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대원청년회 워크숍] 대한불교진흥원 구상진 이사장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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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회 대원청년회 워크숍 단체 사진 |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대학생 불교수련의 의의'라는 주제로, 지금 이 시대 대학에서 부처님의 법을 전하고 스스로 닦아나가는 일이 얼마나 위대하고 중차대한 사명인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대학생활이 가지는 인생과 문명사적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대학생활은 성인으로서 완전한 자격을 갖추는 마지막 단계라고 합니다. 졸업 후 대학원 과정이나 다른 전공으로 대학생활을 계속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대학을 졸업하면 생업을 가지고 가정을 이루는 등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됩니다.
인간은 다른 생물과 달리 오랜 역사를 통해 높은 수준의 문명과 문화를 구축해 왔습니다. 따라서 출생 시 물려받은 생물학적 능력 외에, 문명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후천적 학습과 훈련이 필수적입니다. 가정과 학교에서 이어져 온 이 과정은 통상 대학생활을 통해 종합적·전문적으로 완성됩니다.
인간과 대학생활을 이렇게 이해하는 데에는 상당한 학문적 근거도 있습니다.
철학적 인간학자 아르놀트 겔렌(Arnold Gehlen)은 『인간: 그의 자연과 세계 안에서의 위치』(1940)에서 인간을 ‘생물학적 결함을 극복하는 존재’로 규정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동물의 선천적 본능을 넘어 도구·언어·법·국가 등의 '제2의 자연(die zweite Natur)'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이를 후천적으로 학습하고 전수한다고 보았습니다.
문화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Clifford Geertz) 역시 『문화의 해석』(1973)에서 인간의 뇌와 신경계가 문화(도구·언어·관습)라는 환경 속에서 함께 진화(공진화)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문화적 청사진(blueprints)이 없다면 인간은 아예 정상적인 행동을 제어할 수 없는, 기능 불능의 괴물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교육학』(1803)에서 "인간은 오직 교육을 통해서만 인간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고,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은 『교육과 사회학』(1922)에서 교육을 '선천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개인을 사회적 존재로 재창조하는 과정'으로 정의하며, 국가의 법·도덕·언어적 규칙을 내면화하는 과정이 곧 인간화 과정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처럼 기성 사회의 법과 도덕·학문 그리고 과학 기술과 문화를 배우고 내면화하는 것은 인간이 문명인으로서 사회에 발을 딛고 서기 위한 견고한 주춧돌이자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이 대학 교육에 성실히 임해야 합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배우자를 만나는 일을 포함하여 평생의 바탕이 될 후천적 인간관계의 주요부분을 형성하고, 100년을 넘을 수도 있는 인생의 행로를 설계해야 하기에, 대학생들은 시간도 경제적 자원도 체력도 늘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제반 상황을 피상적으로만 보면, 대학생이 불교수련을 하는 것은 불요불급한 시간과 노력 낭비로 오해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상은 전혀 다릅니다. 이 중차대한 시기에 일생의 토대가 될 훌륭한 성과를 얻으려면 무엇보다 삶의 바른 방향을 정립해야 하고, 이를 추진해 나갈 힘과 지혜를 갖추어야만 합니다. 불교는 이 세 가지 모두에 가장 효율적이고 바른 해법을 제공합니다. 당장의 수강과목 학습 등 당면과제 처리에도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기존의 틀을 넘어서서 새로운 이치를 규명할 힘을 주고, 나아가 궁극적 해탈로 이끌 세세생생의 가르침을 주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불교가 알 수 없는 언어와 의식에 갇힌 채, 비합리적으로 복이나 비는 기복 종교로 오해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800년대부터 서구가 불교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이래, 특히 최근 인공지능에 온갖 불교 경전과 불교문화 데이터가 입력되면서, 불교는 인류의 가장 수승한 가르침으로 확고히 재인식되고 있습니다. 뇌과학의 발달과 함께 명상운동이 세계적으로 대중화되고 있는 흐름도 이와 궤를 같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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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상진 이사장 |
