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타나[Cetanā, 의사], 그것이 곧 업이다

[업(業),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다]



부처님께서는 “의사(Cetanā)가 업(Kamma)”이고, “인간은 자기 행위(업)의 유일한 주인이며 상속자"라고 하셨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마음 공부’, ‘일체유심조’라고 하는 근본취지도 여기에 있다.

부처님 가르침의 결론은 올바른 ‘마음 가짐•행동•삶’의 길을 알아 닦아 나가게 하는 데 있고, 많은 법문은 이에 관련된 각종 이치를 해명하여 의문을 해소하는 데 있으며, 그것에 직결되지 않는 광대하고 번잡한 질문(無記)에 대하여는 대답하지 않으심으로써 그런 잡다한 것들을 다루는데 소모되는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셨다.

1. 업의 개념

(1) 업의 용어

'업(業)'은 산스크리트어 카르마(Karma) 또는 팔리어 캄마(Kamma)의 번역어이다. 그 어원인 ‘kṛ’는 ‘행하다·만들다·짓다(Do·Make)’를 뜻하므로, 본래 '행위(Action)'·'작용(Deed)'·'만들어 냄(Making)'의 의미를 지닌다.

카르마는 고대 베다(Veda) 시대에 주로 제사 의식에서의 '제식적 행위'나 '의례의 집행'을 뜻했으나, 우파니샤드 시대를 거쳐 붓다 이후에는 단순한 물리적·의례적 동작을 넘어 도덕적 가치와 인과적 잠재력을 지닌 '의지적(도덕적) 행위'로 의미가 심화되었다.

따라서 ‘일·직업·행위·지음’을 뜻하는 한자 ‘업(業)’으로 번역한 것 자체는 적절하다. 그러나 본래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을 모두 포괄하는 가치중립적인 용어임에도, 오늘날 ‘업보(業報)’나 ‘업장(業障)’처럼 부정적인 결과나 숙명적 굴레를 가리키는 말로 변질되어 쓰이고 있는 점은 경계해야 할 왜곡이다.

현대적·학술적 관점에서는 이를 '지음(짓는 일)', '의도적 행위', '형성력(形成力)', '동태적 행위와 그 잠재력', '스스로 빚어내는 행위적 동력', '습관적 반응 양식'으로 옮길 수 있으며, 나아가 법학·행위론적으로는 '의사적 실행행위(意思的 實行行爲)'나 '책임 귀속의 원인 행위'로 번역할 수도 있다.

(2) 업과 과보

업(業)은 짓는 즉시 마음에 변화를 초래하며, 그 변화된 마음이 원인이 되어 미래의 다양한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업에는 미래를 형성하는 힘이 내재해 있으며, 이를 ‘업력(業力)’이라고 한다. ‘과보(果報, Kamma-vipāka)’는 그러한 행위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르익어 나타난 결실이다. 업과 과보의 관계는 사용과(士用果)·증상과(增上果)·등류과(等流果)·이숙과(異熟果) 등으로 세분된다. 이러한 업보는 과거의 행위만으로 기계적·숙명론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상황(Utu)·생물학적 유전(Bīja)·심리적 작용(Citta)·도덕적 행위(Kamma)·자연적 법질서(Dhamma)로 이루어진 ‘5종 니야마(Pañca-niyāma)’라는 다층적 인과 질서 속에서, 행위 당시 및 과보 발현 시점의 마음 씀과 구체적인 ‘조건(緣)’들이 상호작용함으로써 비로소 현실화된다. 그러한 과보는 누군가의 노력에 의해서만 실현되는 세속의 과보와는 차이가 많다.

(3) 사업과 사이업

사업(思業)은 마음의 의지적 작용(意業) 자체이며, 그 의지가 신체적·언어적 행동으로 표출된 것이 사이업(思已業, 곧 身業·口業)이다.

신업(身業)은 신체 동작을 통하여 외계에 의사를 물리적으로 실현함으로써 성립하지만, 구업(口業)은 주로 음성 발성을 통하며 그 외에도 문자·기호·태도·몸짓 등으로 의사를 표현하고 전달함으로써 성립한다. 살생·투도 등 무거운 악업이 신업으로 실행되는 경우가 많고, 자연계에 물리적 변화를 야기하는 것은 물질로 구성된 육체를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므로, 통상 세간에서는 신업을 가장 중대한 업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대망어(大妄語)와 파화합승(破和合僧) 같은 근본 중죄는 주로 구업으로 행해지며, 나아가 구업은 행위 발생의 용이성, 시공간적 파급력, 집단적 왜곡과 교사(敎唆)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신업보다 오히려 더 광범위하고 치명적인 해악을 지닐 수 있다.

한편 의업(意業, 思業)은 내면의 작용이어서 외부에서 알아채기 어렵고 은폐되거나 오인되기 쉽다. 따라서 세속의 법이나 윤리에서는 그 의사가 구업이나 신업으로 밖으로 드러나 실질적인 해악이 발생했을 때에야 비로소 책임을 묻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불교의 근본 원리상 의업은 삼업 전체의 발원처이자 업의 본질이므로, 교학적·수행적 차원에서는 오히려 가장 엄중하게 다스려져야 한다.

(4) 표업(表業, vijñapti)과 무표업(無表業, avijñapti)

‘표업’이란 의도(思)가 신체 동작(신표업)이나 음성·문자(구표업)를 통해 외부로 드러나 타인에게 인식될 수 있는 가시적 행위 자체를 말한다.

