도 있는 거죠. 사람들은 왜? 모두가 그렇다고 믿으면 그걸 정말인가 보다 이렇게 가스라이팅이 될 수가 있단 말이에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 분별을 내려놓는 것이 지혜의 시작
그런데 그런 어떤 극단적인 비유는 그만두고라도 우리는 안 그러냐 그렇게까지는 아니겠지만, 우리 또한 생각, 판단, 분별, 옳은 생각이라는 환상에 빠져서 내 생각이 옳아라는 환상에 빠져서 또 세상이 만들어 놓은 가치 있잖아요. 이건 옳은 가치야. 저건 나쁜 가치야. 이런 온갖 것들 그런 것들은 정말 옳다라고 집착하면서 올바른 생각과 틀린 생각에 있어서 난 올바른 생각은 집착하고 틀린 생각은 거부하려고 하는 그 생각을 집착하며 산단 말이죠. 그게 괴로움의 원인인지를 모른단 말이죠.
그래서 불교에서 핵심 수행은 팔정도라고 하죠. 중도라고 하고 팔정도의 첫 번째가 정견이거든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즉 바르게 보는 것밖에 없어요. 불교는 바르게 보기만 하면 된단 말이죠. 그럼 우리가 지금까지는 바르게 보지 않았단 말이냐? 바르게 보지 않았어요. 뭐가 바르게 보지 않은 것이냐? 현실을 생각가지고 해석해서 봤단 말이죠. 자기 생각대로 어떤 현실도 어떤 사람이 보기엔 좋고 다른 사람이 보기엔 싫을 수 있어요. 어떤 하나의 정책을 어떤 사람들은 열광하고 어떤 사람들은 분노할 수 있죠. 옳은지 그른지를 알 수가 없어요. 언제쯤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런 말 하잖아요. 알 수 없을 때 미리 섣부르게 알려고 하지 말고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야. 이런 말 좋아해요. 그러니까 끝까지 좀 더 지켜보자 이런 말을 해요. 그 말은 어찌 보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까 지금 단편적으로 결론 내리지 말고 조금 더 지켜봐야 진짜 결론을 내릴 수 있어. 이런 말과 비슷하잖아요. 그런데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라는 그 의미가 다르게 말하면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정말 진실을 알게 될 거야. 그것도 알 수 없어요. 그렇지 않나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정말 진실이 뭔지 알게 될 거야. 알 수 없어요. 그걸 알게 될지 모르게 될지 왜냐하면, 모든 것은 정말로 옳거나 정말로 틀린 것이 어떻게 고정되게 있을 수가 있죠. 인연 따라 어떤 눈으로 보면 옳다라고 할 수 있고 어떤 눈으로 보면 틀렸다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어떤 상황에선 옳고 어떤 상황에선 틀려요. 그건 영원히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을 뿐이지 거봐 시간이 지나서 보니까 옳았잖아. 그렇게 규정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규정할 수는 없어요. 영원히 규정되지 않아요.
길고 짧음도, 잘나고 못남도 인연 따라 붙인 이름일 뿐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이것을 길다고 할 것이냐 짧다고 할 것이냐. 이건 100년을 연구를 해도 답이 안 나와요. 전봇대 옆에서는 짧고 볼펜 옆에서는 길겠죠. 그런데 우리들은 왜 괴로워지는지에 대한 원인을 좀 단순하게 설명하면요. 이거는 길다고 말할 수도 없고 짧다고 말할 수도 없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걸 가지고 정했어요. 이건 긴 거야라고 정해놨어요. 자기 마음속에서. 이건 긴 거야 그리고 긴 건 좋은 거야 짧은 거는 좀 수준이 떨어지는 거고, 좀 안 좋은 거고, 긴 게 좋은 거야 그리고 나는 이걸 긴 거라고 딱 집착해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잖아요. 저 사람 어떻게 이거를 길다라고 확정할 수 있지? 정할 수가 있지? 말이 안 되는 일을 한 사람이잖아요. 어리석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거의 진실은 뭐예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면 정견 바르게 보면 지관 분별 망상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면 그냥 이렇게 볼 뿐이죠. 이걸 뭘 규정할 수 없잖아요. 길다라고 말하면 틀리고 짧다라고 말해도 틀리고 그냥 이럴 뿐이죠. 이게 정견이죠. 생각 판단 분별이 개입되지 않고 그냥 본단 말이에요. 이럴 때 괴로움이 있나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걸 길다라고 집착했는데 딴 사람이 야 그게 뭐가 기냐? 짧지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한테 대항하는 것 같고 내 말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 같으니까 내가 공격받는다고 느껴서 화를 내고 그럴 수 있겠죠. 이걸로 하니까 좀 덜 와닿잖아요. 그런데 똑같아요. 세상 모든 것을 이렇게 길다거나 짧다고 분별해서 그걸 집착하고 취하고 붙잡는 거죠. 그게 탐심이에요. 그 생각이 옳다라고 집착해서 붙잡는 마음. 그게 탐심이에요. 내가 붙잡았는데 내 뜻과 다른 사람을 만날 때 화가 나거나 내 뜻대로 안 될 때 화가 나요. 그게 진심이에요. 그런데 이거를 모를 뿐이라는 있는 그대로 보는 진실의 자리에 있지 못하고 길다거나 짧다고 하는 규정을 믿는 마음이 어리석음 치심이거든요.