저는 1970년대에 당대의 선지식이자 종정이셨던 서옹 스님으로부터 받은 고귀한 가르침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스님께서는 “불교는 자연의 이치를 규명하는 연기(緣起) 원리를 가르치고, 아집(我執) 등 불합리한 집착을 깨뜨려 사람 사이의 가장 훌륭한 협력 체제를 만들므로, 장차 인류를 지도하게 될 것이다. 젊은이들이 이 가르침을 접하는 것은 자신에게 더없는 행복이고, 인류를 위하여도 참으로 값진 일”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근자의 사례만 보더라도, 맹목적인 신앙이나 교조적인 이데올로기가 인류 사회에 얼마나 큰 해악을 미치는지, 어떤 대립과 분쟁을 야기하는지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유일신 신앙 체계는 수많은 종파로 갈라져 극단적인 대립을 이어가고 있으며1), 세속적 절대주의로 치환된 공산주의 명령경제 체제 역시 역사의 심판대 위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효율성을 억압하다가 몰락했습니다. 학술적으로도 사적 소유권의 보장과 사적 자치의 원칙은 단순한 물질적 탐욕이 아닌, 개인이 국가 권력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된 주체로 서기 위한 최소한의 제도적 담보입니다. 시장의 자생적 신호 체계인 '가격'을 무시한 인위적인 통제는 극심한 빈곤을 낳을 뿐입니다. 과거의 지혜로운 국가 정책이 사적 소유와 자유시장 경쟁을 확고한 전제로 삼아 시장의 합리성을 극대화하는 '유도적 계획'이었던 반면,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독재적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습니다.2)
이처럼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나는 세속의 완고한 도그마와 인습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보다 스스로 얽매이게 만드는 한계를 지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방법은 팔정도(八正道, Āryāṣṭāṅgikamārga, The Noble Eightfold Path)와 육바라밀(六波羅蜜, Ṣaḍpāramitā, The Six Paramitas·Six Perfections)로 구체화되어 있습니다. 수행자의 마음가짐은 『천수경』 계청의 '10대 서원'에 명시되어 있고, 최종적으로는 '사홍서원(四弘誓願)'으로 집약됩니다.
팔정도, 즉 괴로움을 소멸하는 여덟 가지 바른 길은 부처님이 초전법륜에서 설하신 사성제(四聖諦) 중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인 '도제(道諦)'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바르다(正)'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인 선을 넘어, 연기와 중도의 이치에 부합한다는 뜻입니다.
① 정견(正見-바르게 보기, samyak-dṛṣṭi, Right View · Right Understanding): 세상의 실상인 사성제, 연기법, 무상·고·무아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편견이나 아집 없이 객관적으로 진리를 바라보는 지혜를 수련하는 과정입니다. 세속 학문의 대부분이 연기적 상관관계를 탐구하는 방편지(方便智)에 속하므로, 정견 수련은 전공과목을 학습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② 정사유(正思惟-바르게 생각하기, samyak-saṅkalpa, Right Resolve · Right Intention):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탐욕•분노•해치려는 마음에서 벗어나 온화하고 자비롭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③ 정어(正語-바르게 말하기, samyak-vāc, Right Speech): 거짓말(망어)•이간질하는 말(양설), 거친 말(악구)•꾸며대는 말(기어)을 하지 않고, 진실하며 화합을 이루는 유익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④ 정업(正業-바르게 행동하기, samyak-karmānta, Right Action):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고(살생), 주지 않는 것을 가지지 않으며(투도), 삿된 음행을 저지르지 않는 등 몸으로 짓는 행위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⑤ 정명(正命-바르게 생활하기, samyak-ājīva, Right Livelihood):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부정한 방법이 아닌, 정당하고 도덕적인 생업을 통해 건전한 생활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⑥ 정정진(正精進-바르게 노력하기, samyak-vyāyāma, Right Effort): 이미 생긴 악은 끊고,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은 일어나지 못하게 하며,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은 일으키고, 이미 생긴 선은 더욱 키워나가는 끊임없는 정신적 노력입니다.
