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無我)와 공(空)은 허무(虛無)가 아니다|초기 불교로 풀어보는 불교

무아(無我)와 공(空)은
허무(虛無)가 아니다

이중표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무아(無我)를 관념적인 이론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은 무아(無我)의 가르침에서 혼란을 겪게 된다. 무아(無我)라면 지금 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나’가 없다면 누가 ‘나’를 죽여도 ‘나를 죽였다’고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내가 다른 사람을 죽여도 ‘그 사람’이 무아(無我)라면 실은 ‘그 사람’을 죽였다고 할 수 없지 않겠는가? 불교의 무아설(無我說)을 관념적인 이론으로 이해하면 이런 딜레마를 피할 수 없다. 부처님 당시에 실제로 이런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비구가 있었다. 『맛지마 니까야』 22. 「독사의 비유경(Alagaddu-pama-sutta)」은 그 비구를 위해 설하신 경이다.

세존의 부름을 받은 아릿타 존자는 세존을 찾아가서 예배하고 한쪽에 앉았습니다. 한쪽에 앉은 아릿타 존자에게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릿타여, 그대는 사악한 견해를 일으켜, ‘세존께서 말씀하신 장애법(障碍法)을 추구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가르쳤다’라고 했다는데,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확실히 세존께서 ‘세존께서 말씀하신 장애법(障碍法)을 수용(受用)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라고 가르쳤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아, 누구에게 내가 그런 가르침을 가르쳤다고 그대는 알고 있는가? 어리석은 사람아, 내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갖가지 비유를 들어서, ‘장애법(障碍法)을 추구하면 많은 장애(障碍)가 있다’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이제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중략)

비구들이여,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은 가르침을 배우지만, 그들은 그 가르침을 배운 후에 지혜로 그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하지 않으며, 지혜로 그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하지 않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한다오. 그들이 잘못 파악한 가르침은 그들을 오랜 세월 동안 무익한 괴로움으로 이끌 것이오. 비구들이여,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가르침을 잘못 파악했기 때문이오. 비구들이여,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독사가 필요해서 독사를 찾아, 독사를 탐색하고 다니다가, 커다란 독사를 발견하고 곧바로 그 똬리 튼 몸통이나 꼬리를 잡는 것과 같다오. 그 뱀은 돌아서서 손이나 팔이나 다른 손발을 물게 될 것이오. 그리고 그는 그로 인해서 죽음에 이르거나, 죽을 지경의 괴로움에 이르게 될 것이오. 비구들이여,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뱀을 잘못 잡았기 때문이오. (중략)

비구들이여, 내가 그대들에게 뗏목의 비유, 즉 뗏목은 강을 건너기 위한 것이지, 붙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설법을 하겠소.

비구들이여, 비유하면, 길을 가던 어떤 나그네가 이쪽 언덕은 무섭고 위험하고, 저쪽 언덕은 안전하고 위험이 없는 범람하는 큰 강을 만났는데, 이 언덕(此岸)에서 저 언덕(彼岸)으로 갈 수 있도록 강을 건네줄 배가 없었다오. (중략) 그 사람은 풀, 나무토막, 나뭇가지, 나뭇잎을 모아 뗏목을 엮은 다음, 그 뗏목에 의지해, 손과 발을 힘껏 저어서, 안전하게 저 언덕(彼岸)으로 올라갔다오. 그런데 강을 건너 저 언덕에 올라간 사람이 이런 생각을 했다오.

‘이 뗏목은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는 이 뗏목에 의지하여 안전한 언덕으로 올라왔다. 그러니 나는 이 뗏목을 머리에 이거나, 어깨에 지고 갈 길을 가야겠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사람이 그 뗏목에 대하여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나는 이와 같이 뗏목의 비유, 즉 뗏목은 강을 건너기 위한 것이지, 붙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설법을 했다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뗏목의 비유를 이해하여, 마땅히 가르침들(法;dhamma-)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가르침이 아닌 것들(非法; adhamma-)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견처(見處)가 있다오. 여섯 가지는 어떤 것들인가? 비구들이여, 무지한 범부는 형색(色)을 지닌 몸에 대하여, ‘이 형색(色)을 지닌 몸은 나의 소유다. 이 형색(色)을 지닌 몸이 나다. 이 형색(色)을 지닌 몸은 나의 자아(自我)다’라고 여기고, 느끼는 마음(受), 생각하는 마음(想), 조작하는 행위(行), 분별하는 마음(識)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소유다. 이것이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오. 심지어는 마음에 의해서 보이고, 들리고, 지각되고, 인식되고, 파악되고, 소망되고, 성찰된 것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소유다. 이것이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오. 뿐만 아니라, 이 견처(見處)에 의지하여, ‘이것이 자아다. 이것이 세계다. 나는 사후(死後)에 지속하고, 일정하고, 영원하고, 변역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대로 언제까지나 머물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소유다. 이것이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오.

비구들이여, 그렇지만 학식 있는 성인의 제자는 형색(色)과 느끼는 마음(受)과 생각하는 마음(想)과 조작하는 행위(行)들과 분별하는 마음(識)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소유가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기고, 마음에 의해서 보이고, 들리고, 지각되고, 인식되고, 파악되고, 소망되고, 성찰된 것에 대하여서도, ‘이것은 나의 소유가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오.

그뿐만 아니라, 이 견처(見處)에 근거하여, ‘이것이 자아다. 이것이 세계다. 나는 사후(死後)에 지속하고, 일정하고, 영원하고, 변역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대로 언제까지나 머물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소유가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오. 그는 이와 같이 여기는 일이 없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다오.