타인을 판단하고 나 자신을 규정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어
그런데 이것만 그렇게 보는 게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우리는 그와 같이 바라봅니다. 자기를 어떻게 봐요? 예로 비유되니까. 좀 안 와닿는데 이 몸을 나를 내가 있다고 일단 규정을 해 놓은 다음에 이걸 나라고 규정을 해버렸단 말이에요. 거기부터가 우선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건데 그건 좀 이따 얘기를 하고 나라고 규정을 하고 나서는 나에게 좋은 것과 나에게 안 좋은 것 이런 걸 만들어 놓고 또 나는 키가 크다, 키가 작다. 나는 능력 있다. 능력 없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별로인 사람이다라고 규정해요. 내가 잘난 사람이거나 못난 사람일 수가 있나요? 이것을 죽을 때까지 연구해도 긴지, 짧은지 알 수 없는 것과 똑같아요. 내가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 내가 괜찮은 사람인지 별로인 사람인지는 알 수 없어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정견으로 바라보면 나에 대해서 판단할 수 없어요. 그냥 볼 뿐이에요. 그런데 나는 못났어라고 규정하는 사람은 남들과 비교하면서 절망, 좌절, 패배감 이런 거에 빠져서 자괴감에 사로잡힌 채 인생을 괴롭게 살거든요. 그 생각을 믿기 때문에 나는 못났다는 생각을 붙잡아 집착하기 때문에 그런데 진실은 내가 잘났는지 못났는지 전혀 알 수 없고 남들도 마찬가지로 알 수 없어요. 그러니까 일체 모든 존재는 알 수 없기 때문에 평등해요. 옳은지 그른지 맞는지 틀린지 내가 잘났는지 못났는지 내가 열등감을 느끼는 게 합당한 일인지를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뭐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내가 그 생각을 믿은 거죠. '나는 못났어' 라는 생각을 믿어버린 거죠. 붙잡아버린 거죠. 집착해버린 거죠. 이게 짧다거나 길다는 생각 하나를 붙잡아버린 거죠. 그게 합당한 일인가요? 진리의 합이라는 일일까요? 알 수 없는 걸 자기가 아는 척한 거죠. 그 안다고 여기는 생각을 분별, 의식이라고 그래요. 분별심이라 그래요. 그 안 건 진짜로 안 게 아니라 분별해서 안 거일 뿐이거든요. 즉 비교를 통해서 안 것뿐이에요. 이게 작은 것과 비교하면 길다 긴 것과 비교하면 짧다. 이렇게 분별해서만 임시로 짧다거나 길다라고 임시로 그때그때 달라지죠. 그러니까 허망하죠. 진실이 아니죠. 내가 잘난 사람인지 못난 사람인지는 영원히 규정되지 않아요. 그러면 얘에 대해서 그냥 볼 뿐이에요.