⑦ 정념(正念-바르게 깨어있기, samyak-smṛti-사티, Right Mindfulness): 자신의 몸과 느낌, 마음, 마음의 현상(身·受·心·法)을 매 순간 잊지 않고 명확하게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⑧ 정정(正定-바르게 집중하기, samyak-samādhi, Right Concentration): 마음의 산란함을 가라앉히고 한 대상에 깊이 집중하여 삼매(Samadhi) 상태에 이르는 것으로, 이는 본질을 꿰뚫는 깊은 통찰력을 얻는 강력한 기반이 됩니다.
옛 큰스님들께서는 삼매가 깊어져 움직일 때나 고요할 때나 늘 여여한 ‘동정일여(動靜一如)’, 나아가 잠을 잘 때나 깨어있을 때나 화두가 한결같은 ‘몽매일여(夢寐一如)’의 단계에 도달하면, 인간의 정신력이 비약적으로 증대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마치 렌즈의 촛점을 잘 맞추면 일상의 태양빛으로 불을 일으킬 수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정견 정사유는 혜(慧), 정어 정업 정명은 계(戒), 정정진 정념 정정은 정(定)에 속하며, 이를 줄여 불교를 계·정·혜 삼학(三學)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제가 겪어 본 고시공부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첫 단계가 의자에 앉아서 버티는 것이라고 합니다. 책 읽기가 모래알 씹는 것처럼 힘들어 송곳 위에 앉기라도 한 것처럼 금방 일어나곤 하다가, 어느 순간 책에 몰입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되면 공부가 나아가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7개 과목 기본서 1만 쪽을 정독하는데 100일 가량이 걸렸는데, 몇 년씩 낙방하는 사람은 낙방 후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시작하는데 수개월, 공부를 시작하였다가 흔들려 술 먹고 빈둥거리느라 수개월, 시험에 임박하여 다시 당일치기하듯 들볶기 한두 달 등으로 1회독도 제대로 못한 채 다시 응시하는 것이 연중행사가 되어 진보가 없다고도 합니다. 이와 같이 고시공부에서도 정명, 정정 등 8정도는 유효합니다. 다른 일에서도 같을 것입니다.
육바라밀(Ṣaṭpāramitā)은 대승불교의 여섯 가지 이타적 실천행입니다. ‘바라밀(Paramita)’은 ‘도피안(度彼岸)’, 즉 괴로움의 이 언덕에서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뜻입니다. 육바라밀은 나 혼자만의 해탈에 머물지 않고,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보살(Bodhisattva)의 필수 덕목입니다.
① 보시 바라밀(布施-베풂, dāna-pāramitā, Generosity · Giving): 조건 없이 베푸는 행위입니다. 재물을 주는 재시(財施),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법시(法施), 두려움과 불안을 없애주는 무외시(無畏施)가 있습니다. 이는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주었다'는 상(相)이 없는 삼륜청정(三輪淸淨)의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3)이어야 합니다.
② 지계 바라밀(持戒-계율 준수, śīla-pāramitā, Morality · Ethical Conduct): 도덕적 규범과 계율을 지켜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유지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스스로를 단속함으로써 평온을 얻는 기반이 됩니다. 지계는 강제적 금지가 아니라 보호입니다. 보호를 벗어나면 많은 위험이 있고, 더러 돌이키기 어려운 번뇌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③ 인욕 바라밀(忍辱-인내, kṣānti-pāramitā, Patience · Forbearance): 모욕이나 고통, 시련을 당해도 분노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너그럽게 참아내는 것입니다. 단순히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연기의 이치를 알아 마음에 동요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금강경에는 인욕선인으로 절절지해되었을 때 4상이 없어 참는다는 마음도 없었다4)고 되어 있습니다.
④ 정진 바라밀(精進-끊임없는 노력, vīrya-pāramitā, Energy · Diligence · Effort): 선을 행하고 깨달음을 구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고 낙담 없이 꾸준히 나아가는 용맹정진의 자세입니다.
⑤ 선정 바라밀(禪定-마음의 평온, dhyāna-pāramitā, Meditation · Concentration): 산란한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 고요하고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외부 환경이나 내면의 번뇌에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기르는 수행입니다.
