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나는 세상이 항상 억울한 이유

10분으로 배우는 불교



세계는 마음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

『앙굿따라 니까야』 「로히땃사 경」에서 붓다는 로히땃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바로 이 길이의 몸과 인식과 마음 가운데서 세계와 세계의 발생, 세계의 소멸, 그리고 세계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말은 ‘세계(loka)’다. 로히땃사는 세상의 끝을 찾아 먼 곳까지 여행하려 했다. 하지만 붓다는 세상의 끝을 찾아 바깥으로 떠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세계의 발생과 소멸을 이해하는 일은 바로 우리의 몸과 인식과 마음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세계’는 단순히 내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우주만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세계, 그리고 그 안에서 고통과 집착이 생겨나는 세계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내가 세상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이기도 하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내가 경험하는 세계는 나의 마음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

물론 이것을 “세상은 모두 내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바깥에는 내가 만들어내지 않은 현실이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그 현실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나의 마음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때로는 주변의 사람과 환경이 내 마음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것은 “모든 일은 네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니 네 책임이다”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경험하는 세계에서 내 마음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뜻에 가깝다.

내가 경험하는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두 사람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A는 대학을 졸업한 뒤 다섯 군데의 회사에서 일했다. 처음에는 늘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았다. 좋은 직장을 얻었고 자신의 능력도 인정받는 듯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이 달라졌다. 첫 번째 회사에서는 독단적이고 전횡적인 조직문화 때문에 6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두 번째 회사에서는 지나치게 많은 일을 맡아 자신이 착취당하고 있다고 느꼈다. 1년을 버틴 끝에 결국 사직서를 냈다. 그때부터 힘든 시간이 시작되었다. 1년 동안 실직 상태가 이어졌다.

A는 촉망받는 금융 전문가였다. 성공적인 경력은 자신의 정체성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장기간 실직 상태가 이어지자, 자신감이 크게 떨어졌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실패자로 생각할 것 같았고, 배우자에게 짐이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그러다 마침내 6개월 계약직으로 새로운 직장을 구했다. A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었다. 정말 열심히 일했고 종종 야근도 했다. 계약은 6개월 연장되었고, 마침내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 ‘드디어 안정을 찾았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부서 개편과 함께 상황이 급격히 나빠졌다. 새로운 부서장과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괴롭힘까지 경험하면서 정신적으로도 힘들어졌다. 결국 새로운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다시 회사를 그만두었다. 두 달 후에는 큰 폭의 급여 삭감을 감수하면서 다른 회사로 옮겼다. 처음 몇 달은 순조로웠지만 이번에도 몇몇 동료들과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다시 과로에 시달렸고, 결국 상사와 크게 충돌한 뒤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A는 생각했다. “좋은 회사를 찾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가?”

이번에는 B의 이야기를 보자.

B는 인기 블로거로, 1년 전 불교단체에서 운영하는 마음공부 모임에 참여했다. 처음 6개월 동안은 사람들과 즐겁게 공부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모임에서 대승경전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B에게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부처님의 원음을 들을 수 있는 곳은 초기경전뿐이다. 대승경전은 부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대승경전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래서 경전 공부를 할 때마다 대승불교가 왜 잘못되었는지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는 것일 뿐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B를 불편하게 여기기 시작했고 하나둘 그를 멀리했다.

B는 생각했다. ‘또 홀로 되었군.’ 그러나 곧 자신을 위로했다. ‘괜찮아. 불교는 혼자서 닦는 거야.’ 그렇게 B에게 세상은 다시 한 번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곳이 되었다.

생각과 행동이 만드는 세계의 순환

우리는 살면서 이런 질문을 자주 한다. “나는 왜 이렇게 일이 안 풀리는 걸까?” “나는 왜 항상 외로운 걸까?” “왜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걸까?”

이런 원망과 푸념에는 때때로 우리의 괴로움이 바깥세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이 숨어 있다.

그런데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자. 내가 경험하는 세계는 바깥에 있는 대상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보고,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경험을 만든다.

『법구경』의 첫 번째 게송에는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씀이 나온다.

