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모든 비극은 어디서 시작되었나

우리는 같은 법계에서 산다
- 개인의 업에서 사회의 업으로
[업(業),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다]



개인의 행위에서 비롯되는 업

우리는 살아오며 많은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철학적으로 고찰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 속에는 과학과 철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일어난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른 생명보다 우월하고 존엄하다는 인식을 이러한 학문을 통해서 설명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렇다 보니 인류의 역사 속에 종교가 생겨나게 되었고, 종교는 이러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 그리고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교리를 통해 설명한다.

그러나 모든 현상을 지금 당장 벌어진 상황만으로 확인하고 판단하는 건 불가능하고, 때때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도 일어난다. 이러한 삶의 불규칙성과 불합리함을 종교는 ‘신’이라는 절대자를 통해 우리에게 설명하고 납득시켜 왔다. 물론 지금도 신을 중심으로 한 종교에서는 이러한 신의 뜻과 결정이 우리 인간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고, 인간은 그것에 따라, 또는 그것을 발견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로 여겨진다.

하지만 2,600년 전 고대 인도 사회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해 생겨난 불교는, 이러한 신에 의한 인간의 삶을 부정하며, 인간의 삶과 더불어 생명 있는 모든 존재의 삶은 태어남(生)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살아감(生)으로 이뤄지고, 그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행(行)에 의해 지금이 형성되고 다음을 만드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신의 결정과 배려가 아니라면, 무엇이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가? 불교는 그것을 행行에 의한 ‘업(業, Karma)’으로 여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업’이라 하면 ‘업보(業報)’라는 단어와 함께 부정적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아무래도 업보에 관한 표현이 ‘업대로 산다’, ‘업이 두텁다’ 등의 안 좋은 이미지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업’에는 좋은 과보를 가져오는 ‘선업(善業)’과 고통스러운 과보를 가져오는 ‘악업(惡業)’이 존재하며, 우리가 풍요롭고 안락한 삶을 살고자 할 때는 선업을 쌓아 그러한 결과가 일어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인락과 악인고과(善因樂果 惡因苦果)’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업은 ‘자업자득(自業自得),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시스템에 의해 ‘행위의 주체자에게 언젠가 반드시 다른 형태로 되돌아온다’는 원칙이 적용된다. 이에 관해 경전과 논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어떤 사람의 업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반드시 그것을 저지른 사람이 그것을 받는다. 어리석은 자는 죄를 만들고, 내세에서 몸에 괴로움을 받는다 (Sn 666).

대기 중에도 바닷속에도 깊은 산속의 동굴에 들어가도 죽음이 없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대기 중에도 바닷속에도 깊은 산속의 동굴에 들어가도 업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Divy.561. 5-7).

이처럼 불교에서 업은 자신이 행한 것에 대한 결과로 여겨지며, 자신이 자신의 삶과 내일을 이루는 것이라고 설한다. 이는 시간적 업의 개념으로, 나의 과거로 인해 지금이 생겨나고, 지금은 다음으로 이어져 계속해 영향을 준다는 업에 관한 통념이다.

우리 모두는 함께 살아가는 법계의 공업중생

이러한 업의 개념은 대승불교가 되며 크게 변화하게 된다. 바로 공간적 업의 개념으로 확장되며, 단순히 행위의 주체자만의 업이 아닌, 같은 공간에 함께 살아가며 영향을 주고 받는 모든 존재로 업이 확장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정토교의 아미타불 신앙이 이러한 공간적 업의 변화를 보여준다. 법장비구로서 48대원을 세워 ‘누구라도 내 이름을 부르며 극락왕생을 바란다면 내가 그들을 그곳에 태어나게 하겠다’라는 서원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고, 법장비구가 아미타불이 되었다는 것은 모든 중생들이 그의 서원에 의해 극락왕생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미타불이 자신의 서원으로 수행한 결과를 대신 받게 되었고, 그러한 수행의 공덕과 선업이 중생에게 회향(廻向)되는 것이 바로 공간적 업의 개념이다.

공간적 업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중생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이를 ‘공업중생(共業衆生)’이라 하는데, 한 개인으로는 각자의 업으로 삶을 살아가지만, 같은 공간 속에서 함께 살아가기에 각자의 업을 넘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례로 이제 여름이 되면 더위를 넘어 얼마나 뜨거울까를 걱정한다. 올해도 42도가 넘는 지역이 생겨나고, 온 지구가 화탕지옥과 같이 달궈져 자연재해에 가까운 시기를 보냈다. 이는 여름만이 아니라 다른 계절에도 극한의 추위와 여러 재해 등을 걱정해야 한다. 왜 이런 일이 지구에서 벌어지는 것이고, 우리는 왜 이런 일을 걱정하고 피해를 입어야 하는가? 바로 우리 인간이 지금까지 지구가 우리만의 것이라고 생각하며 함부로 해온 지난 행동의 과보가 지금 이렇게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구라는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공업중생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변하기를 기다리기 전에 내 마음부터 변해야

불교는 한 개인(一)의 삶을 통해 전체(一切)의 삶을 이루고, 그 전체(十方) 속에서 다시 한 개인(一微塵)이 삶을 살아가는 연기(緣起)적 모습을 설한다. 바로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 이러한 공간적 관계성을 설하는 가르침이다.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은 다름 아닌 내일의 ‘나’에게 더욱 뜨거운 여름을 가져다주고, ‘나부터 실천해야지’라는 바른 생각은 자신이 바라는 삶과 세상을 선사해 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해 작용하고 도움되길 기대한다. 그러나 현실은 항상 나만을 외면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같은 공간인 법계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들은 서로의 영향을 주고받고 있으며, 그 자신도 또한 그러한 영향을 전하고 있는 중요한 존재이다. “보살이 청정한 불국토를 이루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하니, 마음이 청정해지면 그에 따라 불국토도 청정해진다(若菩薩欲得淨土 當淨其心 隨其心淨 則佛土淨).”는『유마경』의 가르침과 같이, 세상이 변하기를 기다리기 전에 자신의 마음부터 변해야 한다.

업은 분명 한 개인의 행에 의해 생겨나 그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이지만, 그 한 개인은 사회 속에서 살고 있고 사회의 영향을 받는 존재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해지고 안락한 삶을 살기 위해 오늘도 부지런히 하루를 살고 있다. 이러한 발원은 분명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 하나만의 행복과 편의가 아닌, 우리의 행복과 편의를 위해 이제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오늘도 이곳에서 모든 것을 함께하고 영위하는 같은 법계의 공업중생이기 때문이다.

 

법장 스님
일본 하나조노대학 대학원에서 계율학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해인사승가대학 학감을 역임하고, 현재는 동국대 wise캠퍼스 겸임교수,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아사리, 일본 국제선문화연구소 연구원 등으로 활동 중이며, BTN불교텔레비전 투계(戒)더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에 『범망경 보살계의 흐름』이 있고, 번역서로 『인터넷 카르마』,『업이란 무엇인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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