⑥ 반야 바라밀(般若-궁극적 지혜, prajñā-pāramitā, Wisdom): 만물의 실상인 공(空)과 연기(緣起)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지혜입니다. 앞의 다섯 가지 바라밀이 눈먼 이의 걸음이라면, 반야는 길을 인도하는 눈과 같습니다. 반야 지혜가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바라밀이 완성됩니다.
팔정도의 정어·정업·정명은 육바라밀의 지계·인욕과 통하여 도덕적 실천을 이루고, 정정진·정념·정정은 정진·선정으로 이어져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며, 정견·정사유는 반야 지혜로 귀결되어 아집을 깨뜨립니다. 결국 팔정도가 나를 닦아 괴로움을 소멸하는 견고한 주춧돌이라면, 육바라밀은 그 지혜를 바탕으로 대중 속에서 자비를 실천하며 깨달음으로 함께 나아가는 역동적인 돛과 같습니다.
8정도에 관하여 청담 스님은 자주 인간의 영원불멸한 본성(불성, 佛性)을 '본래 때 묻지 않은 투명한 거울'에 비유하셨습니다. 거울 자체는 원래 맑고 깨끗하여 세상의 온갖 삼라만상을 가감 없이 그대로 비춥니다. 앞에 붉은 꽃이 오면 붉게 비추고, 검은 가시가 오면 검게 비추지만, 거울 자체가 붉어지거나 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대상이 떠나면 거울은 다시 본래의 청정함으로 돌아갑니다. 즉, 우리의 본래 마음(원성실성)은 세속의 어떤 고통이나 번뇌에 직면할지언정 결코 오염되거나 파괴되지 않는 절대 자유의 자리라는 뜻입니다. 중생이 괴로움 속에서 방황하는 이유는 자기 마음 거울에 묻은 '허망한 환상과 집착의 때'를 거울 자체로 착각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중생은 탐욕· 분노 그리고 기성 사회가 주입한 완고한 도그마와 인습(변계소집성)이라는 먼지를 마음 거울에 잔뜩 묻혀 두고 살아갑니다. 이 때문에 거울에 비친 왜곡된 그림자(我相)를 진짜 '나'라고 집착하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끊임없이 시비장단과 대립을 일으켜 스스로 고통의 굴레(12연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수행의 본질은 새로 거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마음 거울 표면에 묻어 있는 허망한 아집과 맹목적 교리의 때를 닦아내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매 순간 내 마음 거울에 어떤 먼지가 끼는지 명확히 알아차리고(정념, 사티), 흔들림 없이 고요하게 가라앉히면(정정, 삼매), 거울은 본래 지니고 있던 위대한 반야의 안목인 정견(正見-바르게 보기)을 저절로 회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 거울에 관하여는 중국 선종의 신수와 혜능 이야기가 유명합니다. 달마의 법이 순차로 혜가(慧可)•승찬(僧燦)•도신(道信)•홍인(弘忍)에게 이어졌는데, 홍인이 제자들에게 공부한 것을 게송으로 발표해 보라고 하자 수제자격인 신수(神秀)가 “身是菩提樹(신시보리수)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 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 勿使惹塵埃(물사야진애) -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으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가 앉지 않도록 하라”라는 게송을 붙였답니다. 다른 제자들이 감히 글을 올리지 못하는데, 글자를 모르는 혜능(慧能)이 다른 사람을 시켜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 本來無一物(본래무일물) 何處惹塵埃(하처야진애) - 보리에 나무 없고 거울 역시 대가 아니며,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 먼지가 앉으리오"라는 취지의 게송을 쓰게 하여 붙이자, 홍인이 이것도 깨달은 글이 아니라고 하면서 지우게 하고는 밤중에 몰래 혜능을 불러 가사를 전했다고 합니다.
『천수경』계청에 나오는 '10대 서원(十大願)'을 여러분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① 원아속지일체법(願我速知一切法) - 세상의 모든 진리를 조속히 깨닫게 하소서.
② 원아조득지혜안(願我早得智慧眼) - 실상을 꿰뚫어 보는 지혜의 눈을 하루빨리 얻게 하소서.
③ 원아속도일체중(願我速度一切衆) - 고통받는 모든 중생을 조속히 구제하게 하소서.
