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불교 이야기
전쟁 속에서 들려온 한마디, 불연의 시작
부처님오신날에 어머니를 모시고 원찰인 경기 양주시 장흥면 오봉산 석굴암을 찾았다. 올해는 어머니 무릎이 편찮으셔서 처음으로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절 계단을 오르셨다.
우리 어머니는 1933년 계유(癸酉)생 이시니, 만으로 아흔 셋이 되셨다. 일제 강점기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 현대사의 격변기를 정말 치열하게 온몸으로 헤쳐 나오셨다.
어머니와 외할머니, 그리고 오봉산 석굴암의 인연은 1951년 6.25전쟁의 와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여고를 갓 졸업한 어머니는 전쟁이 터지자 지병으로 양주 장흥면 친정에 요양을 가 계시던 외할머니가 걱정됐다.
무작정 길을 나서 천신만고 끝에 외가에 도착한 어머니는 1.4후퇴로 마을사람들이 모두 피난가 텅 빈 집안에 홀로 누워계신 외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그때부터 1년여간 단신으로 외할머니 곁을 지키며 간병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병석에 누워만 계시던 외할머니가 벌떡 일어나 외치셨다. “오봉산 석굴암 부처님이 나를 부르시는구나.” 그 길로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석굴암으로 들어가신 외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40여 년간 속세로 나오지 않으셨다.
사실 어머니나 외할머니는 그 이전까지만 해도 불자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십리 넘게 오봉산 속 깊숙이 파묻혀 있는 석굴암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외할머니가 현몽을 통해 석굴암 부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루아침에 병석을 떨치고 석굴암으로 걸어 들어가셨으니 인근 사방에 그 영험담이 퍼져 나갔다.
어머니가 외할머니를 모시고 석굴암에 가 보니 격전지였던 도량은 전화로 모두 불타버리고, 석굴 앞에 젊은 스님과 스님의 어머니가 다 쓰러져가는 움막 속에서 복원기도를 하고 계셨다고 한다. 그렇게 세 분의 40여년 석굴암 중창불사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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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관광공사 |
폐허 속에서 피어난 수승한 기도도량, 오봉산 석굴암
오봉산 석굴암은 본래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로, 고려 말 왕사였던 나옹화상이 3년간 수행하셨을 정도로 영험이 높은 우리나라 3대 나한기도 도량의 하나였다. 그런데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모두 소실되어 버렸고, 남은 것이라곤 불에 그을린 부처님 두 분과 다라니 경판, 청기와 한 장뿐이었다고 한다.
석굴암 중창불사에 50년 가까이 매진하시다 입적하신 중창주 초안 큰스님은 본래 강원도 통천이 고향인데, 금강산에서 수행하다 해방 후 북한지역이 되자 어머니를 모시고 월남하신 효자였다. 6.25전쟁 때 총상을 입은 상이군인이기도 하셨지만, “당연히 나라를 위해 할 일을 했을 뿐” 이라며 입적하실 때까지 국가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으실 정도로 강직하고 청렴한 성격을 지니신 수행자의 표상이셨다.
은사인 동암 큰스님으로부터 “수승한 기도도량인 오봉산 석굴암을 복원하라”는 부촉을 받으시고, 맨 몸으로 어머니와 함께 전사자들의 시신이 널린 잿더미 절터에 움을 트신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합류하게 되신 것이다. 당시 외증조할아버지는 장흥면에 한 분 뿐인 변호사일 정도로 지역의 존경받는 유지였지만, 전쟁통에 돌아가시고 외할머니 마저 입산하시자 집안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기와 한 장, 쌀 한 되로 일군 40년 중창불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연(佛緣)으로 새 생명을 얻으신 외할머니는 일심으로 석굴암 중창불사 성취를 발원하고 집과 토지 등 남은 가산을 모두 불사에 화주하셨을 뿐만 아니라, 멀리 삼십여리 떨어진 구파발과 의정부까지 식량과 물자들을 이고 져 나르면서 탁발을 다니셨다고 한다. 거기에 외할머니가 부처님의 가피로 병석을 떨쳐내신 영험담이 근동에 퍼져 나가면서 신도들과 시주가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석굴암 중창불사는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1969년 청와대를 습격한 김신조 간첩 일당이 인근 우이령을 거쳐간 것이 확인되면서 석굴암 진입로가 군부대에 의해 이후 30년 가까이 출입통제된 것이다. 지금도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된 북한산국립공원 우이령 탐방로로 사전예약한 탐방객들에 한해 개방되고 있지만, 그동안 통제 덕분에 서울 인근에서 자연환경이 가장 잘 보존된 곳으로도 꼽히고 있다.
이처럼 기와 한 장, 쌀 한 되도 일일이 십리 길을 이고 져서 일구어 가는 형극의 중창불사가 40여년간 이어진 끝에 석굴암이 가람의 면모를 차츰 되찾아 갔고 현재의 사격을 갖추었다. 그렇지만 중창불사에 혼신의 힘을 모두 쏟아 부으신 노보살님(스님 어머니), 외할머니, 초안 큰스님 등 세 분의 중창주들은 차례로 세연(世緣)을 다하셨으니, 그 무한공덕을 어찌 다 필설(筆舌)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80년대가 되어서야 전기가 들어올 정도로 열악한 사중 살림 속에서도 외할머니는 주변의 부모 잃고 갈 곳 없는 아이들을 10여명 키워 주셨지만, 학교도 갈 수 없고 고립된 환경을 못 이겨 철이 들자 모두 떠나버렸다고 한다. 다행히 마지막으로 9살 때 들어오신 분이 지금의 주지 도일스님이시니, 그 역시 석굴암 나한님의 부르심이 아닐까 생각된다.
출가 대신 이어온 아흔셋 어머니의 새벽 기도
다시 우리 어머니 얘기로 돌아가 보면 외할머니를 모시고 석굴암에서 10여 년 불사를 함께 했던 어머니는 비구니 출가를 발원했지만, 외할머니는 “불사에 바치는 것은 나 하나로 족하다”면서 아버지와 혼인시키셨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세 살 때 두 아들만 남기고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외할머니는 어머니가 생계를 이어가도록 두 손자를 석굴암에서 2년이나 키워주셨다. 이후에도 방학 때면 우리 두 형제는 석굴암에서 외할머니의 보살핌 속에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다.
어머니는 홀로 두 아들을 키우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하셨는데, 직장 동료분의 말씀에 따르면 점심을 한 번도 사드신 적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매일 새벽 3시부터 하루 세 차례 경전을 펴고 두 아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게 어머니의 가장 중요한 일상이다.
강태진 |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불교신문 기자와 불교TV 보도국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코바코) 상임감사를 거쳐 현재 코바코파트너스(주) 대표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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