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된 자아가 없는데, 무엇이, 어떻게 윤회하나?

[불교의 오래된 질문, 무아와 윤회]



1. 들어가는 말

무릇 산 것은 생존을 추구한다. 진시황뿐만 아니라 현대인도 불로초와 영생을 꿈꾸고 있으며, 사후생에 관련된 신앙 또한 여전히 뿌리 깊다. 부처님께서는 이에 관하여 ‘윤회와 과보’라는 실상으로 분명하게 가르치셨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으면 그뿐, 사후생 같은 것은 없다’는 유물론적 단멸론이나, ‘불멸의 영혼’을 전제하는 아브라함계 종교 및 힌두교의 견해가 세상에 훨씬 널리 유포되어 있다. 과연 윤회는 실재하는가? 그리고 고정된 자아가 없다면,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윤회한다는 말인가? 윤회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2. 윤회에 관한 불교교리

(1) 윤회의 개념

윤회(輪廻)로 번역된 산스크리트어 ‘삼사라(Saṃsāra)’의 자의(字義)는 ‘함께 흘러감’, ‘끊임없이 배회하며 방황함’이다. 생명체가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여 열반(Nirvāṇa)에 이르기 전까지, 자신이 지은 업(業, Karma)의 인과법칙에 따라 생과 사를 무한히 반복하는 실존적 굴레를 뜻한다.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처럼 '수레바퀴(輪)가 끊임없이 구르고 돈다(廻)'는 의미를 담은 ‘윤회(輪廻)’는 적절한 번역어라 할 수 있다.

(2) “나라는 실체(我)가 없다면, 무엇이 다음 생으로 건너가나?”

흔히 윤회를 ‘불변하는 영혼’이 낡은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과정으로 말한다. 그러나 붓다는 영혼의 영속성을 주장하는 상견(常見)과,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단견(斷見)을 모두 단호히 배격하고 윤회의 실체를 ‘연기적 인과율(緣起性)’로 해명하셨다.

사후로 건너가는 것은 불변의 영혼이 아니다. 붓다는 생명의 실상을 ‘잠시의 쉼도 없이 거세게 흘러가는 산골짜기의 급류(nadīsoto)’에 비유하셨다2). 강이라는 고정된 존재는 없고, 실재하는 것은 끊임없이 흐르는 물방울들의 연속 작용뿐이듯, 생명 역시 찰나마다 생멸하는 오온(색·수·상·행·식)의 흐름일 뿐이다. 이 거센 물살을 다음 생으로 밀고 가는 동력은 영혼과 같은 어떤 존재가 아니라 평생에 걸쳐 쌓아온 ‘업의 관성(갈애와 습기)’이다. 초기 불교에서 말하는 '식의 흐름(Viññāṇasota)' 또는 유식에서 말하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의 종자’처럼, 내가 지은 행위와 사유의 패턴, 그리고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맹목적인 생존 갈망(有愛)’이라는 에너지가 응축되어 다음 조건을 촉발한다. 즉, 옮겨가는 주체는 없고 지어놓은 인과의 힘만 남는 것이다. 먼 바다의 물 분자가 해변까지 직접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가 물결이라는 파동을 통해 전달되어 해변의 모래를 때리듯, 사후생의 이전은 ‘물질이나 자아의 이동’이 아닌 ‘업이라는 파동의 상속’이라는 것이다.

(3) 어떻게 이전하나?: 실체의 이주가 아닌 ‘조건적 점화와 공명’

실체가 건너가지 않는 윤회의 메커니즘에 대한 명쾌한 설명은 기원전 2세기경의 『밀린다왕문경(Milindapañhā)』에서 나가세나 존자가 밀린다 왕에게 설한 ‘등불’, ‘제호(醍醐, sappimaṇḍa: 정제 버터)’의 비유에서 찾아볼 수 있다3). 한 등불에서 다른 등불로 불이 옮겨붙을 때 앞선 불꽃 자체가 뒤의 등불 속으로 들어가 계속 타는 것이 아니라 앞선 불꽃의 열기와 조건이 닿아 새로운 불꽃이 피어오를 뿐이다. 또한 제호는 우유를 바탕으로 하여 순차적으로 변화해 생겨난 것이지만 우유 자체는 아니다. 이처럼 전생과 내생의 존재는 ‘동일한 것도 아니요(不一), 완전히 별개의 것도 아니며(不異)’, 고정된 영혼(ātman)이 있어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청정도론(Visuddhimagga)』에서는 이를 ‘골짜기의 메아리(響)’, ‘인장과 인영(印印)’, ‘거울의 영상(鏡像)’ 등에 비유한다. 소리가 전달될 때 입 앞의 공기 입자가 저편 절벽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파동의 에너지만이 전달되어 고막을 진동시키듯, 어떤 물리적 실체가 전생에서 내생으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4).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이러한 흐름을 두고 한 생의 마지막 마음인 사식(死識, cuti-citta)이 멸하는 바로 그 찰나에, 갈애의 에너지가 그에 감응하는 모태의 조건과 결합하여 다음 생의 첫 번째 마음인 결생식(結生識, paṭisandhi-citta)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설일체유부와 대승불교는 ‘중유(中有, antarābhava: 죽은 뒤 다음 생을 받기 전까지의 중간 상태)’라는 개념을 통해 무아윤회의 메커니즘을 한층 정밀하게 보완하였다5). 중유는 거친 육신이 해체된 후 미세한 물질과 업식(業識)이 유지되는 동적 흐름으로서, 업의 고유한 지향성에 따라 시공간의 간극을 넘어 자신과 주파수가 맞는 새로운 부모와 수정란의 조건(연, 緣)에 감응하여 결합한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이 고정된 영혼이라는 알맹이는 없지만, 원인과 조건에 따른 인과의 연속성이 엄밀하게 성립하는 윤회가 이루어진다. 다만 윤회에서 상속되는 것은 이러한 물리적 비유들에 내포된 기계적·물질적 속성이 아니라, 갈애(渴愛)와 지혜의 결여(무명)로 인해 유지되는 ‘정신적 흐름(심상속, 心相續)’이자 ‘축적된 업의 형성력(saṅkhāra)’이다.