‘독사의 비유’라는 이름의 이 경은 뗏목의 비유(筏喩)로 널리 알려진 경으로 독사의 비유와 뗏목의 비유가 설해져 있다. 이 두 개의 비유는 공(空)과 무아(無我)를 핵심으로 하는 불교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다.

주지하듯이 부처님은 무아(無我)를 가르쳤다. 그런데 이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면 허무주의(虛無主義)가 된다. 죽어서 다음 세상으로 가는 자아(自我)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다 죽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이 경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릿타(Arit.t.ha)라는 비구가 이렇게 불교를 이해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존께서 말씀하신 장애법(障碍法)을 추구(追求)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라고 이해한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장애법(障碍法)’은 감각적 욕망이다. 부처님께서는 감각적 욕망을 벗어나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아릿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감각적 욕망을 추구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이해한 것이다.

이 경에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아릿타가 감각적 욕망을 추구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이해한 가르침은 무아(無我)와 공(空)의 가르침이다. 독사를 잘못 잡으면 독사에 물리듯이, 무아(無我)를 잘못 이해하면 큰 피해를 입게 된다는 것이 이 경의 요지이다. 용수(龍樹)가 『중론(中論)』 관사제품(觀四諦品)에서 “잘못 이해된 공성(空性)은 이해가 부족한 사람을 괴롭힌다. 잘못 잡은 뱀이나 잘못 외운 주문처럼”이라고 이야기한 것도 이 경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이와 같이 무아(無我)를 잘못 이해하면 무아(無我)의 가르침은 모든 윤리와 도덕을 파괴한다. 무아(無我)가 자기 존재의 부정이라면 살인을 해도 죽일 사람이 없고, 누가 나를 죽여도 죽을 내가 없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과 사람을 분리한다. 존재하고 있는 사람이 먹고 숨 쉬고 행동하면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존재가 태어나서 늙어 죽어간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 속에 시간을 관통해 변치 않고 존재하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를 우리는 ‘자아(自我)’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전생(前生)과 내생(來生)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나는 전생에 어디에 있었을까? 나는 전생에 무엇이었을까? 나는 죽어서 어디로 가게 될까? 나는 다음 생에 무엇이 될까?” 이 모든 의문은 삶 속에 시간을 관통해 존재하는 ‘자아(自我)’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사(生死)와 윤회(輪廻)는 이렇게 삶 속에 시간을 관통해 존재하는 ‘자아(自我)’가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과연 이러한 자아(自我)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는 형색이 있는 몸(色)을 지니고, 느끼고(受) 생각하고(想) 행동하고(行) 인식하면서(識) 살아간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면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존재하는 몸(色蘊)이 있고, 그 몸속에 변치 않고 존재하는 느끼는 마음(受蘊), 생각하는 마음(想蘊), 행동하는 마음(行蘊), 인식하는 마음(識蘊)이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이러한 우리의 생각이 옳은 것일까? 불교는 이렇게 우리의 생각이 정당한가를 묻고 바르게 통찰해 바른 생각을 가지고 생사(生死)와 윤회(輪廻)라는 망상을 버리고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종교다.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자아(自我)’라고 생각하는 오온(五蘊)을 통찰하면 그것들이 무상(無常)하고, 괴로움이며, 시간을 관통하는 자아(自我)일 수 없으며, 우리의 자아의식은 감각적 욕망을 축으로 형성된 허망한 망상(妄想)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깨닫고, 감각적 욕망을 축으로 형성된 자아의식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면서 온갖 괴로움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괴로움의 뿌리가 되는 허망한 자아의식을 버리도록 무아(無我)를 말씀하셨다. ‘자아(自我)’라는 생각을 버린다고 해서 죽지는 않는다. 무아(無我)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삶에서 ‘자아(自我)’라는 생각을 버리고 살면,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뿐이다. 부처님께서 가르친 무아(無我)는 삶을 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라, 삶 속에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허망한 생각, 즉 망상(妄想)을 버리라는 가르침이다.

이렇게 자신이 무아의 가르침을 통해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사람에게는 ‘자아(自我)가 있는가, 없는가?’라는 논쟁은 무의미한 말장난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삶에서 자아(自我)라는 망상(妄想)이 사라진 뒤에는 무아(無我)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이 뗏목의 비유이다. 무아(無我)의 가르침은 강을 건넌 후에는 버려야 할 뗏목과 같은 것이다.

무아(無我)가 종국에는 버려야 할 방편(方便)이라고 해서 부처님이 무아(無我)가 아닌 어떤 진아(眞我)를 숨겨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우려해 “그대들은 뗏목의 비유를 이해하여 마땅히 가르침(法)들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가르침이 아닌 것(非法)들은 말해 무엇하겠는가?”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가르침이 아닌 것은 유아론(有我論)이다. 무아(無我)를 버린다고 유아(有我)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범부들은 무아(無我)가 아니면 유아(有我)라는 모순된 생각을 한다. 이 모순된 생각을 벗어나는 것이 중도(中道)이다. 이 법문은 중도(中道)를 벗어나서는 바르게 이해될 수 없다. 중도(中道)에서 연기(緣起)하는 삶의 실상(實相)을 보아야 무아(無我)의 참뜻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중표│전남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불교학연구회 회장을 지냈다. 현재는 전남대 철학과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아함의 중도체계』, 『근본불교』,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 등이 있으며, 『불교와 일반 시스템 이론』, 『불교와 양자역학』 등의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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