④ 원아조득선방편(願我早得善方便) - 중생을 건질 훌륭한 방편을 하루빨리 얻게 하소서.
⑤ 원아속승반야선(願我速乘般若船) - 지혜의 배에 조속히 올라타 고해를 건너게 하소서.
⑥ 원아조득월고해(願我早得越苦海) - 괴로움 가득한 이 세상을 하루빨리 뛰어넘게 하소서.
⑦ 원아속득계정도(願我速得戒定道) - 계율과 선정과 지혜의 길을 조속히 얻게 하소서.
⑧ 원아조등원적산(願我早登圓寂山) - 번뇌가 사라진 열반의 경지에 하루빨리 오르게 하소서.
⑨ 원아속회무위사(願我速會無爲舍) - 집착이 없는 절대 자유의 집에 조속히 다다르게 하소서.
⑩ 원아조동법성신(願我早同法性身) - 부처님의 몸인 법성신과 하루빨리 하나가 되게 하소서.
이것을 압축한 것이 4홍서원의 “①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끝없이 많은 중생을 모두 건지겠습니다. ②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다할 줄 모르는 번뇌를 모두 끊겠습니다. ③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끝없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두 배우겠습니다. ④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가장 높은 깨달음인 불도를 모두 이루겠습니다.”입니다.
이 서원은 수행과 인생의 길고 지루한 여정 속에서,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가장 명확하고 선명한 인생의 내비게이션(이정표)이 되고 또한 원력에 상응하여 무한한 추진력을 줍니다.
목표가 흐릿한 사람은 작은 시련에도 갈지자로 방황하지만, 이 위대한 서원의 고속도로에 진입한 청년은 도중에 비바람이 불지언정 가장 바르고 빠르게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반열반에 드시기 직전 고구정녕(苦口丁寧)히 이르셨습니다. “너희들은 마땅히 정진하여라. 비유하자면 작은 물방울이 끊임없이 떨어지면 마침내 돌을 뚫는 것과 같으니라. 마음을 자주 쉬어 게으름을 피운다면, 그것은 마치 불을 붙이려 나무를 비비다가 뜨거워지기도 전에 그만두는 것과 같으니, 어찌 불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 가르침을 받들어 선가에서는 의심과 조급증이 일어날 때,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 이치를 보라”고 경책해 왔습니다.5) 불교의 정진은 단박에 이루어지는 초현실적인 요행이 아닙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꾸준히 나아가는 일상의 지속입니다. 부처님을 마음에 두고(염불, 念佛) 그렇게 묵묵히 정진한다면, 인생의 중요한 길목에서 헤매거나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는 일을 막을 수 있습니다. 불안과 근심에서 벗어나 삶의 큰 힘을 얻는 가피(加被)도 입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대학생 불교수련은 단순한 심신 치유나 교양 쌓기가 아니고 많은 공덕이 있습니다. 성실히 수행하면 학업에서나 일상에서나 많은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훨씬 높고 깊은 곳을 향합니다.
부처님께서는 탄생의 일성(一聲)으로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를 선언하셨고, 중생에게 부처의 길을 열어 보이고 중생으로 하여금 그 길을 깨달아 들어가게 하는(開示悟入) '일대사인연(一大事인연)'으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안목에서 볼 때, 인류가 가진 현 단계의 세속 문명은 결코 최종적인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인간 생명의 본질은 무한한 '불성(佛性)'이기에, 제도 교육의 틀에 절대적으로 제약되지도 않습니다.
근세 서구의 대사상가들과 혁신가들이 정규 제도 교육의 한계를 넘어 경이로운 성취를 이룬6) 바탕에는, 기존에 있던 외부의 지식을 답습하는 수준을 넘어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 스스로 새로운 방도를 창조해 내는 '인간 내면의 근원적 통찰력과 직관의 힘'이 있었습니다.
과거 일제강점기 시절 무학의 고통 속에서도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대한 바탕을 만드신 우리 선조들, 한 예로 초등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으로도 세계적인 기업을 일구어낸 정주영 회장의 사례 역시 인간 내면의 이 위대한 본질적 지혜가 발현된 사례라 할 것입니다.
