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숨어있다 / 김천 청암사
최근 화제의 드라마 <멋진 신세계>의 여주인공 강단심(신서리) 캐릭터는 장희빈을 모티브로 삼았다. 조선시대 악녀가 갑자기 현대 사회로 떨어지게 되면 어떨까, 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것이다. 드라마에서 왕은 실제 역사에는 등장하지 않는 ‘안종’이고, 여주인공은 ‘강희빈’으로 등장하지만 궁에서 사약을 받는 장면이 등장하는 순간, 누가 보더라도 그녀가 ‘장희빈’을 모델로 했음을 알 수 있다.
장희빈과 인현왕후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악녀의 대명사는 ‘장희빈’이다. 그리고 장희빈과 정반대편에 서 있는 인현왕후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가련하고 안타까운 현모양처의 대명사이다. 두 여인은 한 남자를 남편으로 두었다. 바로 조선 제19대 숙종이 그 주인공이다. 장희빈은 궁녀 출신으로 숙종의 총애를 받아 후궁의 자리에 오르고 왕자를 낳은 뒤 마침내 왕비가 되었다. 반면 인현왕후는 왕비의 자리에 있는 동안 한 번도 회임하지 못했고 숙종의 냉대 속에서 폐출되었다. 하지만 폐출된 인현왕후는 다시 궁으로 돌아와 왕비의 지위를 차지했고, 장희빈은 다시 후궁으로 강등되었다가 숙종의 명에 따라 자진하여 생을 마감했다.
작자 미상의 궁녀가 썼다는 소설『인현왕후전』에서는 인현왕후의 모든 고통의 원인이 장희빈의 미모와 요사스러움 때문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한다. 소설에서 말하길, 인현왕후는 태어날 때부터 상서로웠고 하늘이 내린 복이자 나라의 복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반면 장희빈은 미모로 임금을 유혹한 요녀이고, 아들을 낳은 후에는 감히 왕비의 자리를 노린 악녀이다. 소설『인현왕후전』은 절대로 왕을 비난하지 않는다. 왕은 본디 훌륭하나 장희빈이라는 불가항력의 매력을 지닌 요녀로 인해 ‘잠시 성총이 흐려지신 것’ 뿐이다. 반면『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소설과 전혀 다르다. 실록에서 숙종은 장희빈을 향한 총애와 인현왕후에 대한 냉대를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사관은 기록의 마무리에 이를 걱정하고 한탄한다.
장씨를 책봉하여 숙원으로 삼았다. 전에 역관 장현은 국중(國中)의 거부로서 (중략) 장씨는 곧 장현의 종질녀이다. 나인으로 뽑혀 궁중에 들어왔는데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 (중략)
우리 성상(숙종)의 영명하고 강의한 자질로서도 오히려 이같이 전에 없던 비상한 거조가 있었으니, 심하도다. 여자를 총애함이 마음을 고혹시키고 덕을 해침이여, 아! 어찌 크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12월 10일
폐출된 인현왕후가 머문 청암사
장희빈이 숙종의 승은을 입은 것은 숙종 6년(1680)이다. 이해 10월 26일, 세자 시절부터 함께해온 왕비 인경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인경왕후는 딸만 둘을 낳았으나 모두 요절하였고, 유산 후 몸조리 중 천연두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당시 숙종 또한 건강이 좋지 않았기에 명성대비가 주도하여 왕비의 장례를 치렀다. 이후 건강을 회복한 숙종은 증조할머니인 자의대비의 처소에서 한 궁녀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녀가 바로 훗날의 장희빈이다. 이때 숙종의 나이는 혈기 왕성한 스무 살, 장희빈은 스물두 살이었다.
숙종이 궁녀에게 승은을 내렸다는 소식을 들은 명성대비는 장씨를 보자 그녀가 장차 나라의 화근이요, 숙종을 미혹할 것을 염려하여 곧바로 출궁시켰다. 그리고 숙종의 옆자리를 굳게 지켜줄 계비를 서둘러 간택한다. 왕비가 승하하면 삼년상이 지난 후에 새로운 왕비를 간택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대비와 노론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모든 절차를 무시했다. 인경왕후가 세상을 떠난 지 100일도 되기 전, 왕비 간택이 진행되었고 숙종 7년(1681) 4월, 민유중의 둘째딸이 왕비로 간택되었다. 그렇게 부랴부랴 왕비가 된 여인이 바로 인현왕후다.