남들과 만나서 대화를 나눌 때 마음속에 저 대단한 사람 앞에서 쟤가 나를 무시하지 않을까? 나는 초라한데 이런 생각을 할 이유가 없는 거죠. 분별심이 없으면 괴로움도 없죠. 절망이나 슬픔이나 비교, 분별심이나 자괴감도 없고 우월감도 없고 열등감도 없어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때는 이렇게 있는 그대로의 실상은 뭐라고 규정될 수 없고 좋다, 나쁘다,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크다, 작다, 잘났다, 못났다 그러한 말로 규정할 수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규정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왜 그러냐면 분별심은 뭔가를 알고 싶어 해요. 규정하고 싶어 해요. 이게 큰지 작은지를 기어이 알아가지고, 정의를 내려야만 직성이 풀려요. 모르는 걸 모르는 채로 두는 걸 해본 적이 없어요. 불안해요. 내가 잘난 사람인지 못난 사람인지를 알아야 직성이 풀려요. 어떤 새로운 친구를 만났으면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를 내 안에서 규정을 하고 나야 그 사람을 만날 수 있거든요. 누가 소개시켜주면 슬쩍 뒤에 가서 물어봐요. 쟤 어때요? 그럼 대부분 괜찮아 이러거나 별로야 이러거나 이런단 말이에요. 괜찮아 소리 들으면 마음을 열고 다가가고 별로야 이러면 뭔가 경계심을 가지고 다가가죠. 알 수 없는데 그 한마디 말을 듣고 어떻게 알 수 있어요? 그 사람이 안 거는 올바른 걸까요? 여러분 자녀를 볼 때 내 자식 나도 모르겠잖아요. 자녀만 그래요? 내 인생 나도 모르겠다. 이럴 때 있지 않나요? 왜냐하면, 나를 가만히 보면 어떨 땐 이기적이고 못됐어요. 아무리 착한 사람도 자기 이기심은 자기가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좀 이기심이 보인단 말이에요. 그런데 내가 착한 사람, 콤플렉스 같은 게 있어서 남들 앞에서는 예를 들어 남들 앞에서 착한 척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럼 남들 앞에서는 남들이 나를 착한 줄 알아요. 그런데 나는 내 마음속에서 이기심을 보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분열이 일어나요. 괴로워요. 사람들한테 거짓을 말한 것 같고 그런데 어차피 얘는 규정될 수가 없어요. 몰라요. 착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몰라요. 이기심이 있으면 무조건 나쁜 사람일까요? 아니에요. 그렇게 규정한 생각이 모르는 것을 모르는 대로 둘 때 그것이 지혜예요. 그게 반야지혜예요.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반야지혜는 분별하지 않는 데서 오는 지혜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보고 규정하지 않고 정해놓지 않는 그게 반야지혜예요. 모름으로써 바라보는 것 안다는 생각으로 이걸 길다거나 짧다고 내가 잘났다거나 못났다고 규정하는 걸 뭐라고 부르냐면 분별심이라고 부르고 규정한 것에 집착하는 것을 양극단에 치우쳤다 이렇게 말해요. 길다, 짧다, 잘났다. 못났다. 이건 옳다. 이건 그르다라고 탁 규정하는 생각. 그걸 극단에 치우친 생각이라고 부릅니다. 모름으로 보는 것, 규정하지 않고 보는 것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중도의 안목이라고 하죠. 중도로 보는 거예요. 왜 그렇게 봐야 되죠? 진실이니까. 이게 긴지 짧은지 알 수 없으니까 그래서 이걸 무분별이라고 해요. 길다고도 말할 수도 없고 짧다고도 말할 수도 없다. 분별할 수 없다는 거예요. 무분별. 무분별지라고 그래요. 이렇게 보는 걸 무분별지라고 불러요. 또 정견으로 보는 거죠. 그러니 이걸 길다는 말에 집착해도 안 되고 짧다는 말에 집착해도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집착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이 세상에. 그런데 이걸 길다라고 이름 붙여도 안 되고 짧다라고 이름 붙여도 안 되죠. 그런데 인연 따라서 요만한 것 사이에서는 길다라고 임시로 이름 붙일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건 임시로 붙인 이름이잖아요. 그래서 중간 사상에서는 이름 붙일 수는 있으나 그 이름 붙인 건 가명이라고 불러요. 가짜 이름 가명. 진실은 이름 붙일 수 없는데 인연 따라 임시로 가명을 붙였을 뿐이다. 인연 따라 길다고 말해질 수도 있고 짧다고 말해질 수도 있죠. 인연 따라 이런 게 생겨나고 저런 게 사라질 수도 있죠. 그래서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연기한다. 인연 따라 일어날 뿐이다. 인연 따라 만들어졌을 뿐이에요. 인연 따라 상대적으로 길다, 짧다라고 말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그건 연기한 거여서 실체는 아니에요. 실체성은 없어요. 그래서 인연 따라 생겨난 모든 것은 임시로 길다. 임시로 짧다라고만 말할 수 있을 뿐이에요. 이 인연 따라 길다라고 말해질 뿐. 그래서 연기된 모든 것은 실체가 없어서 비실체성이에요. 실체가 없어요. 고정된 자아가 없어요. 길다거나 짧다라고 말할 수 있는 고정된 자아가 없어요. 그래서 무아라고도 해요. 