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심리학이 다시 만난 업: 행동에서 인지와 동기로
[업(業),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다]
불교와 심리치료는 시대와 배경은 크게 다르지만, 인간의 고통을 줄이고 더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도록 돕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불교에서 업(業)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도 인간의 고통과 행복이 우리가 어떻게 마음먹고 행동하며 살아가느냐와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앙굿따라 니까야』(AN 6.63)에서 붓다는 “나는 의도(cetanā)를 업이라고 말한다. 의도한 뒤 몸과 말과 마음으로 업을 짓는다”고 설한다. 업의 핵심을 행동보다 그 행동을 일으키는 세타나(cetanā)에 둔 것이다.
세타나는 흔히 ‘의도’ 또는 ‘의지’로 번역된다. 나는 심리학자로서 이를 동기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 여기서 동기는 일상적으로 말하는 욕구를 포함하여 무엇인가를 바라고 그것을 향해 마음과 행동이 움직이도록 하는 심리적 과정이다.
지렁이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생명체는 필요한 것을 얻고 해로운 것을 피하려 한다. 동기가 있기 때문에 정보를 처리하며 생각하고 행동하며, 행동은 결과를 낳는다. 인간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치는 붓다가 업의 핵심에서 세타나를 강조했다는 것은 현대 심리학의 관점에서도 흥미로운 통찰이다.
행동에서 인지로
현대 심리치료의 역사를 돌아보면 업에 대한 이러한 관점과 흥미롭게 만나는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제1세대 행동치료(Behavior Therapy: BT)는 행동주의 심리학의 학습이론에 토대를 두었다. 당시 심리학은 객관적인 과학을 지향하며 관찰하고 측정할 수 있는 행동을 주요 연구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동기나 인지 같은 내적 과정은 전면에서 다루지 않았다. 여기서 인지는 일상적으로 말하는 생각을 포함하는 보다 넓은 심리학적 개념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행동주의 학습이론은 동기를 바탕으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스키너의 조작적 조건형성에서 핵심인 강화와 처벌부터 동기와 분리하기 어렵다. 배고픈 유기체에게 음식이 강화물이 되는 것은 먹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때문이며, 위험을 피하는 행동이 학습되는 것도 고통을 피하려는 동기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유기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피하려 하는지를 떠나서는 무엇이 강화이고 무엇이 처벌인지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제2세대에서는 인지가 본격적으로 심리학과 심리치료의 대상이 되면서 인지행동치료(Cognitive Behavioral Therapy: CBT)가 발전했다. 같은 사건도 어떻게 해석하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정서와 행동이 달라진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다만 행동을 넘어 인간의 내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면 인지뿐 아니라, 인지와 행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동기도 본격적으로 다루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나는 실패했다”는 생각이 왜 고통스러운가? 성공하고 싶고 유능한 사람이고 싶은 동기가 있기 때문에 실패라는 생각이 그 동기의 좌절을 만들어낸다. 내가 제안한 동기상태이론에서는 스트레스를 동기의 좌절 또는 좌절예상으로, 웰빙을 동기의 충족 또는 충족예상으로 본다. 동기가 없다면 좌절도 충족도 없으며 따라서 스트레스도 웰빙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동기 없는 스트레스는 없으며, 동기 없는 심리증상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인지에서 다시 동기로
최근 이른바 제3세대 또는 제3의 물결 인지행동치료에서는 가치와 삶의 방향, 웰빙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마음챙김기반인지치료(MBCT), 변증법적 행동치료(DBT), 수용전념치료(ACT), 긍정심리치료(PPT), 자비중심치료(CFT), 과정기반치료(PBT), 회복지향인지치료(CT-R), 명상·마음챙김·긍정심리 훈련(MMPT) 등이 이러한 흐름에 속한다. 나는 이 흐름에서 동기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고 보고, 이를 동기의 관점에서 통합하여 동기인지행동치료(Motivational Cognitive Behavioral Therapy: MCBT)라고 부른다.*)
대표적으로 ACT는 자신의 가치를 분명히 하고 그 가치에 따른 행동에 전념하는 것을 강조한다. 동기상태이론에서 가치는 동기의 목표이며, 여러 구체적인 목표에 방향을 제시하는 상위 목표이다. 따라서 가치에 전념한다는 것은 건강한 상위 동기를 확립하고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Beck의 인지치료 전통에서 발전한 CT-R 역시 증상에만 주목하지 않고 개인의 관심, 가치,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열망에 초점을 둔다.