불교 교학에서는 표업이나 강한 의도를 일으키는 즉시 행위자의 내면에 비가시적 업인 ‘무표업’이 형성된다고 본다. 이는 겉으로 표출되거나 인식되지 않으면서도 잠재적 에너지(습기·종자)의 형태로 지속되며, 유식학에서는 이를 아뢰야식에 훈습된 ‘종자(種子)’로 규정한다.

표업은 행위 당시에 일어났다 사라지지만, 무표업은 행위가 끝난 후에도 소멸하지 않고 상속(相續)되어, 자각 여부와 상관없이 끊임없이 세력을 유지·증장하다가 인연을 만나면 필연적으로 과보를 낳는다. 수계(受戒)나 선한 결의를 통해 형성된 선한 무표업(율의무표 律儀無表)은 ‘계체(戒體)’를 이루어 악을 막고 선을 북돋는 내적 방호벽 역할을 하지만, 악행이나 살생의 맹세를 통해 형성된 불율의무표(不律儀無表)는 행위자를 지속적인 악업의 굴레로 끌어당긴다.

(5) 별업(別業, Viśeṣa-karma)과 공업(共業, sādhāraṇa-karman)

불교는 업(業)의 발생 주체와 책임을 철저히 개인에 두어 "자작자수(自作自受)·자업자득(自業自得)"을 대원칙으로 삼는다. 힌두교의 브라흐만이나 유일신과 같은 초월적 실체를 부정하고, 자기 마음의 의도(思)는 스스로 결정한다는 주체적 원칙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는 개인이 타인을 도구로 이용하거나 협력하여 업을 짓는 경우, 다수의 존재가 집단적으로 함께 짓는 경우, 나아가 동일한 이념·가치·사회적 합의를 공유함으로써 집단 전체가 공동으로 형성하는 연대적 업과 그 과보에 대해서도 상세히 밝히고 있다.

별업의 과보는 개인의 수명·용모·지능·건강, 신체적 안락이나 고통 등 유정세간(有情世間)의 차별적 조건으로 나타나며, 이를 정보(正報)라 한다. 반면 개인들은 집단의 침묵, 선동에의 동조, 집단적 역사 왜곡 등과 같이 개별적 자업의 상호작용과 집단적 중첩을 통하여 공업(共業)을 형성한다. 공업의 과보는 특정 사회의 제도·문화·정치 체제, 나아가 인류가 공유하는 산하대지와 자연환경 등 기세간(器世間, 곧 삶의 터전)의 풍요나 황폐함으로 발현되며, 이를 의보(依報)라 한다. 개인은 국가의 흥망, 전쟁, 환경 재앙과 같은 집단적 공업의 환경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안에서 개인이 어떤 의도로 반응하고 처신하느냐에 따라 각자의 자업이 새롭게 직조되어 개별화된 과보를 받게 된다.

그 외에도 다수인이 관여하는 업의 실현 구조에 관하여는 정치한 교학이 성립되어 있는데, 현대에 이르러 서양법학계에도 깊은 사상적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6) 선업(善業, kuśala-karma), 불선업(不善業, akuśala-karma)과 무기업(無記業, avyākṛta-karma)

불선업은 탐(貪)·진(瞋)·치(癡)라는 세 가지 불선근(不善根)에 이끌려 지어 자신이나 타인 또는 양측 모두를 해치는 행위이고, 선업은 불선근이 없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참·괴, 慚·愧)과 타인을 향한 자비심이 동기가 되어 자타 모두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는 행위이다. 겉으로 선행의 외관을 꾸미더라도 내면에 탐욕이나 상대를 속이려는 기만(癡)이 깔려 있다면 불선업이 된다. 선업은 '낙과(樂果)'를, 불선업은 '고과(苦果)'를 낳는다. 대표적 악업은 살생(殺生)·투도 (偸盜)·사음(邪淫)·망어(妄語)인데 특히 망어는 거짓말 외에도 기어(綺語 꾸며대는 말)·양설(兩舌 이간질하는 말)·악구(惡口 악한 말)로 세세히 구분하고 있다..

현실 범부의 행위에는 선한 동기와 악한 동기, 혹은 이로움과 해로움이 뒤섞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잡염업(雜染業)’ 또는 ‘선악잡업(善惡雜業, 흑백잡업)’이라 한다. 그러한 경우 인과는 상쇄되지 않고 독립적이어서 각각의 과보를 따로 남긴다.

한편 오직 선한 의도만으로 선업을 쌓은 경우에도, 마음 밑바탕에 ‘나’라는 분별의식(아집)과 무명(無明)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상태라면 그 과보에 유한성이 있어 시간의 경과에 따라 낙과가 결국 소멸하게 되는데, 이를 ‘유루선업(有漏善業)’이라 한다.

그리고 의도(意圖)에 선·불선의 심소가 결합하지 않은 행위는 이숙과(윤리적 과보)를 낳지 않는데, 이를 무기업이라 한다. 도덕적 의도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단순한 생명 활동(호흡·수면·식사·감각기관의 단순 지각 작용 등)이나 기술적·기계적 일상 활동(威儀무기, 工巧무기 등)이 이에 속한다. 예컨대 의사가 의술을 시행하는 것은 대상자가 악인이더라도 무기업이지만, 그의 악행을 돕기 위하여 의도를 가지고 시행한다면 불선업이 된다.