특히 인공지능(AI)의 출현으로 기존의 지식을 암기하고 습득하는 일의 중요성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오늘날, 내면의 근원적 지혜를 끌어내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어느 때보다 중차대합니다.
지식의 양을 자랑하는 시대는 끝났으며, 이제는 근원적 통찰을 다스리는 지혜와 인격적 성숙이 인간의 격을 결정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식과 스펙을 아무리 높이 쌓아 올린들, 그것이 인생의 근원적인 고통과 불안까지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청년들은 무한 경쟁의 궤도 속에서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당하며 스스로를 불안해합니다. 기성 사회가 짜놓은 틀을 성실히 답습하는 '수동적 모범생'으로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 지금 대학 교육의 안타까운 단면입니다.
어찌 마당에 단층집을 짓는 공법과 설계도를 가지고 100층짜리 대건물을 세우고, 우주를 항행할 우주선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세속의 유한한 지식과 인습의 논리로는 인생 연결망과 우주라는 거대한 건축물을 온전히 지어 올릴 수 없습니다.
대학생 시절에 불교를 접하고 수련한다는 것은 세속의 단편적인 지식(識)을 전수받는 낮은 단계를 넘어, 우주의 근원적 진리를 꿰뚫어 보는 '지혜의 눈(智慧眼)'7)을 뜨는 내적 혁명의 시작입니다.
세상이 주입한 지식과 가치관이 현재까지의 연기 상태이고, 변전해 나가는 원리가 있다는 것을 간파해야만, 청년들은 자기 삶의 온전한 주인으로 인류문화의 새 지평을 개척해 나가는 창의적 지성이 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을 모신 전각을 우리는 '대웅전(大雄殿)'이라 부릅니다. 세속의 권력과 칼로 천하를 정복해서가 아니라, 당대의 강력한 인습을 타파하고 자기 내면의 번뇌를 굴복시켜 우주적 각성을 이루셨기에 부처님을 '위대한 영웅, 대웅(大雄)'이라 일컫는 것입니다. 틀에 박힌 교조적 안목과 태도로는 결코 궁극의 진리와 해탈이라는 무한한 바다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대학생으로서 불교를 수련하는 것은 기성 틀 안에서 안주하는 삶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일상의 성실함을 바탕으로 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창의적 리더로 거듭날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차대한 기회입니다. 이 불성(佛性)을 발휘하는 지혜의 안목을 갖춘 청년이야말로 현실의 학업과 취업, 그리고 결혼이라는 인생의 중대사에서 올바른 성취를 이루면서 상생과 화합을 이루는 원만한 결실을 거두게 됩니다.
① 학업 성취의 혁신: 다수 학생들이 시험 점수와 학점이라는 좁은 틀에 갇혀 불안과 슬럼프에 시달릴 때, 지혜의 안목을 품은 청년은 흔들림 없는 집중력과 메타인지를 발휘합니다. 학업의 의무에 성실히 임하되 지식을 맹목적으로 쫓아가지 않고 학문의 본질을 주체적으로 탐구하기에, 창의적이고 깊이 있는 학업 성취를 이루게 됩니다.
② 취업과 사명의 성취: 오늘날 많은 청년이 기성 사회의 문법에 맞춰 획일화된 스펙 쌓기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 속에서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자비의 원력과 주인의식을 가진 청년의 기상은 단연 돋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취업은 생계를 구걸하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전문성과 '선방편(善方便)'을 펼칠 무대를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당당한 행보가 됩니다.
③ 지혜로운 결혼과 가정: 결혼 역시 조건과 외적인 상(相)만을 비교하는 세속적 계산법으로는 결코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연기법(緣起法)의 이치를 깨달아 나를 낮추고 상대방을 온전히 포용할 줄 아는 성숙한 도량이야말로, 평생을 함께할 진정한 반려자를 알아보고 서로를 성장시키는 가장 성숙하고 지혜로운 가정을 가꾸는 힘이 됩니다.
