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적멸보궁! 그 빛과 깨달음 속으로 / 영축산 통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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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살 찬란한 통도사 |
도시의 소음이 귀를 먹먹하게 만들고, 스크린의 빛이 눈을 피로하게 하며, 수천 개의 알림이 마음의 고요를 조각조각 잘라낼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진다. 그 어딘가가 반드시 머나먼 곳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거리가 아니라 방향이다. 바깥으로 향하던 시선을 안으로 돌리는 것, 그것이 진짜 여행의 시작이다.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행정 주소로는 이렇게 건조하게 표현되지만, 이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 그 어떤 주소도 의미를 잃는다. 영축산의 품 안에 안긴 통도사는 단순한 사찰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우주이며, 하나의 질문이며, 천사백 년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살아있는 경전이다. 내 견딜 수 없는 피로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무작정 짐을 꾸렸다. 나는 통도사에 여러 번 와봤지만, 이번 여행은 장소의 이동을 넘어 마음의 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은 내게 이런 질문을 많이 한다. 작가님은 슬럼프가 올 때 어떻게 하세요. 우울하고 힘들 때는 무엇을 하시나요. 그토록 많은 슬럼프와 우울을 겪었지만 나 또한 정답은 없었다. 이번 슬럼프는 특히 길었다. 좀 더 오래, 좀 더 깊이 내 감정의 밑바닥과 만나보고 싶었다. 이 기나긴 우울의 터널을 빠져나가기 위해, 나는 짐을 꾸렸다.
무풍한송로, 소나무 길을 걷다
통도사로 들어가는 길은 서두르는 자를 허락하지 않는다.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이어지는 약 일 킬로미터의 소나무 숲길, 무풍한송로. 바람 한 점 없어도 솔향이 흐른다는 이 길은, 수백 년 된 소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팔을 뻗어 만든 초록의 터널이다. 나무들은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굽어 있지만, 그 굽음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곧게만 자란 것들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제 방식대로 살아온 것들이 아름답다는 것을 이 소나무들은 말없이 가르쳐준다.
발걸음을 늦추자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계곡물 소리, 새소리, 바람이 솔잎 사이를 지나는 소리. 도시에서는 이 모든 소리가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그것들이 하나하나 선명하게 귀에 닿았다. 이 길을 걷는 것 자체를 수행의 시작처럼 느껴진다. 세속의 공간에서 성스러운 공간으로 넘어가는 이 경계의 길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호흡을 고르고 마음을 가다듬게 된다. 일주문을 지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다른 시간 속으로 들어선다. 그것은 시계가 멈추는 시간이 아니라, 시계가 필요 없어지는 시간이다.
아잔 차 스님은 말했다. 숲은 평화롭다, 왜 당신은 그렇지 않은가. 당신은 혼란을 일으키는 것들을 붙잡고 있다. 자연이 가르치도록 두어라. 새의 노래를 듣고 놓아버려라. 그 말이 이 길 위에서 비로소 살아났다. 나는 새소리를 들었고, 그 소리를 잡으려 하지 않았다. 소리는 왔다가 사라졌다. 나는 그 사라짐을 슬퍼하지 않았다. 그 순간, 내 마음을 팽팽히 조이고 있었던 오랜 긴장감이 내 안에서 느슨해졌다.
금강계단, 부처가 없는 법당
통도사를 비롯한 적멸보궁에는 대웅전에 불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찰에서 대웅전은 황금빛 불상이 중심을 차지하고, 신도들은 그 앞에 엎드려 절을 올린다. 그러나 적멸보궁의 대웅전은 다르다. 법당 안에 불상 대신 창문이 있고, 그 창문 너머로 금강계단이 보인다. 금강계단 안에는 신라 선덕여왕 시절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 부처님의 사리가 곧 부처님이니, 불상이 따로 필요 없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나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얼마나 깊은 믿음이어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믿음은 단순한 맹신이 아니라, 오랜 수행과 성찰을 통해 도달한 어떤 확신이었을 것이다. 법당 안에는 불상이 없었다. 하지만 그 비어 있음 속에서 나는 무언가 더 가득 찬 것을 느꼈다. 불상이 있을 때 우리는 불상을 향해 절을 올린다. 불상이 없을 때 우리는 무엇을 향해 절을 올리는가. 그 질문 앞에 서는 순간, 절의 의미가 달라진다. 우리는 바깥의 무언가를 향해 절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곳을 향해 절을 하는 것이다.