2. 의사(Cetanā)와 업

(1) 체타나(Cetanā)

‘의사(意思)’ 또는 ‘사(思)’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는 ‘체타나(Cetanā)’로, 이는 불교에서 마음 활동의 중심을 이루는 핵심 개념이다. 불교 심식론(心識論)에서는 대상을 포괄적으로 인지하고 종합하는 마음의 주체 자체를 ‘심왕(心王)’이라 부르고, 그에 수반되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심리 작용들을 ‘심소(心所)’라 부른다. 여기서 심왕이 인식과 사유가 펼쳐지는 총체적 ‘장(場)’이라면, 체타나(Cetanā)는 마음을 특정한 대상과 목표를 향해 몰아가고 행위를 촉발하는 ‘조향 장치이자 추진 동력(구역심驅役心 또는 조작심造作心)’에 해당하며, 나머지 많은 심소들은 이러한 추동력 속에서 함께 결합하여 발현되는 세부적 심리 양상들이다.

체타나의 전통적 한역어인 ‘사(思)’는 현대어에서 단순한 ‘사색이나 생각(Thinking)’으로 축소 오해될 소지가 크므로, 그 본래적 역동성을 살려 ‘의도(意圖, Intention)’나 ‘의지(意志, Volition)’, 그리고 법학적 책임 귀속의 관점에서는 ‘행위의사(意思)’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이여, 내가 말하는 업(Kamma)이란 곧 체타나(Cetanā)이다”라고 선언하셨을 때의 체타나는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결과를 낳는 목적 지향적 의도이자 결단의 행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비달마(Abhidharma) 교학에서는 사람의 마음 활동 과정을 ‘수·상·행·식(受·想·行·識)’으로 세분하여 밝히고 있다. ‘수(受 Vedanā)’가 대상의 신호를 받아들여 고·락·불고불락을 느끼는 마음 활동이고, ‘상(想 Saññā)’이 그 신호를 기존 관념과 대조하여 대상을 식별하고 표상을 구성하는 과정이라면, ‘행(行 Saṅkhāra)’은 이를 기초로 하여 의사를 형성하는 능동적 과정이다. 이 행(行)의 단계에서는 많은 심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동하여 최종적인 심정 상태가 결정되는데, 이 전 과정을 주도하여 업(Kamma)이라는 구체적 결과로 귀결시키는 핵심 엔진이 바로 체타나이다.

감각 접촉(觸)에서 촉발된 수(受)와 상(想)은 ‘심려사(心慮思, 숙고)’와 ‘결탁사(結託思, 결단)’를 거쳐 ‘발동승사(發動勝思, 실행의지)’로 응집되고, 이를 통해 의업(意業)과 신·구(身·口)의 실천으로 이어져 삼업(三業)을 완성한다. 이 과정은 물리적·양자역학적으로 볼 때 뇌 신경망의 연산이 임계값을 돌파하는 과정이자, 미세소관 내부의 중첩된 확률적 가능성들이 시공간 기하학적 한계에 부딪혀 단 하나의 확정된 상태로 붕괴(객관적 수축, OR)하는 비가역적 과정이며, 의식은 바로 이 순간을 매개로 비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게 된다고 한다.

(2) 왜 체타나가 업인가?

업(kamma)은 체타나(cetanā, 思·의도)의 지휘를 받아 밖으로 표출되거나 내면에 남는 형성력이므로, 개념상 업과 체타나가 완전한 동치(同値)는 아니다. 그러나 체타나의 활동에 의해 완성된 행위만이 제8 아뢰야식에 업종자(業種子)로 훈습되어 인연에 따라 업력을 발휘하며, 체타나에 의하지 않은 단순한 물리적 결과는 업을 구성하지 않는 것이 부처님께서 깨우치신 마음의 법칙이다. 따라서 외도들의 기계적 결과책임주의와 같은 그릇된 견해를 파하고 주체적 의사책임을 밝히기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체타나가 곧 업”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과거의 업력은 지금 마주하는 환경과 치밀어 오르는 감정적 충동(과보)을 강하게 기울어지게 만들지만, 행위 자체를 100% 강제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화가 치미는 것’은 과거 업력에 따른 수동적 반응(등류과·이숙과)일지라도, ‘그 화를 밖으로 표출할 것인가, 알아차리고 내려놓을 것인가’는 현재 찰나에 사(思, 체타나)가 행사하는 능동적 결단이다. 과거의 오랜 습기(업력)는 깨어있는 알아차림(正念)이 느슨해지고 의사가 불분명해진 방일(放逸)과 몽롱함의 순간에 기본값(디폴트) 프로그램처럼 튀어나와 행위를 장악하므로, '무아(無我)와 공(空)'을 꿰뚫는 무루의 지혜(반야)를 증득해야만 비로소 잠재된 악업의 종자를 근원적으로 소멸시킬 수 있다.

인간은 단순한 우주의 먼지가 아니고, 무엇보다 인간의 사고는 뇌 속에 갇힌 고립된 사건이 아니다. 양자역학적으로는 우주 전체의 상태함수를 비가역적으로 갱신하는 물리적 사건이며, 유식학적으로는 기세간(물질세계)을 빚어내는 공업(共業)의 바다에 새로운 파동을 더하는 일이다. 홀로 방 안에서 일으킨 미세한 의도 하나조차 화엄의 인드라망 전체에 즉각 투영되며 아뢰야식에 온전히 갈무리된다. 외부의 어떠한 환경적 조건이나 조작도 궁극적으로 체타나의 자발적 결단과 그 우주적 발현을 절대적으로 제약할 수 없으며, 이 인과를 대행하거나 왜곡할 수 있는 절대자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한 번 지은 업의 이숙과는 그 과보를 온전히 감당해 냄(수과受果)으로써 소진된다. 그러나 과보를 겪는 순간 원망과 분노라는 ‘두 번째 화살’을 쏘아 올리면 또 다른 악업의 연쇄가 시작되며, 인과의 도리를 여실히 직시하고 담담히 수용(여리작의)할 때 비로소 업의 굴레가 완전히 끊어지게 된다.