이처럼 불교수련은 세속을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의 성실한 대학생활 속에서 불안을 지워내고, 학업과 일과 사랑이라는 삶의 현실에서 가장 당당하고 유능하게 인생을 꾸려가는 대자유인을 길러내는 길입니다.
『금강경』에는 부처님께 육안(肉眼) 이외에도 천안·혜안·법안·불안이 있으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또한 수련을 통해 현실 세계를 성공적으로 경영하는 것을 넘어, 점차 이러한 위대한 반야의 안목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불교동아리 지도자 여러분! 여러분은 머지않아 과학·기술·문화·법조·의료·경영·정치 등 우리 사회의 앞날을 이끌어갈 예비 리더들입니다. 여러분이 닦은 불교적 사유는 여러분이 가지게 될 전문 지식과 힘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명확한 이정표를 제시해 줄 것입니다. 연기법을 깨닫고 지혜를 갖춘 인재는 세상의 지식에 지배당하지 않고 그것을 부리는 주인이 됩니다. 여러분이 사회에서 펼치게 될 학문과 전문성은 나만의 영리나 영달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고통받는 중생들을 관념의 감옥에서 걸어 나오게 하는 ‘해탈의 기술’이자 ‘훌륭한 방편(善方便)’이 될 것입니다.
능력을 갖추되 대자비심을 바탕으로 세상을 치유하는 인재가 되는 것, AI가 보여주는 지식의 연기적 연결망[識]의 머리 위에 올라타, 그것을 대자비의 원력으로 부릴 줄 아는 반야 지혜[智]를 갖추는 것, 이것이 바로 불교수련이 길러내는 격조 높은 인간 완성의 극치입니다.
서산대사께서는 “사람의 몸을 얻기는 눈먼 거북이가 나무를 만나는 것 같고, 부처님 법을 만나기는 우담바라꽃이 피는 것 같다8)”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지도자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귀한 인연으로 부처님의 정법을 만났으니, 자신의 수련에 그치지 말고 청년 전법의 당당한 주역이 되어 주십시오. 선가(禪家)에서는 “사자의 새끼는 사자가 되고, 여우의 태생은 아무리 자라도 끝내 여우일 뿐이다9)” 등으로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정진하는 주체적 기상을 강조해 왔습니다.
여러분은 대학 교정에서 주어진 틀에만 갇혀 있는 수동적 인재를 기르는 이들이 아닙니다. 성실한 일상의 학업 위에 웅장한 사유와 창의성을 더하여 현실의 삶을 완벽하게 경영해 내는 주체적 인재들을 길러내는 전법의 역군들입니다.
이번 수련대회를 통해 여러분 스스로가 먼저 세속의 집착과 불안의 사슬을 끊어내는 대자유인의 기상을 다지고, 나아가 외롭고 방황하는 학우들의 가슴속에 지혜와 창의성의 씨앗을 심어주시기 바랍니다.
대학생이라는 시기에 불교를 접하는 것은 종교적 신앙을 갖는 차원을 넘어, 인생 전체의 뼈대를 세우고 인간으로서의 격(格)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입니다.
1) 대표적으로 아브라함과 하느님 간의 약속에 기초한 유일신 신앙(Abrahamic religions)은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로 갈라진 것도 모자라, 다시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러시아 등), 개신교의 여러 종파와 성공회(영국), 그리고 이슬람의 수니파와 시아파 등으로 나뉘어 극한의 대립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의 피비린내 나는 갈등은 그들이 그토록 외치던 '하느님의 사랑'과 '신 앞의 경건'이라는 대원칙을 의문스럽게 만들고 있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공산주의 역시 '거꾸로 뒤집힌 기독교'에 불과하다고 날카롭게 간파한 바 있다. 기독교의 '천국'은 공산주의의 '지상낙원'으로, '교회'는 '공산당'으로, '성직자'는 '당 간부'로, '성서의 가르침'은 '당의 교리'로, 그리고 ‘원죄(인간의 타락)’는 ‘사유재산제와 계급의 발생’으로 치환된 또 하나의 변형된 절대주의 종교라는 것이다.