“마음은 모든 정신적 상태에 앞서고, 마음이 으뜸이며, 그것들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이 말씀을 흔히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라고 이해하기도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바깥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에 마음이 깊이 관여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아침에 집을 나서 직장에 간다고 생각해보자. 길과 건물, 자동차와 사람들은 분명히 바깥에 존재한다. 그러나 내가 경험하는 세계는 그것들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날의 기분과 기억, 기대와 걱정, 내가 가진 믿음까지 함께 작용한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마저 어둡게 느껴질 수 있다. 반대로 마음이편안한 날에는 같은 거리와 같은 사람들이 훨씬 밝고 친근하게 보일 수 있다. 바깥세상이 하루 사이에 모두 달라진 것은 아니다. 세상을 경험하는 나의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다시 A와 B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A에게 회사는 점점 ‘나를 이용하는 곳’이 되어갔다. B에게 사람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어갔다. 물론 A의 회사가 실제로 부당했을 수도 있다. B가 자신의 신념을 지킬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그 현실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을까?

예를 들어 A가 ‘회사는 결국 나를 착취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다른 사람보다 업무량이나 상사의 말에서 ‘착취의 신호’를 더 민감하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더 강하게 방어하거나 저항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이 다시 상사와의 갈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러면 A는 생각한다. ‘역시 회사는 나를 이용해.’ 처음의 믿음이 다시 강화되는 것이다.

B도 마찬가지다. ‘대승불교는 잘못되었다’라는 생각 자체가 문제라는 뜻은 아니다 (물론 이 생각으로 대승불교를 이해할 기회가 더 늦춰질 수 있다). 문제는 그 생각이 너무 확고해져 다른 사람의 견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질 때 생긴다. 자기 생각을 설명하고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반박하는 일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점점 B와 거리를 둘 수 있다. 그러면 B는 다시 생각한다. ‘역시 사람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해.’

이처럼 하나의 믿음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만들고, 그 방식은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은 다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만들어 낸다. 그 반응은 처음의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기도 한다. 생각이 행동을 만들고, 행동이 관계를 만들며, 그 관계가 다시 우리의 생각을 강화하는 순환의 고리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믿고 있는 세계를 반복해서 경험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이것이 우리가 일상에서 살펴볼 만한 마음의 작용이다.

내가 바라보는 세계 돌아보기

그렇다면 자신의 삶을 한번 돌아보자. 나는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가? 사람들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직장은 어떤 곳인가? 가족은 어떤 사람들인가? 친밀한 관계란 나에게 어떤 것인가?

그리고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나는 세상을 그렇게 경험하게 만드는 어떤 생각과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10년 전의 나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20년 전에는 어떠했는가. 그때 나는 나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했는가? 그리고 그 마음으로 바라본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는가? 아마 그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인정받아야 하는 사람이다.’ ‘사람은 결국 나를 배신한다.’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생각이 오랜 시간 반복되면 어느 순간 그것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나’가 된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렌즈가 된다. 그 렌즈를 통해 사람과 사건을 바라보면 세상은 실제로 그렇게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잘못했구나.’라고 결론 내릴 필요가 없다. 불교적 성찰은 자신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기 위한 것이다. 내가 어떤 생각을 반복하고 있는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내가 만나는 사람과 세상을 어떻게 경험하게 하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알아가기 시작하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있다. 내가 믿고 있던 것이 ‘절대적인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관점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원래 나를 무시해.’ ‘회사는 원래 사람을 이용해.’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해.’ 이런 생각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경험하는 하나의 방식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순간 우리는 조금 자유로워진다. 타인을 보는 눈도 달라진다. 내가 상대방에게 붙여놓은 이미지 역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상대방을 조금 다르게 볼 여지가 생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조금 더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왜 이럴까?’라고 자책하는 대신, ‘나는 왜 세상을 이렇게 경험하고 있을까?’

라고 질문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이것이 「로히땃사 경」에서 말하는 ‘세계’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세계는 단순히 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지각하고, 생각하고, 해석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하나의 세계가 경험되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무조건 바깥부터 바꾸려고 할 필요는 없다. 먼저 내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고 있는가?

오늘 하루,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자. 그리고 그 사람들에 대한 내 생각도 바라보자.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저 사람은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 잠시 멈추어 이렇게 물어보자.

“나는 왜 저 사람을 이렇게 보고 있을까?”

그 질문 하나가 세상을 조금 다르게 보게 할지도 모른다. 세상이 달라진 것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바로 그 순간부터 조금씩 다른 세계를 살아가기 시작할 것이다.

 

문진건 |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통합심리대 철학 및 종교연구소에서 석사와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불교대학원 명상심리상담학과 책임교수를 거쳐 현재는 동방문화대학원대 명상심리상담학과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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