(3) 체타나(Cetanā)의 스펙트럼과 책임의 한계

세속의 법률은 물론 고대 종교들도 오랫동안 외적 침해 결과나 자연적 인과관계를 기준으로 삼는 결과책임주의를 취해 왔다. 모세의 십계명 제10계명에 내면의 탐심을 경계하는 맹아가 있었으나, 기독교가 외적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내면의 의사를 근본으로 하는 책임주의를 온전히 천명한 것은 서기 1세기 예수의 가르침(산상수훈)에 이르러서였다. 7세기 이슬람 역시 “모든 행위는 오직 의도(니야, Niyyah)에 달려 있다”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선언을 통해 내면적 책임을 확립하였다. 반면 세속 법률제도에서는 근대 시민혁명과 계몽주의 법철학의 발전을 거치며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고의(Dolus)와 과실(Culpa)’을 핵심으로 하는 “책임 없으면 형벌 없다(Nulla poena sine culpa)”는 책임주의가 확고한 대원칙으로 정립되었다. 그러나 실무에서는 아직도 인간 인지능력의 한계와 입증의 곤란으로 인하여, 내심의 의사를 객관적 거동과 결과로부터 거꾸로 추단함으로써 실질적인 결과책임적 판단이 잔존하고 있다.

이에 반해 부처님께서는 이미 기원전 6세기에 체타나(cetanā, 思·의도)가 곧 업(kamma)의 본질임을 선언하셨을 뿐만 아니라, 체타나를 위시한 51(상좌부는 52)가지 심소(心所)의 역동적 작용과 그에 상응하는 정밀한 교학 및 율장(律藏) 체계를 완비해 놓으셨다.

① 현대 형법에서 벨첼(Hans Welzel)이 목적적 행위론을 바탕으로 정립한 ‘위법성의 착오(금지착오)에 관한 책임주의’의 원형을 불교 교학은 이미 2천여 년 전에 고도로 정교하게 완성해 놓았다.

② 겉으로는 죄의식이나 인식이 결여된 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이 내면의 사견(邪見)과 방일(放逸), 근본무명에 뿌리를 둔 것이라면 단순 과실이 아니라 통상의 고의보다 훨씬 중한 악업임을 밝혔다.

③ 책임능력에 관하여도 정신이상에 따른 발광(發狂, 미치광이)이나 감각·인지 기능의 상실인 근결(根缺) 상태에서의 행위는 원칙적으로 죄업의 성립을 조각하는 불범(不犯)으로 다루되, 스스로 자초한 원인에 있어서의 자유로운 행위나 귀책사유가 있는 심신장애와는 명확히 구별하였다.

④ 사실의 불인식이나 오인에 있어서도, 순수한 무지와 주의의무 위반에 불과한 단순 착오와 법규범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방일한 태도(법적대적 생활태도 및 회피 가능한 착오)로 인한 오인을 엄격히 판별하여 업의 성립과 과보를 달리하였다.

⑤ 심소(心所)별 주관적 불법 요소의 개별화: 탐(貪)·진(瞋)·치(癡), 만(慢), 의(疑) 등 개별 심소의 결합 양상과 의도의 강도(예비·모의·착수·완성)에 따라 불법성과 업의 무게를 정밀하게 차등화하였다.

⑥ 업의 강도와 이숙과는 [동기(思) × 가담도(加行) × 사후태도(後起)]라는 정밀한 내적 척도에 따라 세밀하게 차등 산정하고, 규범 위반에 대한 조치 또한 단순한 응보적 징벌에 머물지 않고 당사자의 참회(慙愧)와 공동체의 화합을 통해 업장을 소멸시키는 데 두었다(이는 현대의 회복적 사법(Restorative Justice) 및 치료적 사법(Therapeutic Jurisprudence)의 선구적 원형이다).

이처럼 인간 내면의 심리적 스펙트럼을 정밀하게 해부하여 그에 따른 도덕적·인과적 책임을 개별화하고, 행위자와 공동체 전체의 업장소멸을 지향한 불교 교학의 체계는, 외적 거동과 유형화된 고의의 틀에 갇혀 있는 현대 법학이 깊이 참구하고 배워야 할 규범적 자산이다.

3. 어떻게 살아야 하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업장의 바다를 건너 해탈로 나아가는 수행법이지, 탐진치의 번뇌를 충족하기 위한 초월적 기술이 아니다.

선업(善業)과 알아차림(正念)은 악업의 충동을 일시적으로 눌러두고(압복) 억제하는 강력한 방패이지만, 악업의 잠재 종자를 영구히 태워 없애는 것은 오직 '무아(無我)와 공(空)을 꿰뚫는 무루의 지혜(반야)'뿐이다.