그러니까 뭐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으니까 이걸 공하다고 표현해요. 이게 없다는 게 아니라 있긴 있는데, 인연 따라 생겨난 거여서 이걸 있다고 규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없다고 규정할 수도 없어서 유무, 중도, 유로 설명해도 안 되고 무로 설명해도 안 되고 중도로서 밖에 설할 수 없다. 그게 중도고 공이에요. 이렇게 공하단 말이에요. 얘만 그런 게 아니라 나도 그렇고 이 세상도 그렇고 모든 것이 다 이와 같단 말이죠.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것을 이와 같이 바라보는 것이 지혜이고 정견이고 무분별지고 무소득이에요. 본래 얻을 바가 없어요. 소득, 얻을 바가 없는데 내가 붙잡아 소득하려고 하거든요. 가지려고 하거든요. 나는 잘났어라는 생각을 쥐려고 하고 돈을 쥐려고 하고 명예와 권력과 지위를 붙잡으려고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길다를 붙잡아 봐야 의미 없잖아요. 붙잡을 수 없는 걸 붙잡은 것과 똑같이 진급 승진을 붙잡으려고 한다. 의미 있을까요? 진급하고 싶어요. 그런데 그게 진급이 내가 하고 싶다고 되는 건가요? 진급이 좋은 게 맞나요? 몰라요. 알 수 없어요. 어떤 사람은 진급해 가지고 더 망한 사람도 있어요. 진급했기 때문에 잘못되는 사람도 있어요. 또 어떤 사람은 승진 안 했기 때문에 다행스럽게 나와 가지고 딴 일을 시작해서 자기 일을 시작해 가지고 엄청난 회사를 성공시키기도 해요. 회사에서 아주 뛰어난 연구하는 사람이라 기가 막힌 걸 만들어냈는데 너무 잘 나가니까 옆에 다른 연구원들한텐 꼴 보기 싫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저놈만 없으면 우리가 1등이다. 싶어 가지고 저 천재를 내쫓는단 말이에요. 그럼 그 천재는 나갔는데 나갈 때는 절망이죠. 내가 여기서 탑이었는데 내가 쫓겨나니까 괴롭단 말이에요. 그런데 어쩔 수 없이 나는 기술은 있는데, 할 게 없어요. 그러니까 나가서 어떻게 해야 돼요? 자기가 자기 회사 차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 회사에 있을 때는 그런 견제도 많고 회사 부조리도 있고 이러다 보니까 할 수 없었던 것들을 이제 내 회사에서 마음껏 해보자 그래 가지고 새로운 회사 문화가 생겨나요? 새롭게 만들어진 회사들은 자유로운 그러면서 거기서 놀라운 회사로 발돋움하기도 하죠. 즉 승진 안 했다라는 게 나쁘다라는 보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해 놓는단 말이에요. 지급 떨어진 건 실패, 진급한 건 성공. 거짓이잖아요. 진실이 아니잖아요. 반야지혜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정하니까 괴로운 거예요. 정해서 괴로운 거 아닌가요? 정해서 괴로운 거예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때는 괴로울 게 없어요. 이처럼 이 세상 모든 일에 대해서 우리는 전부 다 규정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반야심경』은 뭐냐 하면 공성을 가르치는 가르침이라고 하죠. 없다라는 말, 비었다는 말 이런 말을 끊임없이 한단 말이죠. 전부 다 이 하나를 가르치는 거예요. 보세요. 극단에 치우칠 수 없는데 어느 한 극단을 붙잡아 집착할 때 괴로워요. 우리 삶의 모든 괴로움은 다 거기서 나타나요. 자식이 A라는 대학에 갔으면 좋겠어요. 남편이 A라는 회사에 취직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알 수 있어요? 모르잖아요. 자식은 A라는 대학에 가면 오히려 왕따가 돼서 얘가 망할 수도 있고 그 아이의 귀인들, 인생의 모든 인연들은 B라는 대학에 다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럼 걔는 A라는 대학에 가면 안 되고 B라는 대학에 가야만 될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건 알 수 없어요. 그런데 모르면서 왜 A라는 대학에 가야 된다고 집착을 할까요? 연봉을 얼마는 받아야 된다라고 생각하지만 그 연봉 받으면 안 될 수도 있어요. 오히려 지금 정도 받는 연봉이 나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아니에요. 인연 따라 달라요. 어떤 사람은 많은 연봉을 감당할 수 있는 복이 있는 사람은 그만큼 받아야 되는데 아직 그 복은 없는 사람은 좀 적게 받는 게 맞을 수도 있어요. 그게 조화롭고 자연스러운 연기적인 실상일 수 있단 말이죠. 그런데 남들이 좋다는 건 나도 다 갖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에 욕심을 부리는 거죠. 그게 진실인지 검토해 보지 않고 확실히 알아보지 않고 즉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지혜로써 보지 않는 거에요. 『반야심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얘기를 하고 있어요.
(다음 호에 계속)
* 이 글은 2026년 9월 18일, (재)대한불교진흥원 주최로 서울 다보원에서 열린 상주 대원정사 주지 법상 스님 초청 다보법회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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