금강계단 앞에 서면 이상한 고요함이 찾아온다. 그것은 소리가 없는 고요함이 아니라, 소리가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이다. 바람이 불고, 새가 울고, 멀리서 목탁 소리가 들려와도, 그 모든 것이 고요함을 깨뜨리지 않고 오히려 고요함의 일부가 된다. 외부의 소란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소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중심을 찾는 것. 통도사는 불보사찰이라 불린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도사의 진정한 보물은 사리탑 안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이 공간 전체에, 이 공기 속에, 이 땅을 밟는 모든 이의 발걸음 속에 스며 있다.
예불, 내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
예불 소리는 마치 거대한 파도가 내 마음의 제방 속으로 밀려들 듯, 그렇게 힘차게 내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두드리곤 한다. 언제 들어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수백 년 동안 이 공간에서 반복되어온 소리, 수천 명의 수행자들이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말을 외웠던 그 소리의 울림이 벽과 기둥과 바닥에 스며 있다가, 지금 이 순간 다시 깨어나는 것 같았다. 나는 절을 올렸다. 처음에는 몸이 어색했다.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고, 두 손을 귀 옆으로 들어 올리는 오체투지. 이 동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처음에는 몰랐다. 그냥 형식적으로 따라 했다. 그런데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 절을 반복하는 동안 무언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마가 바닥에 닿는 순간, 나는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온몸으로 느꼈다. 그것은 복종이 아니었다. 오히려 해방이었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 내가 모든 것을 알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내가 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 허락이 절을 올리는 동작 속에 담겨 있었다. 절은 아만, 즉 자아에 대한 집착과 교만을 내려놓는 수행이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이마를 가장 낮은 곳인 땅에 대는 것은, 내 안의 가장 높은 것을 가장 낮추는 행위다. 그리고 그 낮춤 속에서 역설적으로 우리는 더 넓어진다. 자아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나와 세계 사이의 벽이 조금씩 얇아지는 것이다.
촬영과 메모를 마치고 하늘을 바라보니, 낮 동안의 파란 하늘과 이제 어두워 오는 감청색 하늘이 섞이면서 보랏빛 물이 들어가는 듯 보였다. 빛이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빛이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 경계가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리 내면의 어둠에서 깨달음의 빛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저물어가는 하루의 끝에서 되새겨 보게 되었다.
통도사의 건축, 돌 위에 새긴 철학
통도사의 건축물들은 단순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불교 철학을 공간으로 구현한 것이다. 사찰의 배치는 일주문에서 시작해 천왕문, 불이문을 거쳐 대웅전에 이르는 구조를 가진다. 이 문들을 하나씩 통과하는 것은 세속에서 성스러움으로, 미혹에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상징한다. 불이문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둘이 아닌 문이라는 뜻의 이 문은, 선과 악, 나와 너, 삶과 죽음, 부처와 중생이 본래 둘이 아니라는 불이의 진리를 담고 있다. 우리가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누어 보는 한, 우리는 항상 한쪽을 원하고 다른 쪽을 거부하는 갈등 속에 있다. 그러나 그 경계가 사실은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것임을 알 때, 갈등은 사라진다.
대웅전의 처마 곡선은 하늘을 향해 살짝 들려 있다. 이 곡선은 단순한 미적 선택이 아니라, 무거운 것이 가벼워지는 역설을 표현한다. 기와의 무게를 받치면서도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려는 듯한 그 곡선에서, 나는 수행의 역설을 보았다. 세상의 무게를 짊어지면서도 그것에 짓눌리지 않는 것, 현실 속에 있으면서도 현실에 매이지 않는 것. 석등들은 경내 곳곳에 서 있다. 어둠을 밝히는 등불은 불교에서 지혜의 상징이다. 무명, 즉 어리석음의 어둠을 밝히는 지혜의 빛. 그 빛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켜지는 것이다. 석등은 그것을 상기시킨다. 당신 안에 이미 빛이 있다고.
아잔 차 스님은 또 이렇게 말했다. 달콤하게 익은 망고가 이미 어린 초록 망고 안에 있는 것처럼, 지혜는 당신 자신 안에 있다. 법은 마음속에 있다, 숲속이 아니다. 통도사의 건축 전체가 이 가르침을 돌과 나무와 기와로 구현하고 있었다. 바깥을 아무리 아름답게 만들어도, 그것은 결국 안을 향한 손짓이다. 가장 아름다운 법당은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 통도사는 그 마음의 법당으로 가는 길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경내는 고요했다. 법당의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이 가끔 바람에 흔들려 맑은 소리를 냈다. 금강계단 앞 돌계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들은 수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오는 빛이다. 내가 지금 보는 저 별빛은 그 별이 수억 년 전에 내보낸 것이다. 어쩌면 저 별은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빛은 여전히 여행 중이고, 지금 이 순간 내 눈에 닿는다.