3. 윤회에 관한 논의

(1) 불교의 윤회교리와 과학

부처님이 가르치신 윤회의 실상은 자아가 영속하기를 바라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에 맞지 않고, 쉽게 이해되지도 않으며, 직접 실행해 보거나 기억해 내거나 제3자가 관찰하여 증명하기도 어렵다. 이 때문에 윤회의 교리는 지옥도 등을 앞세워 공포를 조장하고 기복과 물질 보시를 강요하는 미신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근세의 기계론적 유물론 역시 "의식은 뇌의 부산물에 불과하므로 뇌가 멈추면 완전히 소멸하며, 신체 외부로 이어지는 의식의 흐름(상속)은 측정이 불가능하므로 비과학적"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그러나 현대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불교가 통찰한 ‘존재의 실상(연기·무상·무아)’이 과학적 진실과 놀라울 정도로 부합함을 증명해 가고 있다. 양자역학은 소립자가 독립된 고정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입자 및 관측계와의 ‘상호작용(관계)’ 속에서만 확률적으로 상태가 결정된다는 점을 밝혔고, 뇌과학은 뇌 어디를 열어보아도 기억과 판단을 총괄하는 ‘단일한 영혼이나 자아(호문쿨루스)’는 없으며 수천억 개의 뉴런과 시냅스가 신호를 주고받는 병렬적 연산 과정만 존재함을 확인했다. '나'라는 감각은 뇌가 생존을 위해 직조해 낸 진화적 인터페이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시스템 생물학과 생태학은 생명체를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환경과 끊임없이 물질과 정보를 교환하는 동적 평형계(흐름)로 정의한다. 나아가 어떤 입자나 계(System)의 질량·전하·스핀·위치·속도·양자 상태 등을 완전히 기술할 수 있는 ‘물리적 상태의 고유한 데이터(배열)’를 뜻하는 정보가 보전된다는 법칙(Law of Conservation of Information)도 밝혀졌다6).

이러한 현대 과학의 통찰은 “독립된 자성(自性)은 없으며 오직 조건(인연)에 따라 현상이 일어난다”는 연기·공(空) 사상, 고정불변의 자아는 없고(無我) 오온(五蘊)의 조건적 결합만 존재한다는 생명의 본질에 대한 가르침, 모든 것이 얽혀 서로를 비춘다는 ‘일즉일체 다즉일(一卽一切 多卽一)’의 화엄적 세계관, 그리고 "지은 바 업은 백천 겁의 세월이 흘러도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인연이 화합할 때 그 과보를 몸소 받게 된다.”는 업과 과보의 원리 등 윤회에 관련된 불교의 가르침에 매우 근접하고 있다.

업(業)이라는 고유한 패턴과 지향성을 싣고, 시공간을 가로질러 다음 인연으로 공명하는 ‘지향성 정보-에너지 파동(Information-bearing Energy Wave)’이라 할 중유의 존재는 아직 과학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전생에 관한 실증적 연구결과는 놀라울 정도로 집적되고 있다7).

(2) 윤회교리와 14무기

붓다는 세계의 영원성, 영혼과 육체의 동일성 여부, 여래의 사후 존재 여부 등 14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하셨고(十四無記), "누군가 이 질문들에 단적으로 답해주지 않는다면 청정범행을 닦지 않겠다고 고집한다면, 그는 화살의 독을 치료받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처럼 진리를 깨닫지도 못한 채 생을 마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8).

