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숨어있다 / 의정부 회룡사
인조반정의 숨은 조력자, 비구니 예순 스님의 삶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왕이 폐위되고, 새로운 임금이 왕위를 차지한 것은 중종반정과 인조반정 딱 두 번이었다. 중종반정 당시 반정을 일으킨 신하들은 연산군의 이복동생이자 자순대비의 하나뿐인 아들 진성대군에게 군사를 보내 상황을 이야기했다. 반정 직후 연산군은 아무런 저항 없이 옥새를 내어주었고, 바로 그날 진성대군은 익선관에 곤룡포 차림으로 왕위에 올랐다. 반면 인조반정은 훨씬 아슬아슬했다. 거사 당일 인조는 직접 군사를 이끌었는데 광해군이 이미 반정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 군사들은 크게 동요하며 집 밖으로 나오지 않기도 했다. 만약 반정이 실패한다면 동참한 모두가 역모죄로 처형될 것이 분명했다. 이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인조반정의 성공을 만든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비구니 ‘예순’이다.
인조반정의 조건 – 숭용산림과 국혼물실
인조(능양군)는 제14대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의 손자로 광해군 재위 시절 그의 숙부 의창군은 역모에 휘말려 유배되었고, 막내 남동생 능창군 또한 유배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게다가 광해군은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다는 풍문을 듣고 집을 빼앗기까지 했다. 계속된 비극을 견디지 못했던 정원군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인조에게 남은 길은 반정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조에게 그를 도와줄 만한 세력도, 자본도, 군사도, 힘도 없었다. 인조는 광해군 시절 실각하여 재야에 머물던 서인의 지지를 받기 위해 두 가지를 약속했다. 반정이 성공하여 광해군이 폐위되고 자신이 왕위에 오른다면 반정에 동참한 서인을 융숭하게 요직에 등용하여 장차 집권 여당의 자리를 서인에게 주겠다는 ‘숭용산림’과 왕비와 세자빈 간택 등 왕실과의 혼인은 서인 가문 출신의 여식으로 선택하여 외척의 지위를 보장한다는 ‘국혼물실’이었다. 실제로 인조반정 이후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집권 여당의 자리는 서인을 뿌리에 둔 노론이 차지하였다.
이상적인 도반을 만난 부부
비구니 ‘예순’의 본명은 이여순으로 실록에 기록이 남아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인 이귀의 딸이며 2등 공신이자 제17대 효종 대에 영의정을 역임했던 이시백의 여동생이다. 이귀는 서인의 종주인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제자였으며, 이시백은 영의정을 역임하며 청백리로 명성을 떨쳤으니 명실상부한 명문가였다.
당당한 공신 출신 명문 사대부 가문의 여식 이여순은 어떻게 비구니가 된 것일까. 그녀가 불교에 귀의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결혼 이후였다. 어릴 때부터 문자를 익히고 책을 가까이했으며 총명하고 아름다웠던 이여순은 15살 때 김자겸과 혼인하였다. 김자겸은 인조반정 1등 공신 김자점의 형으로 출세보다 불도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결혼 후 아내 이여순과 불교에 매진하여 성취를 이루었는데 부부와 함께 경전을 논의하며 선(禪)을 연구한 절친한 벗이 있었으니 오언관이었다.
세 사람은 함께 불교를 공부하는 도반이었으나 선조41년, 김자겸과 사별하면서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주었던 든든한 방패를 잃게 되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김자겸은 친구 오언관에게 ‘내 아내가 나보다 나으니 내가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자네는 혐의하지 말고 내가 있을 때처럼 서로 찾아 불도를 논하라’는 말을 남겼고, 아내 이여순에게는 ‘나는 그대와 같은 아내가 있고 오언관과 같은 벗이 있으니 일생의 행복이다.’라고 하였다. 나를 알아주는 벗이 있고, 나를 알아주는 아내가 있었기에 비록 짧은 생이었으나 김자겸은 행복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왕실 여인들의 의지처가 되다
이여순과 오언관은 김자겸의 뜻을 이어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거리낌 없이 집을 드나들며 함께 불교 공부에 매진하였다. 이후 이여순은 오대산에 비구니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출가를 결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광해군 6년, 오언관이 산수가 수려하고 고요한 곳을 찾아 은거할 계획을 말하니 함께 떠나고자 했다. 두 사람은 속세의 신분과 성별을 뛰어넘어 마침내 길을 떠났는데, 이때 이여순의 곁에는 3년째 그녀를 제자처럼 따랐던 ‘정이’가 있었다.