이것이 연기(緣起)가 아니고 무엇인가. 수억 년 전의 별과 지금 이 순간의 나 사이에 이어진 빛의 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 시간을 넘어, 공간을 넘어.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씨앗이 모든 존재 안에 있다는 것. 그것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 별빛처럼 모든 곳에 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듯,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우리의 불성을 가린다. 수행은 그 구름을 걷어내는 과정이다.
풍경이 다시 울렸다. 그 소리가 밤 공기 속으로 퍼져나가다가 사라졌다.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더 깊은 고요가 남았다. 나는 고요 속에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냥 있었다. 그 순간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알 수 없다. 시간이 멈춘 것 같기도 했고,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처음으로 제대로 느낀 것 같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그 순간 나는 완전히 여기 있었다는 것이다. 과거도 미래도 없이, 오직 이 밤, 이 별, 이 고요, 그 속에 ‘나’가 있었고, 문득 그 아름다운 존재들 사이에서는 ‘나의 삶을 잘 살아내야 한다’는 집착조차 기쁘게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우리가 찾는 것은 이미 여기에
통도사에는 오래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절을 처음 세운 자장율사가 당나라 오대산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문수보살이 승려로 화현하여 나타났다. 문수보살은 부처님이 친히 입으셨던 가사 한 벌과 진신사리 백 과, 부처님의 머리뼈와 손가락뼈를 건네며 말했다. 그대의 나라 남쪽 영축산 기슭에 독룡이 거처하는 신지가 있으니, 거기에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이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삼재를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러 천룡이 그곳을 보호하게 되리라고.
자장율사는 귀국하여 용들이 산다는 못에 이르러 용들을 위해 설법을 하여 제도하고 못을 메워 그 위에 금강계단을 쌓았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항복한 독룡 가운데 오직 한 마리의 눈먼 용만은 굳이 그곳에 남아 터를 지키겠다고 굳게 맹세하였으므로, 자장율사는 그 용의 청을 들어 연못 한 귀퉁이를 메우지 않고 남겨 머물도록 했다고 한다. 그곳이 지금의 구룡지인데, 아무리 심한 가뭄이 와도 전혀 수량이 줄어들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사나운 독룡조차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법을 만나 터를 지키는 수호자가 된다는 이 이야기 속에, 불교의 드넓은 자비가 담겨 있다. 선과 악, 용과 인간, 세속과 성스러움의 경계를 허무는 것. 그것이 통도사가 천사백 년 동안 이 자리에서 지켜온 정신이다.
영축산의 소나무들은 오늘도 거기 있을 것이다. 금강계단의 사리탑은 오늘도 거기 있을 것이다. 새벽 예불의 독경 소리는 오늘도 법당을 가득 채울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지친 마음으로, 빈 그릇으로, 아무 기대 없이. 우리는 그 사이에서, 조금씩, 우리 자신으로 돌아간다. 스스로를 등불로 삼아라. 스스로를 빛으로 만들어라. 그 등불이 어디에 있는지 나는 통도사에서 조금 알 것 같았다. 그것은 멀리 있지 않았다. 무풍한송로를 걷는 내 발걸음 속에 있었다. 금강계단 앞에서 이마를 땅에 대는 그 낮춤 속에 있었다. 스님들이 공양을 마치고 발우를 씻는 손길 속에 있었다. 그리고 별빛 아래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그냥 앉아 있었던 그 고요 속에 있었다. 우리가 찾는 것은 언제나 이미 여기에 있었다. 다만 우리가 너무 빠르게 달리고 있어서 보지 못했을 뿐이다. 멈추어야 보인다. 낮추어야 열린다. 비워야 담긴다. 통도사가 천사백 년 동안 이 자리에서 전해온 가르침이 내게도 스며들고 있었다. 비움으로써 마침내 흘러가는 느낌, 멈춤으로써 마침내 그곳에 도달하는 느낌이 온몸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글/정여울__작가.『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데미안 프로젝트』저자, KBS 정여울의 도서관 진행자
사진/이승원__작가.『공방예찬』,『학교의 탄생』,『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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