위 질문들은 언뜻 윤회와 관련하여 당연히 가질 법한 의문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래의 사후는 범부의 분별적 언어(유·무)로는 포섭될 수 없는 초월적 영역이며, 자아와 세계에 관한 물음 역시 실체론적 집착과 이에 따른 희론으로 흐를 위험이 다분했기 때문이다9). 힌두교 등 외도들이 붓다의 침묵에 대하여 계속 공격하자, 기원후 2~3세기경 용수(龍樹)는 『중론(中論)』을 통해 그 질문들이 실체론이라는 허위 전제에 기초해 있음을 밝히고 연기(緣起)와 공(空)의 논리로 이를 해명하였다. 후대 선가(禪家)에서는 이러한 침묵이야말로 언어와 분별의 한계를 부수는 가장 강력한 설법, 즉 '성묵연(聖默然)'이었다고도 하였다.

(3) 무아와 윤회에 관한 인공지능과의 문답(요지 요약)

① 불교의 윤회교리가 타 종교•사상과 어떻게 다른가?

육신의 죽음으로 생명은 완전히 종료된다는 단견(斷見)을 취하는 유물론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죽음 후에도 영혼이나 그와 유사한 주체가 지속될 것이라는 견해를 취하지만 그 구체적 양상은 문명권마다 다양하다.

샤머니즘에서는 육신을 떠난 정령(靈)이 자연과 이승 주변에 머물며 산 자의 길흉화복에 개입하거나 인간·동물로 다시 환생한다고 본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생명은 우주의 신성한 질서(마아트)의 반영으로서, 육체와 여러 영적 요소(카·바·아크)가 결합된 존엄한 실체이고, 사후에는 육체를 온전히 보존하고 진리의 저울에서 심장의 무게를 달아 죄가 없음이 입증된 자는, 신들과 함께 영원한 풍요와 부활을 누리는 낙원으로 들어간다고 보았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바빌로니아에서는 인간은 신들의 고된 노역을 대신하기 위해 흙과 신의 피로 빚어진 유한한 피조물로서, 영생은 신들의 전유물이며, 죽은 자의 영혼은 선악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빛 없는 지하 감옥(쿠르)에서 흙먼지를 파먹으며 무기력하게 배회한다고 보았다. 이란 지역의 고대 조로아스터교와 유대교·기독교·이슬람 등 아브라함계 종교는 메소포타미아 종교의 신의 개별영혼 창조와 1회적 생의 견해를 취하면서도, 도덕적 심판과 영원한 구원을 확립하였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생명은 선신(Ahura Mazda; 악신 Angra Mainyu와 대립) 거룩한 창조물이며,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니고 선과 악의 우주적 대결에 참여하는 도덕적 동역자이다. 사후에는 킨바트의 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그때 행위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며, 역사의 마지막 날에는 모든 악이 정화되고 육체가 부활하여 갱신된 물질세계에서 영원한 삶을 누린다. 아브라함계 종교에서는 신이 창조한 불멸의 개별 영혼이 단 한 번의 생을 마친 뒤 최후의 심판을 거쳐 영원한 천국이나 지옥으로 들어간다고 믿는다.

고대 그리스의 오르페우스교와 이를 뒤이은 플라톤은 인간은 영원불멸하는 비물질적 영혼(프시케)이 일시적이고 부패하기 쉬운 육체라는 감옥(소마)에 갇혀 있는 이원론적 존재라고 보고, 죽음은 영혼이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해방이며, 영혼은 생전의 도덕성과 지혜에 따라 타르타로스(지옥)•엘리시온(낙원)으로 향하거나 다른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윤회(메템프시코시스)를 겪는다고 보았다.

한편 힌두교에서는 불변하는 참된 자아인 아트만(Ātman)이 낡은 옷을 갈아입듯 윤회의 주체가 되어 몸을 바꾼다고 보며, 중국의 전통 사상에서는 정신의 혼(魂)과 육체의 백(魄)이 흩어져 각각 하늘과 땅으로 환원된다는 혼백관(魂魄觀)을 바탕으로 조상 숭배의 제례를 발전시켰다.

이처럼 인류의 여러 사후관이 ‘단견(斷見)’이나 ‘불변하는 영혼의 지속(상견, 常見)’ 혹은 ‘초월적 존재의 주재’를 전제하는 경향인데 반해, 불교는 붓다의 깨달음에 입각하여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아(我, ātman)를 부정하면서도 업(業)의 연속성으로서 윤회와 해탈을 해명한다는 점에서 매우 독보적이다.

② 항상하는 영혼이 있다면 어떻게 구원되거나 해탈되나?

아브라함계 종교에서 인간 영혼은 스스로 죄악에서 벗어날 자력(自力)을 지니지 못하며, 오직 신을 믿고 따름으로써 부여받는 신의 절대적인 은혜와 사랑에 의해 비로소 구원에 이른다고 본다.