숙종은 한눈에 반하여 승은을 내린 장씨와 억지로 헤어졌고, 원치 않는 여인을 왕비로 맞아야 했으나 인현왕후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삼 년 후, 숙종의 어머니 명성대비가 세상을 떠났다. 숙종 12년(1686) 어머니의 3년상을 마친 숙종은 출궁했던 장씨를 다시 궁으로 데려온다. 언제, 어떻게 데려왔는지에 대한 내용은 없으나 실록은 숙종이 장씨를 위해 남몰래 전각을 지었다는 풍문을 기록하고 있다. 장씨는 궁녀 출신이었기에 내명부의 후궁 품계 중 가장 지위가 낮은 종4품 숙원으로 봉해졌다. 하지만 2년 만에 숙원 장씨는 정2품 소의로 승격한다. 그때 소의 장씨는 숙종의 아이를 회임하고 있었다.
숙종 14년(1688) 10월, 소의 장씨는 왕자를 낳았다. 숙종의 첫아들이었다. 숙종은 왕자를 낳은 장씨의 품계를 정1품 희빈으로 승격했고, 동시에 왕자의 명호를 원자로 정하여 종묘와 사직에 고했다. 이 모든 과정은 왕자가 태어난 지 석달도 되기 전에 일사천리로 이루어졌으니 이는 곧 숙종의 강력한 의지였다. 적장자 계승을 원칙으로 하는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세운 조선에서 ‘원자(元子)’로 불릴 수 있는 왕자는 오직 왕과 왕비의 장남, 적장자뿐이었다. 원자의 명호를 정하여 종묘와 사직에 고하는 것은 그가 곧 왕위를 계승할 후계임을 공표하는 것이었다.
인현왕후를 지지하는 노론은 숙종의 결단이 지나치게 성급하다며 반대했으나 결과는 대대적인 숙청이었다. 숙종6년(1680) 이후 줄곧 집권 여당의 자리를 지켜왔던 노론은 하루아침에 실각하였고 정승판서와 같은 고관들은 유배를 가거나 처형되었다. 숙종15년(1689) 5월 4일, 숙종은 인현왕후를 서인으로 강등하여 왕비의 자리에서 폐위하고 출궁시킨다. 그리고 같은 날 교지를 내려 희빈 장씨를 왕비로 삼았다.
장희빈이 왕자를 낳았을 때, 그녀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초산에 노산이었고 난산이었다. 원자 책봉, 희빈 승격, 왕비 폐출, 왕비 책봉은 장희빈이 미색으로 임금을 유혹하기 어려운, 한창 산후조리를 하고 있던 시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인현왕후, 산사에서 희망을 기도하다
폐출된 후 인현왕후는 몇 명의 시녀들과 함께 친정집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곳이 바로 안국동에 있는 ‘감고당’이다. 인현왕후의 친정어머니는 송씨는 그녀가 여섯 살일 때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 민유중 또한 장희빈이 왕자를 낳기 전 세상을 떠났기에 집에는 여인들뿐이었다. 친정 오빠인 민진후와 민진원 또한 노론의 중진이었기에 폐출된 여동생을 보살피기 어려웠다.
인현왕후는 궁 밖에서 5년을 머물렀고, 숙종20년(1694) 마침내 숙종의 부름을 받고 환궁하여 왕비의 자리에 복위한다. 인현왕후가 궁 밖으로 내쳐졌던 5년 동안, 그녀는 친정집에만 머문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김천 청암사에서 머물며 보광전에서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 증거가 바로 복위된 이듬해 인현왕후가 청암사에 보낸 편지 ‘인현왕후어제등록’이다. 인현왕후는 청암사 스님들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며 편지와 함께 비녀와 잔 그리고 신발을 선물로 보냈다고 한다. 편지의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이제야, 내가 환위하고서도 전보다 갑절이나 간절히 밤낮없이 운 스님, 적 스님과 같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옷과 발우를 다 팔아서 신령한 절을 중창하고, 축원하는 전각을 새로 지으셨다 들었습니다. 스님께서 저를 위해 마음 쓰심과 제가 스님을 위해 은혜에 감사함은 다른 이가 말할 바가 아니겠지요. 그래서 스님들께 비녀와 잔과 신 3가지를 신표로 바꾸어 보내드립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인현왕후는 과연 청암사에서 무엇을 기도했을까. 자신의 복위를 기도했을까, 노론의 재집권을 기도했을까. 아니면 장희빈의 폐출을 바랐을까. 인현왕후의 흔적과 조선 시대의 역사를 간직한 청암사는 매년 인현왕후 복위 행사를 하고 9km에 달하는 ‘인현왕후둘레길’을 복원하여 걷는다. 인현왕후가 서러움의 시간을 기도로 승화한 청암사는 이제 그녀를 기리는 많은 사람이 찾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품은 사찰이 되었다.
조민기|한양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했다. 영화사를 거쳐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근무하다가 칼럼니스트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현재는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조선임금잔혹사』,『3분만에 읽는 조선왕조실록』,『부처님의 십대제자–경전 속 꽃미남 찾기』, 『범일국사』등이 있다.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