내가 개발한 MMPT 역시 MCBT의 한 형태이다. 명상 훈련과 마음챙김 훈련으로 스트레스와 심리적 문제를 다루는 동시에, 긍정심리훈련을 통해 건강한 동기와 그에 부합하는 인지·행동을 확립하고, 건강한 동기의 충족을 통해 웰빙을 증진한다.
동기를 강조한다고 해서 인지와 행동의 중요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건강한 동기를 확립하고 조정하는 데 인지가 중요하고, 그 동기를 충족하려면 행동이 필요하며, 행동의 결과는 다시 동기와 인지에 영향을 준다. 따라서 동기를 중심에 놓을수록 오히려 동기·인지·행동을 함께 다룰 필요성이 분명해진다.
이처럼 현대 심리치료의 관심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가?”로, 치료의 초점은 증상감소에서 웰빙증진으로 변화하고 있다. 동기상태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좌절된 동기와 그로 인한 증상에만 주목하기보다,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고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 즉 건강한 동기를 확립하고 그 충족을 추구하는 데 관심을 두는 변화이기도 하다. 제1세대 학습이론에 암묵적으로 들어 있던 동기가 제2세대에서 인지가 전면에 부각되면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다가, 제3세대에 와서 다시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업은 습관적인 정보처리패턴이다
심리학의 관점에서 업은 반복된 동기·인지·행동이 형성한 습관적인 정보처리패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떤 동기를 마음에 두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에 부합하는 생각과 행동이 반복되면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고 반응하는 일정한 마음의 방식이 형성된다. 따라서 업은 ‘나쁜 일 하나를 했으니 나중에 나쁜 결과 하나를 받는다’는 식의 단순한 교환관계로만 이해할 일이 아니다. 불건강한 동기와 그에 따른 생각과 행동이 습관적인 정보처리패턴으로 자리 잡으면 새로운 상황에서도 반복적으로 활성화되어 지속적으로 고통을 만들어낼 수 있다. 과거의 업이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학적 경로를 이러한 습관적인 정보처리패턴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동기를 마음에 두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 감사할 것을 찾고자 하는 의도나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자비의 동기를 자주 활성화하면 그에 부합하는 생각과 행동도 늘어난다. 우리 마음의 정보처리용량은 제한되어 있으므로 건강한 동기와 그에 부합하는 인지·행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질수록 불건강한 정보처리패턴은 상대적으로 약화된다. 우리가 무엇을 마음에 두고 반복하느냐는 결국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가와 관계된다.
이러한 변화 가능성은 심리학의 오랜 기본입장이기도 하다. 학습이론과 행동치료는 학습된 것은 새로운 학습을 통해 변화할 수 있다고 보며, 오늘날 뇌과학의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 연구도 경험과 학습에 따라 뇌가 변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이를 뒷받침한다. 업은 반복을 통해 굳어질 수 있지만 고정된 것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불선업은 불건강한 동기를 중심으로 인지와 행동의 정보처리패턴을 만들어가는 것이고, 선업은 건강한 동기를 확립하고 그에 부합하는 생각과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건강한 정보처리패턴을 만들어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과거의 불선업과 그 결과에만 매달리기보다 지금부터 선업을 짓는 데 힘쓰는 것은, 증상감소에 머물지 않고 건강한 동기의 충족을 통해 웰빙을 적극적으로 증진하려는 최근 심리치료의 흐름과도 통한다.
행동과 인지를 거쳐 현대 심리치료가 다시 동기에 주목하는 것은 2,500여 년 전 붓다가 업의 핵심으로 세타나를 강조한 가르침을 새롭게 돌아보게 한다. 과거의 업은 오늘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오늘 어떤 동기를 마음에 두고 살아가느냐는 내일의 나를 다시 만들어간다. 업은 굳어질 수 있지만 고정된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업은 운명이 아니며, 지금 우리는 새로운 업을 지을 수 있다.
*) 김정호 (2023). 제117회 (사)한국상담학회 통합학술대회 및 사례발표회: ‘동기인지행동치료(MCBT)와 명상‧마음챙김‧긍정심리 훈련(MMPT)’.
https://www.youtube.com/watch?v=Ya5SalIvxAs
김정호
현재 덕성여자대학교 심리학과 명예교수이며 한국MMPT심리협회 회장이다. 한국심리학회 회장, 한국건강심리학회 회장, 대한스트레스학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마인드 리터러시 함양을 통해 성장과 행복을 증진하는 명상‧마음챙김‧긍정심리 훈련(MMPT)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보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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