힌두교에서 참된 자아인 아트만(Ātman)은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불변한 신적 실재이다. 현상계에서 겪는 고통과 업은 영혼 자체가 오염된 것이 아니라, 물질과 감각을 자신과 동일시한 무명(착각)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따라서 힌두교에서의 해탈(Mokṣa)은 영혼을 새롭게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인 아트만이 본래부터 오염된 적 없이 청정하며 우주의 근본 원리인 브라흐만과 둘이 아님을 깨닫는(梵我一如) 인식의 전환을 통해 성취된다.

이에 비하여 불교에서는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자아를 영원하다고 착각하여 집착하고 끝없이 갈애를 일으키는 것 자체가 근본무명(無明)이라고 본다. 따라서 불교의 해탈은 불변하는 영혼을 구원하거나 본래적 실체를 되찾는 것이 아니라, 이 무명을 깨뜨려 아집(我執)의 망념에서 벗어나고, 연기와 인과의 도리를 여여(如如)하게 통찰하여 걸림 없이 중도(中道)를 살아가는 데 있다. 나아가 잘못된 견해나 교조적인 앎을 절대화하여 고집하는 것 역시 법집(法執)으로서, 아집의 또 다른 변형이자 해탈을 가로막는 장애일 뿐이라고 본다

③ 윤회한다면 생명의 수는 일정한가?

위 견해 중 영혼이 계속된다는 상견(常見)을 취하는 종교들 사이에서도 영혼의 기원과 수효에 대한 관점은 갈린다. 힌두교나 고대 오르페우스교처럼 윤회를 전제하는 전통에서는 영혼이 몸을 바꾸며 순환하므로 우주 내 영혼의 총량이 본질적으로 일정하게 유지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브라함계 종교에서는 영혼은 매 생명의 수태 시 신에 의해 개별적으로 새롭게 창조되나, 한 번 창조된 영혼은 영원히 고유한 개체성을 유지한다. 식물과 동물의 생명력은 사망 시 소멸하지만, 영원불멸하는 이성적 영혼을 부여받은 인간만은 온전한 육체로 부활할 수 있다. 수태 초기나 유아기에 사망한 자라도 결함 없는 가장 성숙하고 완전한 상태의 신령한 육체로 부활하며, 거룩함을 상징하는 빛과 흰옷으로 감싸인다고 본다. 한편 요한계시록에는 구원받은 거룩한 백성 전체를 상징하는 144,000이라는 완전수가 제시되기도 한다. 영적 피조물인 천사는 인간과 별도로 창조되어 영생을 누리는데, 그중 자유의지로 반역을 선택한 무리(전체의 약 3분의 1로 상징되는 타락 천사)가 사탄이 되었으며, 이들 역시 종말에 심판을 받는다. 이슬람 전통에서는 동물도 최후의 날에 완전한 공의를 실현하기 위해 일시 부활시키지만, 억울함을 심판한 뒤 다시 흙으로 환원시킨다고 본다.

이에 비하여 불교 윤회의 양상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6도의 모든 유정(有情)이 윤회의 대상이 되나, 그 생명과 일대일로 대응하는 고정된 영혼의 알맹이가 수량적으로 윤회하는 것은 아니다. 해탈에 이른 생명이 윤회를 벗어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생(四生, 태·란·습·화)으로 생겨나는 생명의 수가 무량하여 수치로 산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혼이라는 실체적 개체가 기계적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업(業)의 인과에 따라 촛불이 다음 불꽃을 잇듯 연속되는 흐름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6도 중생 이외의 식물이나 미생물, 기타 무정물(無情物)은 깨달음의 주체로서 윤회에 들지는 않으나, 성불 시에는 성불의 경계에 포섭된다(草木國土 悉皆成佛). 따라서 다른 종교에서와는 달리 동식물의 생명도 존중된다. 악마(Māra)는 전생의 복덕으로 욕계 최고천(타화자재천)을 주재하는 천신(Deva)이 되었으나, 탐진치를 여의지 못하여 자기의 세력을 넓히고자 중생의 해탈을 방해한다고 본다.

④ 업식이 입태할 때 유전자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

업식(業識)은 이미 짜인 염기서열 자체를 마법처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수정란의 감응과 선택’, ‘유전자 발현의 제어’, 그리고 ‘심신(心身) 상호작용을 통한 생명 형성’이라는 세 가지 층위에서 작용한다.

첫째, 한 부모로부터 나올 수 있는 유전적 조합은 수천억 가지가 넘는데, 업식의 인연과 지향성에 의해 바로 그 특정한 유전적 조합이 선택·실현된다.

둘째, DNA 염기서열이 같다고 해서 결과가 모두 같지는 않다.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 밝히듯, DNA가 인쇄된 ‘악보’라면 그 악보를 어떤 빠르기와 강약으로 연주할지, 어떤 유전자를 묵음(스위치 OFF)으로 두고 어떤 유전자를 활성화(스위치 ON)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세포 환경과 신호 체계이다. 업식은 초기 배아 단계에서 어떤 유전적 소인이 발현되고 억제될지를 조율하는 총괄적 동력으로 작용한다.