오언관 그리고 정이와 함께 한양을 떠난 이여순은 덕유산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그녀의 간절한 바람을 이루고 비구니가 되어 출가하였다. 이여순은 법명을 ‘예순(禮順)’이라 하였고 이미 출가자나 다름없는 세 사람은 토굴에서 함께 지내며 불도에 매진하였다. 하지만 남녀유별과 속세의 경계를 추월한 이들의 관계를 의심한 마을 사람들에 의해 안음 현감에게 체포되었고 다시 한양으로 끌려와 국문을 받게 되었다.
임금 광해군 앞에서도 오언관과 이여순, 정이는 한목소리로 간통 사실을 부인하였으나 결국 오언관은 처형되었다. 그 후 이여순과 정이는 옥에 갇혔다가 풀려났고 이여순은 무수리가 되어 궁중에서 허드렛일하는 벌을 받게 되었다. 비록 무수리로 신분이 강등되었으나 이여순의 뛰어난 기품과 외모 그리고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학식은 이내 궁중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광해군의 시대는 역모와 국청이 끊이지 않던 공포의 시대였다. 국문을 받으면서도 한 치의 두려움이나 흐트러짐이 없었던 이여순의 존재는 궁중 여인들에게 작은 의지처 역할을 했다. 그러던 중 이여순은 광해군의 비선 실세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상궁 김개시의 눈에 들게 된다. 김개시는 이여순을 귀하게 여겨 그녀를 양녀로 삼으며 총애를 아끼지 않았다.
비구니 예순의 행적
1623년 인조반정 직전, 정보가 누설되어 광해군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여순은 김개시를 설득하여 아버지 이귀 등의 처벌을 막아냈다. 김개시가 이귀 등의 행적을 변명하자 그녀를 신뢰한 광해군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고 덕분에 반정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인조반정의 성공 이후 이여순은 그 공을 인정받아 궁중의 내불당 자수궁 불사를 비롯하여 왕실의 지원을 받으며 비구니로서 당당하고 온전한 삶을 시작하며 새로운 길을 걸었다.
인조 즉위 이듬해 비구니 예순은 인목대비(제14대 선조의 계비이자 제15대 광해군의 계모. 선조의 적장자 영창대군의 모친)의 명을 받아 비구니 사찰인 청룡사 불사를 담당하였다. 청룡사 불사를 끝낸 후 강화도에 있던 영창대군의 위패를 모셔와 청룡사에서 천도재를 지냈다. 광해군 6년, 유배지 강화도에서 죽임을 당한 영창대군의 천도재는 인목대비의 깊은 한을 풀어주었다.
그 후 왕실 밖으로 걸음을 옮긴 비구니 예순은 인조 8년, 회룡사의 주지가 되어 사찰을 중창했다. 회룡사는 본디 의상대사가 창건한 ‘법성사’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그의 스승이자 왕사(王師)였던 무학대사의 인연이 깊은 곳이었다. 1400년, 왕자의 난을 주도하며 이복동생 이방석과 이방번 등을 죽인 이방원이 제3대 왕으로 즉위한 후 이성계는 함흥에 머물며 아들이 사신을 보낼 때마다 족족 화살을 쏘았다.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함흥차사’라는 말이 이때 만들어졌다. 한동안 분노를 다스리지 못했던 이성계가 마침내 함흥을 떠나 한양으로 향하는 길, 무학대사가 머물던 법성사를 방문하자 무학대사는 이성계가 돌아온 것을 ‘회란용가(回鸞龍駕)’라고 하며 기뻐했다. 이후 법성사는 ‘회룡사(回龍寺)’로 불렸다고 한다.
인조반정 이후 왕실의 지원을 받아 내불당 자수궁, 동대문 청룡사, 의정부 회룡사 등 불사에 전념하던 비구니 예순은 효종 8년, 승려가 된 지 47년, 세수 71세의 나이로 청룡사에서 입적하였다. 15살의 새색시가 남편과 불도를 닦고 사별한 후 어려움 끝에 반백 년 가까운 세월을 비구니로 떳떳하게 살아가며 천수를 누리고 이름을 남긴 것은 조선을 통틀어서 참으로 희유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조민기|한양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했다. 영화사를 거쳐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근무하다가 칼럼니스트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현재는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조선임금잔혹사』,『3분만에 읽는 조선왕조실록』,『부처님의 십대제자–경전 속 꽃미남 찾기』, 『범일국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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