나와 세계가 연기적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내가 지은 의도와 행위의 유일한 상속자가 나 자신임을 명확히 직시하는 정견(正見)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하여 무의식의 틈새에서 업력이 고개를 들 때 찰나의 사(思)를 포착하여 분노와 망상의 자동 실행을 차단하는 정념(正念)을 유지하고, 나아가 행위를 일으키는 배후의 아집을 지혜로 해체하여 업의 굴레를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것이 불자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만법귀일(萬法歸一)’이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관념적 수사로만 거론해서는 아무런 실익이 없다. 마음의 법정에서 바른 의지(思)를 세우고, 비가역적인 매 순간 지혜로 깨어있음으로써 과거 업력의 노예에서 벗어나 자기 존엄과 자유를 온전히 실현하는 우주적 주인이 되어야 한다.

짧은 소견으로 이러한 정법(正法)을 부정하고 거역하며 거리낌 없이 방종·막행막작(莫行莫作)하는 것은, 부질없는 탐진치에 이끌려 감당할 수 없는 파멸의 악업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한 공업(共業)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개별 존재들의 탐·진·치가 누적된 연기적 결과물이기는 하나, 개별 선업만으로는 해소하기 어려운 상태에 도달한 것이므로, 선근과 공덕을 일체중생에게 돌리는 회향(廻向)을 통하여 집단적 악업의 근본인 개별 이기심을 해체하고 연쇄적인 자비심과 참회의 인연을 일으켜 집단 전체의 의식 구조를 선업(善業)의 방향으로 전환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1)  “비구들이여, 의도가 업이라고 나는 말하노니 의도한 뒤 몸과 말과 마음으로 업을 짓는다”〔대림 역(2007), 『앙굿따라 니까야』 제4권, 초기불전연구원, 262면〕; “Cetanāhaṃ, bhikkhave, kammaṃ vadāmi. Cetayitvā kammaṃ karoti—kāyena vācāya manasā.”〔「꿰뚫음 경」(Nibbedhika Sutta, AN 6:63)〕; “어떻게 업을 알 것인가? 곧 사이업思已業과 사업思業이라는 두 가지 업이 있는 것을 말한다”〔김윤수 역주(2019), 『중아함경 Ⅲ』, 운주사, 제111 달범행경 263면〕, 

2)  “나는 내 업의 주인이고, 업의 상속자이며,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나의 친족이며, 업이 나의 의지처이다. 내가 선하든 악하든 어떤 업을 짓든 나는 그 업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 Nikāya)』 5:57 「숙고해야 할 법경(Upajjhaṭṭhāna Sutta)」〕, 〔대림 역(2007), 『앙굿따라 니까야』 제4권, 초기불전연구원, 174면〕; “저 모든 중생은 업으로 말미암고, 업을 상속하며, 업을 친족으로 삼고, 업으로 말미암아 태어나며, 업에 의지한다. 자기가 지은 업에 따라 선(善)함이든 악(惡)함이든 각자가 그것을 받는다.(彼衆生者,因業、業相續、業分、業生、業依。隨業所作,有妙有惡,各自受之)”.〔김윤수 역주(2019), 『중아함경 Ⅳ』, 운주사, 제170 앵무경 425면 등〕, 

3)  붓다는 세계의 영원성이나 영혼과 육체의 동일성 여부 등 해탈과 청정범행에 직접 도움 되지 않는 형이상학적 14가지 질문(14무기, 十四無記)에 대해 침묵하셨다(『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āya)』 제63경 《말룽꺄뿟따 경(Cūḷamāluṅkya Sutta)》의 '독화살의 비유'); 김윤수 역주(2019), 『중아함경 Ⅴ』, 운주사, 제221 전유경 590~599면에는 “ ‘세상은 무상한가, 끄티 있는가 등 14가지 질문에 단적으로 말해 주시지 않는다면 범행을 배우지 않르리라’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 어리석은 사람은 결국 알지 못한 채 그 중간에 목숨을 마칠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4)  불교 유식학(唯識學)과 연기론적 관점에서는 업(業, Karman)은 즉각 외계(外界)에 변화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행위자의 마음 상태를 변화시키고(현행), 그것이 잠재적 에너지로 남아 후속 결과를 이끈다. 즉, 신(身)·구(口)·의(意)로 업을 짓는 즉시 표층 의식(전6식/말나식)에 변화가 일어나며, 이 순간의 행위와 심리 상태는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잠재적 씨앗(種子, 즉 업력)으로 각인된다(이를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라 함).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력은 즉각적인 과보를 내지 않더라도 무의식의 영역에서 찰나마다 지속적으로 계승·유지되며 세력을 형성하다가(種子生種子), 훗날 적절한 인연(조건)을 만났을 때 비로소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성향 혹은 과보(고락의 경험)로 다시 표출된다(種子生現行)고 본다. 이것은 현대 뇌신경과학의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 및 시냅스 가소성(Synaptic Plasticity)으로 진실임이 밝혀지고 있다. 마음을 일으키고 말을 하며 몸을 움직이는 행위를 하는 순간, 뇌의 신경망 구조는 실시간으로 재배선(Rewiring)되어 다음번에 동일한 생각이나 행동을 훨씬 더 쉽게(자동 반사적으로) 일으키도록 뇌의 '기울기(습기, 習氣)'를 형성한다. 나아가 이러한 자극이 반복되면 유전자 발현과 단백질 합성이 유도되어 장기 강화(LTP, Long-Term Potentiation)로 이어지며, 뇌에 영구적인 '물리적 고속도로(습관 회로)'가 구축된다.