셋째, 입태의 순간(결생의 찰나)에 물질(몸)은 크게 네 가지 원인—업(kamma)•마음(citta)•온도(utu)•음식(āhāra)—에 의해 생성된다. 업식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생물학적 재료(유전 정보)를 바탕으로 삼되, 단순한 단백질 덩어리에 불과한 세포에 생명 기능(jīvitindriya)과 물질적 토대를 구축하여 살아 숨 쉬는 유기체로 조직화하는 생명장(Bio-field)의 형성력을 제공한다.

요컨대, 업식이 유전자에 미치는 영향은 "완성된 설계도의 글자를 펜으로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유전적 조건(하드웨어)을 바탕으로, 자신의 업에 감응하는 최적의 배아를 선택하고, 잠재된 유전 정보의 발현을 지휘하며, 의식의 지향성을 불어넣어 하나의 온전한 생명으로 발달하도록 추동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쌍둥이의 잉태 역시 여러 개의 결생식(結生識, paṭisandhi-citta)이 각각 감응하여 결합한 경우이다. 이는 수정란 하나가 쪼개져 발생하는 일란성 쌍둥이(Monozygotic twins)에서도 마찬가지다. 의학에서는 약 0.35~0.4%의 확률로 일어나는 우연한 세포 분리로 보지만, 불교적 관점에서는 독립된 2개 업식의 개별적 생명 형성력(업생색, kammaja-rūpa)이 동일한 수정란의 장(場)에 감응하여 각자의 신체 영역을 분립해 나가는 과정으로 본다. 두 업식이 공유하는 공통의 인연(共業)의 긴밀함과 물리적 조건에 따라 분리 시점도 달라지는데, 만약 세포 분리가 늦어져 수정 후 13일 이후에 이르면 두 업식이 하나의 신체 조건을 불가피하게 공유하는 결합쌍둥이(샴쌍둥이)가 되기도 한다. 이 역시 신체라는 물리적 조건은 공유하더라도, 그 안에서 작동하는 주관적 의식과 업식은 결코 하나로 융합될 수 없는 독립된 두 생명임을 보여준다.

⑤중유의 존재기간 49일은 지구 시간인가?

중유(中有)의 수명은 극히 짧으면 한순간(찰나)이고, 인연을 만나지 못하면 7일 동안 머물며, 7일이 지나도 인연을 만나지 못하면 한 차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을 거듭하지만 통상 일곱 번(49일)을 넘지 않고 다음 생의 부모와 인연을 만나 탁생(托胎)하게 된다. 49일이 다하도록 인간 등의 몸을 받지 못할 경우, 아귀(餓鬼)나 수목신(樹木神) 등 하급 영계의 존재로 과보의 몸을 받기도 한다. 여기서의 7일은 지구의 시간을 기준으로 한 것이며, 중음신은 물질적 장벽에 구애받지 않고 업의 인연이 닿는 곳이라면 공간을 초월하여 즉각 이동할 수 있는 신통력을 지닌다10).

이 '7일' 주기는 달이 위상을 바꾸는 7일의 자연 주기(천문학), 생명이 자궁 속에서 형성되어 나가는 7일의 성장 마디(고대 의학), 그리고 고대 인도의 사후 천도 제례 관습(사라다)이 결합된 바탕 위에서 성립되었다고 본다.

한편 서양의 전통 역시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달의 7일 주기와 더불어 육안으로 움직임이 뚜렷이 관측되는 7개의 특별한 천체(태양·달·화성·수성·목성·금성·토성; 오늘날 요일 이름의 기원)를 바탕으로 7을 신성한 주기로 확립한 데서 출발하였다. 유대교는 이를 천지창조에 수용하여 6일간의 창조를 마치고 제7일에 안식한 것으로 규정하였으며,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21년에 기존의 8일 장날 주기(눈디나이)를 폐지하고 기독교와 행성 점성술이 결합된 7주 단위 역법을 제국의 공식 역법으로 함으로써 오늘날의 세계적 표준으로 정착되었다.

4. 윤회와 바람직한 삶

(1) 해탈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탈하는가?

해탈은 ‘나’라는 주체가 어딘가 더 좋은 세계로 이동하거나, 신비로운 실체와 합일을 이루는 초자연적 사건이 아니다.

열반(Nirvāṇa)의 본래 어원은 ‘불을 끄다’, ‘열기가 식다’라는 뜻이다. 이는 탐욕(탐), 성냄(진), 어리석음(치)이라는 세 가지 번뇌의 불길에 연료 공급이 끊겨 완전히 식어버린 평정의 상태를 가리킨다.

실상에는 ‘고정된 나’가 존재하지 않는데도, 의식은 쉼 없이 흘러가는 감각과 생각을 향해 끊임없이 “이것이 나다”, “내 것이다”라며 거머쥔다(取着). 갇혀 있던 실체적 자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자아를 실체화하여 지켜내려는 헛된 안간힘’ 자체가 곧 속박이자 구속의 실체이다. 따라서 해탈은 ‘갇혀 있던 영혼이 풀려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움켜쥐고 있던 헛된 긴장과 근본적 착각이 남김없이 종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탈에 이르는 길은 교조적 신념을 억지로 주입하거나 신비한 주문을 외우는 방식이 될 수 없다. 사실을 사실대로 직접 확인하여 뇌와 의식의 오랜 착각을 교정해 내는 지극히 사실적이고 정밀한 인과적 과정이다.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번뇌를 멈추어 분리해 보는 지(止, Śamatha), 실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관(觀, Vipaśyanā), 이를 통해 헛된 집착을 싫어하여 떠나는 ‘염리(厭離)’와 욕망을 여의는 ‘이욕(離欲)’, 그리고 마침내 번뇌가 소멸하여 지극한 평정에 이르는 ‘열반(涅槃)’의 단계적 수행이 요구된다.

(2) 왜 해탈이 필요한가?

중생에게 아집과 탐진치로 인한 집착은 뿌리가 대단히 깊어서, 도박이나 마약에 중독된 사람처럼, 혹은 오물을 찾아가는 구더기처럼 스스로 끊어내기가 극히 어렵다. 사람들은 삶의 곳곳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에 직면하면 신이나 불보살을 향해 구원을 호소하지만, 실상은 고통의 뿌리인 세속적 욕망과 아집에 대한 미련을 결코 내려놓지 못하고 그 언저리를 맴돈다. 심지어 모진 풍파를 겪고도 ‘살아보니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라며 체념한 채, 다시금 탐진치가 이끄는 맹목적인 삶으로 돌진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는 무명과 탐진치에 얽매인 삶 자체가 근본적으로 불안전하고 어긋나 있다는 사실, 즉 ‘삶이 곧 괴로움’임을 뼈아프게 자각하는 것을 4성제의 첫 출발점인 ‘고제(苦諦)’로 삼았다. 병의 원인을 직시하지 않고는 참된 치유가 시작될 수 없듯, 윤회의 굴레가 지닌 실존적 고통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해탈을 향한 유일하고도 필연적인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3) 해탈한 삶은 어떻게 다른가?

첫째, 본래의 명석함이 뚜렷하게 드러난다(적적성성 寂寂惺惺). 진흙탕 물을 막대기로 휘젓던 망상과 조작을 멈추고 가만히 두면, 흙탕물이 스스로 가라앉으며 물 본래의 맑음이 드러난다. 내면의 시끄러운 소음과 편집증적인 자아 방어가 멎으므로, 의식은 무기력하게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극도로 맑고 또렷해진다. 대상을 마주할 때 자신의 탐욕이나 두려움이라는 색안경을 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여실하게(如實) 비추어 보게 된다.

둘째, 얽매임 없는 자유로운 지혜의 작용이 일어난다(수연응용 隨緣應用). 모든 집착을 쉰다는 것은 결코 나무토막이나 돌멩이처럼 굳어버리는 무감각한 죽음의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자아의 사리사욕과 실존적 불안이 빠져나간 자리에, 인연과 상황에 꼭 들어맞는 가장 적절하고 자비로운 행위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발현된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며, 눈앞에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 있으면 아무런 계산 없이 온전하게 손을 내민다. 행위를 하되 “내가 베풀었다”는 상(相)과 집착의 찌꺼기를 남기지 않으므로, 아무리 치열하게 현실의 일에 헌신해도 마음에 피로와 후회가 쌓이지 않는다.

셋째, 삶과 죽음, 온갖 세속적 경계에 휘둘리지 않는 궁극의 평정을 누린다(열반적정 涅槃寂靜). 외부에서 주어지는 조건과 환경에 따라 일희일비하며 흔들리던 수동적인 삶이 완전히 종식된다. 얻었다고 교만해지지 않고 잃었다고 절망하지 않으며, 칭찬과 비난이라는 세속의 바람에 요동치지 않는다. 나아가 육체의 쇠락이나 죽음마저도 ‘인연의 조건에 따라 잠시 모였다가 흩어지는 자연스러운 우주적 흐름’으로 여여하게 관조할 뿐, 참된 자기를 파괴하는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해탈과 열반이란 무기력하게 주저앉는 소극적 도피가 아니다. 그것은 ‘본래 존재하지도 않는 헛된 자아를 지켜내기 위해 평생 동안 쥐고 있던 쓸모없는 긴장을 마침내 다 내려놓고, 본래 갖추어진 생명의 걸림 없는 지혜와 자비를 온전히 누리는 지극히 건강하고 자유로운 삶’의 완성이다.