5)  ① 사용과(士用果-즉각적·동시적 결과): 행위자가 그 행위를 행함과 동시에 직접적으로 달성하거나 수반되는 즉각적인 효과 ② 증상과(增上果-외적 환경적 과보): 개인의 업력이 자신이 처하게 되는 물질적 환경, 사회적 관계, 주변 여건 등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결과 ③ 등류과(等流果-지속적·성향적 과보): 계속적으로 발생하는 효과로서 진등류(眞等流-한 번 화를 내거나 집착하면 그 심리적 관성이 아뢰야식에 훈습되어, 미래에도 유사한 분노나 집착을 훨씬 더 쉽게, 반복적으로 일으키게 되는 성향적 지속성), 가등류(假等流-남을 해치는 업을 지으면 수명이 짧거나 병이 잦아지는 등, 행위의 성격과 유사한 신체적·환경적 결과가 다발적으로 이어짐)가 있다. ④ 이숙과(異熟果-단발·기간 한정적 과보): 일정한 생애 주기나 기간을 거쳐 익어서 나타나는 효과로서 다음 생의 태어남(총보)이나 생물학적 조건 등 존재의 기본 틀을 결정한다.      하나의 행위는 단순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의식의 기저에 '습관화된 에너지'를 남기는데, 이 습기는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 속에서 지속적으로 작동하여 생각의 패턴, 가치관, 반응 방식을 지배한다(熏習).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의 씨앗(種子)은 한 번에 다 타버리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다양한 조건(緣)을 만날 때마다 여러 형태의 고락(苦樂)과 심리 현상으로 반복 발현된다(緣起).

6)  '니야마(Niyāma)'는 팔리어로 '불변의 질서', '정해진 법칙', '필연적 규칙'을 뜻하는 말이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이 겪는 모든 고락(苦樂)과 질병, 재난은 과거 생의 업(Kamma)에 의해 100%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극단적 숙명론(숙작인론, 宿作因論)을 삿된 견해로 배척하셨다. 예컨대 감기에 걸리거나 자연재해를 겪는 것은 과거 악업 때문만이 아니라, 기후 변화(Utu)나 신체적 불균형(Bīja)이라는 물리·생물학적 조건이 복합 작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후대의 상좌부 교학에서는 '업(Kamma)'을 우주의 5대 질서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며, 다음과 같은 '5종 니야마' 체계를 정립하였다. ① 우투 니야마(Utu-niyāma, 물리·기후적 질서): 무기물, 계절의 순환, 지진, 기후 등 자연물리적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 ② 비자 니야마(Bīja-niyāma, 식물·생물학적 질서): 생명체의 발생과 성장, 유전 등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지배하는 법칙 ③ 칫타 니야마(Citta-niyāma, 심리·인식적 질서): 감각 접촉에서 인지와 사유로 이어지는 마음과 마음부수의 작용 법칙 ④ 깜마 니야마(Kamma-niyāma, 도덕·행위적 질서): 의도적 행위(업)와 그에 따른 고락의 과보(이숙과) 사이의 인과법칙 ⑤ 담마 니야마(Dhamma-niyāma, 보편적 자연법칙·초월적 질서): 삼법인(三法印), 12연기, 붓다의 탄생과 열반 시 나타나는 천지진동 등 우주의 근본적 존재 법칙과 불법(佛法)의 절대적 질서    이러한 교학은 5세기경 붓다고사(Buddhaghosa)의 주석서인 『앗타살리니(Aṭṭhasālinī, 아비담마상가니 주석서)』에서 체계적으로 정립되었으며, 근세 미얀마의 대석학 레디 사야도(Ledi Sayadaw)의 저서 『니야마 디파니(Niyāma Dīpanī, 英題: Manual of Cosmic Order)』를 통해 세계 불교계에 널리 전파되었다.

7)  세속의 제도에서는 선업이나 악업을 지어도 권력과 세력을 쥔 자에 의해 평가되고 조치되어야만 비로소 결과가 발생한다. 처음부터 이해관계자들이 사실관계를 왜곡하여 주관적으로 인식하기도 하고(영화 ‘라쇼몽’의 사례처럼), 사실이 조작되거나 평가가 뒤집히는 일도 적지 않으며, 증거가 없다면서 존재하지 않는 일로 치부하기도 한다. 나아가 특정 정치·이념 세력들은 역사적 주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적 상대주의를 방패삼아 객관적 사실을 왜곡하고 역사를 자의적으로 날조하기까지 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 교학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는 의도(思)를 일으키는 즉시 마음에 훈습(熏習)되어 새겨지고, 그 업의 기록은 우주적 질서(법계)에 고스란히 각인되어 필연적으로 과보를 유발한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법(연기·인과법)은 여래가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변함없이 상주(常住)한다고 설하셨으며, 서구의 자연법론자들 또한 실정법을 초월한 영구불변의 보편적 법질서로서 이와 같은 진리가 항상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8)  『법구경(Dhammapada)』 제165게송: “스스로 악을 행하여 스스로 오염되고, 스스로 악을 짓지 않아 스스로 청정해진다. 청정과 부정은 오직 자신에게 달렸으니, 남이 남을 맑게 할 수 없다”.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 Nikāya)』 3:61 「외도의 견해 경(Tittha Sutta)」(대림 역, 『앙굿따라 니까야』 제2권, 142~147면)에는 유일신·자재천의 창조설(Issaranimmāna-vāda)이나 숙명론을 ‘개인의 주체적 의지와 행위 책임을 파괴하는 그릇된 견해’로 명백히 배격하고 있다. 