이처럼 이치와 가르침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아집·법집과 탐진치에 눈먼 세력들에 의해 정법(正法)이 훼손되거나 가려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연기의 실상을 보지 못한 데서 비롯된 일시적 혼란일 뿐, 실체 없는 허상이 결코 영구히 지속될 수는 없다.11)


1)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던 날 밤, 숙명명(宿命明: 자신의 과거 전생들을 낱낱이 꿰뚫어 봄)과 천안명(天眼明: 중생들이 지은 업에 따라 윤회하는 과정을 봄)을 얻으셨고, 다섯 비구에게 베푸신 초전법륜에서는 중도와 사성제, 그리고 팔정도라는 해탈의 길을 천명하셨으며, 여러 곳에서 업과 윤회를 부정하는 단멸론(허무주의)과 영혼이 불멸한다는 상견(常見)을 명백한 ‘삿된 견해(邪見)’로 배격하셨다.

2) 대림 역(2007), 『앙굿따라 니까야』 제4권, 아라까경(A7:70), 초기불전연구원, 531면.

3) 김현준 편역(2026 3쇄), 『밀린다왕문경』, 효림출판사, 57~58면 등.

4) 인장의 재질이 밀랍이나 진흙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지만 인장을 조건으로 하여 인영이 생겨나듯, 얼굴이 거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지만 얼굴을 조건으로 거울에 상이 맺히듯, 전생의 식(사식)이 내생으로 건너가지 않아도 전생의 업을 조건으로 결생식이 일어난다는 취지.〔붓다고사 지음•대림 역(2015 초판 5쇄), 『청정도론(Visuddhimagga) 3』, 초기불전연구원, 105~106면. (제17품 「통찰지의 토양」 중 165, 166절)〕

5) 미륵보살(彌勒菩薩) 지음•삼장법사 현장(玄奘) 한역•강명희 번역,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제1권』 1. 본지품; 파드마삼바바 지음 카지 다와삼둡 영역•에번스 윈츠 편집•류시화 번역(2000), 『티벳 死者의 書』, 정신세계사. 참조

6) ‘정보보존의 법칙’은 1838년 프랑스 수학자 조제프 리우빌(Joseph Liouville)이 입자들의 위상 공간(Phase Space) 부피가 보존된다는 ‘리우빌 정리’를 확립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후 1920년대 에르빈 슈뢰딩거와 폴 디랙 등이 양자역학 체계를 세우며 ‘유니타리성(Unitarity, 유니타리티 원리)’을 제1공리로 확립하였고, 1961년에는 IBM 연구소의 롤프 란다우어(Rolf Landauer)가 논문 「연산 과정에서의 비가역성과 열 생성」을 통해 정보가 물리적 실체임을 입증했다(2012년 유럽 공동연구팀의 나노 입자 실험으로 검증). 1970년대에 “블랙홀이 증발하면 정보도 영구히 소멸한다”고 이의를 제기했던 스티븐 호킹이 2004.7.21. 더블린 제17차 일반상대성론 및 중력 국제학술대회에서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철회함으로써, ‘정보보존의 법칙’은 현대 물리학의 침범할 수 없는 확고한 진리로 공인되었다.

7) 에드가 케이시(Edgar Cayce)의 전생 리딩(Reading)은 직관적 진술에 그쳐 대중적 가십 정도로 취급된 점이 있었지만, 이후 전개된 연구들은 엄격한 임상적 데이터와 학술적 격식을 갖추며 발전해 왔다. 버지니아 의대 지각연구소(DOPS)를 설립한 스티븐슨(Ian Stevenson) 교수가 3,000건 이상의 사례를 검증해 발표한 《Twenty Cases Suggestive of Reincarnation》(1966)과 《Reincarnation and Biology》(1997), 그 후계자인 짐 터커(Jim B. Tucker) 교수의 《Life Before Life》(2005) 및 《Return to Life》(2013)는 체계적인 사료 검증을 거친 대표적 실증 연구로 꼽힌다. 마이클 뉴턴(Michael Newton)의 《영혼들의 여행》(1994), 브라이언 와이스(Brian Weiss)의 《전생체험》(1988)과 같은 최면 임상 저작들, 그리고 버지니아 대학교 DOPS가 Journal of Scientific Exploration, Journal of Near-Death Studies 등의 학술지에 지속적으로 게재해 온 동료 평가 논문(Peer-reviewed Papers)과 데이터베이스는 아동의 전생 기억•임사체험•사망 직전 의식 회복 현상 등을 단순한 신비주의가 아닌 유의미한 학술적 탐구 대상으로 올려놓았다.

8) 『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āya)』 제63경 《말룽꺄뿟따 경(Cūḷamāluṅkya Sutta, 김윤수 역주(2019), 『중아함경 Ⅴ』, 운주사, 제221 전유경 590~599면. 14개 질문내용은 세계의 시간적 영원성에 관한 세간상(世間常)•세간무상(世間無常)•세간역상역무상(世間亦常亦無常)•세간비상비무상(世間非常非無常), 세계의 공간적 유한성에 관한 세간유변(世間有邊)•세간무변(世間無邊)•세간역유변역무변(世間亦有邊亦無邊)•세간비유변비무변(世間非有邊非無邊), 생명(영혼)과 신체의 동일성에 관한 명즉시신(命卽是身)•명이제신(命異提身), 여래(해탈한 자)의 사후 존재에 관한 여래사후유(如來死後有)•여래사후무(如來死後無)•여래사후역유역무(如來死後亦有亦無)•여래사후비유비무(如來死後非有非無)이다.

9) 『숫타니파타』 제4장 의품의 「파수라경(Pasūra Sutta)」에는 “자신의 견해를 내세워 논쟁하는 자는 남을 꺾으면 기뻐하며 자만에 빠지고, 논쟁에서 지면 낙담하여 슬퍼하고 원망을 품는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논쟁 자체에 뛰어들지 않으며, 승패를 다투는 논쟁을 결코 칭찬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법구경』 역시 “승리는 원한을 낳고 패자는 고통 속에 눕나니, 승패를 내려놓아야 평안에 든다”며 대립과 논쟁의 파멸성을 경계하였다. 후일 용수의 수제자로서 『백론(百論)』과 『사백론(四百論)』 등을 통해 바라문·수론파·승론파 등 당대 외도의 교리를 날카롭게 논파했던 제바(Āryadeva, 阿提提婆)가 끝내 원한을 품은 외도의 자객에게 피살된 역사적 비극(구마라습 역 『제바보살전』 및 현장 『대당서역기』 참조)은, 붓다께서 왜 그토록 입씨름을 경계하고 침묵하셨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뼈아픈 실례다. 붓다의 침묵은 상대를 굴복시켜 증오의 연쇄를 낳는 언어적 폭력을 원천 차단하고 중생을 보호하려 했던 자비의 발현이었다고 보인다. 이는 공자가 자로의 죽음에 대한 물음에 “삶도 아직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未知生 焉知死, 『논어』 「선진」편)”라며 현세 윤리에 집중하였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한다 할 것이다.

10) 앞의 『밀린다왕문경』 78면, 앞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티벳 死者의 書』 참조.

11) 숫타니파타』의 「칼라하비바다경」과 「비유하경」에서 부처님은 인간이 싸우는 근본 원인에 대하여 “사람들이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헛되다'고 고집하며 싸우는 이유는, 자기 마음에 기준(견해의 자아)을 세워놓고 그것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영생의 추구나 절대신·절대이치의 고집 또한 근본적으로 같다. 뇌과학에 따르면, 뇌의 기본 모드 신경망(Default Mode Network, DMN)이 '과거의 나', '미래의 나', '남과 나를 비교하는 생각', 즉 '아집(我執, 에고)'을 쉼 없이 생성하지만, 깊은 명상 상태나 연기적 일체감을 체험할 때는 그 부위의 작동이 억제되어 감각 입력과 외부 환경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내가 우주 속에 있고, 우주가 내 안에 상호의존적으로 얽혀 있다”는 연기적 직관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보편적 사랑을 내세우는 절대자나 절대이념이라 할지라도 그 바탕에는 “정교하게 포장된 거대한 미망(常見)”이 자리 잡고 있다. 아무리 우주적이고 신성한 자아라 하더라도 ‘잡고 있는 주체(실체)’가 존재하는 한, 무의식 밑바닥에는 미세한 존재욕망(有愛, Bhava-taṇhā)과 아만(我慢, Asmimāna)이 남기 마련이다. 신이나 절대원리를 옹호하고 찬양하는 행위 역시 '그런 위대한 대상을 선택하고 소유한 나'의 정체성과 가치를 확장·보존하려는 아만(我慢)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극복해야만 조건 없는 참된 자비(무연자비행)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한 그릇된 견해에서 비롯된 공격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누군가 허공에 그림을 그리려 하거나, 횃불로 갠지스강을 태우려 한다면 지치는 것은 누구인가? 허공에는 흔적이 남지 않는다"(『맛지마 니까야』의 「카카추파마경(톱의 비유)」)라고 하셨다. 또한 한 바라문이 찾아와 온갖 욕설을 퍼부었을 때, 부처님께서는 묵묵히 들으신 후 “그대의 집에 손님이 찾아와 음식을 대접했는데, 손님이 먹지 않고 거절하면 그 음식은 누구의 것이 되는가?”라고 물으셨다. 바라문이 “그야 당연히 차려놓은 내 것이지요”라고 답하자, 부처님께서는 “그렇다면 그대가 내게 쏟아낸 그 저주와 분노를 나는 일절 받지 않겠소. 그러니 그것은 온전히 그대의 몫으로 남을 것이오”(『상윳따 니까야』의 「아코사경」)라고 일갈하심으로써 그를 깨우쳐 출가시켰다.


구상진|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검사 생활을 했고, 서울시립대 법학과 교수 및 동 대학 로스쿨 원장, ‘법조불교인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변호사, ‘헌법을생각하는변호사모임’ 명예회장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불교와 자유민주주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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