9)  현대 자연과학에서는 물리적 인과의 폐쇄성 원리(물리학), 의도와 의지 작용의 뇌 내재적 발생 기제(신경과학), 도덕적 상호작용의 자연선택적 적응(진화생물학), 그리고 하향식 설계자 없는 자기조직화(복잡계 과학)를 통해 우주와 인간 의식의 인과율을 설명한다. 따라서 초월적 절대자가 물리 세계에 개입하여 질서를 창조하거나, 외부의 힘이 개체의 자율적 신경 메커니즘을 배제한 채 도덕적 책임(업)을 인위적으로 주입·조작한다는 가설은 현대 과학의 실증적 인과 체계에 배치되는 것으로서 원천적으로 배격한다.

10)  불공업(不共業, Asādhāraṇa-karman)이라고도 하고, 과보의 귀속관계에서 자업(自業, āveṇika-karman)으로 부르기도 한다.

11)  경전에는 모든 중생이 공유하는 우주·천체·산천·기후 등 물리적 자연환경과 사회 제도·국가 환경을 이루는 기세간(器世間, Bhājana-loka)은 그 세상에 태어난 생명들의 ‘공통된 업(공업, 共業)’의 과보인 증상과(增上果)로 건립된 결과물이라고 설해져 있다.〔김윤수 역주(2019), 『장아함경 Ⅰ』, 운주사, 47면 이하; 동, 『장아함경 Ⅱ』, 295~296면; 각묵 역(2006), 「세기경(Aggañña Sutta)」, 『디가 니까야』 제3권, 초기불전연구원, 172~173면 등〕. 세간(世間, Loka)이란 시간(世)과 공간(間)의 결합을 뜻하는 말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조건 지어져 흘러가는 모든 현상계(물리적 환경과 그 안의 생명체)’를 의미한다. 부처님께서는 “무너지고 변하는 것(Lujjati)을 일러 세간(Loka)이라 한다.”라고 하셨다.

12)  불교 교학은 근현대 형법학이 발전시킨 간접정범, 공동정범, 교사·방조범에 상응하는 정밀한 공범 이론을 일찍이 독자적으로 확립하였다. 이러한 교학은 근현대 독일 형법학의 행위론(목적적 행위론 등) 형성기에 하이데거(M. Heidegger), 하르트만(N. Hartmann) 등의 존재론 철학을 매개로 깊은 사상적 통찰을 제공하였으며, 최근에는 명상과 불교 심식론을 연구•수련한 국내외 법학자들(대표적으로 Leonard Riskin, Charles Halpern, Rebecca Redwood French 등)에 의하여 사법 이론과 법철학의 지평을 넓히는 데 본격적으로 참고되고 있다.    그러나 교사범의 악의와 주도성을 근본적으로 파악하여 때로는 정범보다 교사자의 죄책을 더 무겁게 평가하는 점(교사자·선동가는 실행자를 능가하는 탐욕·권력욕·치밀한 사견에 기반하여 타인의 심성까지 오염시키는 이중의 악업을 지으므로, 과보의 지속성과 무표업의 강도 측면에서 내적으로 더 무겁고 파괴적인 악업을 형성한다는 견해에 근거한 것이며, 이는 신분관계에 따른 가중을 규정한 한국 형법 제34조 제2항의 취지와는 궤를 달리한다), 그리고 타인의 악행을 기뻐하고 칭찬하는 ‘수희찬탄(隨喜讚歎)’이나 이에 논리를 제공하여 합리화하는 ‘수악(隨惡)’까지도 심리적 공범(종범)의 한 유형으로 포섭하여 과보를 인정하는 점 등은 현대 형법학이 미처 다 알지 못하는 불교 심식론(心識論)만의 독보적 통찰이다.

13)  선업(善業)에는 다음과 같은 낙과(樂果)가 있다. ① 사용과(士用果)로서 즉각적으로 마음의 평안·신뢰·성취 등의 직접적 결실을 얻고, ② 증상과(增上果)로서 풍요롭고 안전하며 평화로운 사회·자연환경을 얻으며, ③ 등류과(等流果)로서 선한 성품·자비심·지혜로운 습관이 다음 순간과 다음 생으로 지속·강화되는 과보를 얻는다. 또한 ④ 이숙과(異熟果)로서 내생에 인간계나 천상계와 같은 선취(善趣)에 태어나 건강·장수·복락 등 안락한 신체적·정신적 조건을 받고, 필경에는 ⑤ 이계과(離繫果)로서 무루(無漏)의 선업을 통해 번뇌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는 궁극적 결과를 얻는다.    특히 무표선업(無表善業)에는 계체(戒體)가 수반되어, ① 잠을 자거나 다른 생각을 하거나 멍한 상태(무심 상태)에 있을 때도 선업의 세력이 쉬지 않고 매 순간 증장하고, ② 잠재된 선의 규제력이 심리적 방어벽으로 작용하여 유혹이나 분노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 악행으로 빠져드는 것을 억제하며, ③ 죄책감과 후회가 사라져 떳떳함과 심리적 안정감이 지속되고, ④ 깊은 삼매(선정)와 통찰지(지혜)가 계발되며, ⑤ 내생에 뛰어난 복덕과 지혜를 갖춘 과보를 얻도록 견인하는 공덕이 있다.

14)  ① 아픈 사람을 살리려 지극한 정성으로 약을 달여 주었으나, 체질이 맞지 않아 도리어 병세를 악화시킨 경우는 악업(의업)의 과보를 받지 않는다. ② 경쟁자를 파멸시키려는 악의(瞋)로 특정 사업을 방해했으나, 우연히 그 덕분에 상대방이 더 큰 사기 피해를 피하게 된 경우는 마음에 악업으로 기록되며, 선한 공덕은 돌아오지 않는다. ③ 가족 부양을 위해 악업을 짓거나, 공익을 위한 대의명분으로 특정 집단을 향해 극단적인 증오와 폭력(악심)을 행사하는 경우와 같이 의도에 선악이 혼합되어 있는 때에는 그 과보가 혼합되어 나타난다. 예컨대 인생의 어느 시기에는 선업의 과보로 큰 재물과 명예를 누리지만, 다른 시기에는 악업의 과보로 극심한 질병이나 배신·몰락을 겪을 수 있다. 베풀기를 좋아했으나 지혜가 없고 계율을 어기며 어리석게 산 경우에는 호화로운 대저택에서 보살핌을 받는 애완동물로 태어날 수 있고, 보시의 선업을 베풀었지만 남을 핍박했던 악업을 지은 과보로는 막대한 부를 가졌으나 극심한 불안과 질병에 시달리는 부자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15)  심소의 구체적 내용에 대하여는 『구사론(俱舍論)』과 대승 유식학 간에 일부 차이가 있다. 대승에서는 모든 마음(心王)이 일어날 때 항상 함께 발생하는 변행(遍行) 심소로 작의(作意)·촉(觸)·수(受)·상(想)·사(思체타나)의 5가지, 특정한 인식 과정에서 일어나는 별경(別境) 심소로 욕(欲의욕)·승해(勝解확신)·염(念기억 알아차림)·정(定삼매)·혜(慧지혜)의 5가지, 맑고 청정한 선(善) 심소로 신(信)·참(慚)·괴(愧)·무탐(無貪)·무진(無瞋)·무치(無癡)·근(勤정진)·경안(輕安)·불방일(不放逸)·행사(行捨평정)·불해(不害자비)의 11가지, 근본번뇌(根本煩惱) 심소로 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6가지, 근본번뇌에서 파생된 수번뇌(隨煩惱)로 분(忿)·한(恨)·뇌(惱괴로워함)·복(覆숨김)·광(誑속임)·첨(諂아첨)·교(憍교만)·해(害)·질(嫉질투)·간(慳인색)·무참(無慚)·무괴(無愧)·도거(掉擧들뜸)·혼침(惛沈)·불신(不信)·해태(懈怠)·방일(放逸)·실념(失念망각)·산란(散亂)·부정지(不正知그릇된 앎)의 20가지, 그리고 선도 악도 정해지지 않은 부정(不定) 심소로 수면(睡眠)·악작(惡作후회)·심(尋일으킨 생각)·사(伺지속적 고찰)의 4가지를 들어, 총 6위 51가지 심소를 논한다.

16)  호법(護法) 등 지음•현장(玄奘) 한역•김묘주 번역, 『성유식론(成唯識論』 권3

17)  R. Penrose, Shadows of the Mind (Oxford Univ. Press, 1994), pp. 348~392; S. Hameroff & R. Penrose, "Consciousness in the universe: A review of the ‘Orch OR’ theory", Physics of Life Reviews 11(1), 2014.

18)  『법구경』에는 안질로 장님이 된 짝쿠팔라(Cakkhupāla) 스님이 포행 중 벌레를 보지 못하고 밟아 죽인 일로 문제가 되었을 때, 부처님께서는 벌레를 죽이려는 '의도(Cetanā)'를 냈는지를 확인한 뒤 "의도가 없는 행위는 업을 짓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는 자이나교의 결과책임주의•푸라나 캇사파의 도덕부정론•막칼리 고살라의 숙명론과 완전히 다른, 인간의 도덕적 주체성과 책임성의 근원이 되는 가르침이다.〔김윤수 역주(2019), 『중아함경 Ⅲ』, 운주사, 제133 우바리경, 482~483면〕.

19)  『능엄경』의 ‘칠처징심(七處徵心)’은 마음의 소재(所在)가 몸의 안이나 밖, 감각기관 등 일곱 곳 어디에도 국한되지 않음을 낱낱이 설파하여, 마음이 시공간에 갇힌 고립된 실체가 아니라 경계(대상)와 둘이 아닌 우주적 연기(緣起)의 장(場)에서 작용함을 밝히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이를 “세계의 영원한 신비는 그것이 이해 가능하다는 점이다. ... 세계가 이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일종의 기적이다.”라고 표현했다.(1936년 논문 「물리학과 실재(Physics and Reality)」). 이러한 연기적 진실에 비추어 볼 때, 객관적이고 명백한 사실조차 사법적 강제를 거쳐야만 마지못해 인정하거나 나아가 사실 자체를 자의적으로 날조하는 행위는, 우주적 인과망과 진실의 무게를 외면한 어리석음의 극치로서 결코 그에 따른 인과적 파탄을 면할 수 없다.

20)  대표적으로 ① 옛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라고 하였으나,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고,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제단에 제물을 바치려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면, 제물을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고 난 뒤 제물을 바쳐야 한다”. ②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③ 옛사람은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고 하였으나, 하늘이나 땅, 예루살렘, 자신의 머리카락 하나도 희고 검게 할 능력이 없으므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④ 구제할 때 외식하는 자처럼 나팔을 불지 말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⑤ 회당과 큰 길가에 서서 기도하지 말고,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⑥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등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접한 책임주의를 표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상진|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검사 생활을 했고, 서울시립대 법학과 교수 및 동 대학 로스쿨 원장, ‘법조불교인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변호사, ‘헌법을생각하는변호사모임’ 명예회장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불교와 자유민주주의』 등이 있다.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