2) 마르크스와 레닌은 자유사회의 경제 체제를 ‘자본주의’라 매도하며, 그것이 내재적 원리에 의해 필연적으로 멸망하고 공산체제로 이행될 것이라 강변했다. 그러나 역사의 심판대 위에서 정작 몰락한 것은 경제적·정치적 불합리로 가득했던 공산주의 체제였다. 학술적으로도 사적 소유권의 보장과 사적 자치의 원칙은, 일부의 주장처럼 단순한 물질적 탐욕을 허용하는 제도가 아니고, 인간이 국가 권력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된 주체로서 존엄성과 자유를 누리기 위한 최소한의 ‘제도적 담보’이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 A. Hayek)가 그의 명저 「노예의 길」에서 지적했듯, 생산수단을 독점한 국가 권력은 필연적으로 개인의 직업과 거주•사상까지 지배하여 인류를 참혹한 ‘노예의 길’로 이끌 수밖에 없다. 또한, 사회주의 명령경제 체제가 실패한 근본 원인은 인간의 이기심을 통제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소유와 교환 속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되는 ‘시장가격(Market Price)’이라는 인류 최고의 합리적 신호 체계를 인위적으로 소멸시켰기 때문이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가 일찍이 ‘사회주의 경제계산 불가능의 정리’를 통해 증명했듯이, 가격이라는 나침반 없이는 자원의 효율적 배분과 경제적 합리성을 달성할 방법이 없다. 결국 권력의 독단적인 계획은 필연적으로 극심한 빈곤과 공급 부족을 낳을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과거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을 좌파의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동일시하는 세간의 선전은 완전한 왜곡이자 악의적인 억지이다. 소시민이나 기업이 미래를 위해 계획을 세우듯, 국가가 경제적 예측과 유도를 위해 정책적 ‘계획’을 세우는 것은 시장의 합리성을 보완하고 극대화하기 위한 지혜로운 방편일 뿐이다. 사적 소유권과 시장 자체를 원천 부정하며 자원을 강제로 배분하는 명령경제의 ‘독재적 계획’과, 사적 소유와 자유시장 경쟁을 확고한 전제로 삼아 가격 신호를 중심으로 수립되는 시장경제의 ‘유도적 계획’은 그 궤를 완전히 달리하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 듯 좌파와 우파가 공존해야 한다느니, 좌우를 떠난 중도로 통합해야 한다느니 하는 견해 역시 정법이 아니다(불교문화 2026년 6월호 “세속적 중도는 가짜 중도다” 참조)
그러나 자유시장 경제체제도 인간을 소외시키는 물질 만능주의 등 팔정도와 육바라밀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은 교정해 나가야 할 것이다.
3) 시자청정(施者淸淨)•수자청정(受者淸淨)•시물청정(施物淸淨). 주는 나도 없고(無我), 받는 상대방도 없고(無人), 주고받는 물건도 없이, 자연스런 대자비심의 발현이어야 한다는 의미.
4) 제14 이상적멀분(離相寂滅分 第十四) “아어왕석 절절지해시에 약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면 응생진한(我於往昔 節節支解時에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면 應生瞋恨)”
5) '수적석천(水滴石穿)'. 《유교경》 「점수천석 삼가탄만(點水穿石 參禪怛慢)」 : 떨어지는 물방울이 돌을 뚫으니, 참선하는 이는 게으름을 경계하라; 「비여소수수 삼첨습석(譬如小水常流 則能穿石)」 : 비유하자면 작은 물일지라도 끊임없이 흐르면 마침내 돌을 뚫는 것과 같다.; 《채근담》 「수적석천 승거목단(水滴石穿 繩鋸木斷)」 : 물방울이 끊임없이 떨어지면 돌을 뚫고, 새끼줄도 톱질을 계속하면 나무를 자른다.
6) 예컨대, 근세의 대사상가였던 벤저민 프랭클린, 대정치가였던 조지 워싱턴과 에이브러햄 링컨, 대과학자였던 마이클 패러데이와 토머스 에디슨은 모두 정규 제도 교육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최근의 스티브 잡스나 일론 머스크 역시 학교에서 배운 지식만으로 그 경이로운 업적을 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뛰어난 사람들의 능력은 기존에 있던 지식을 외부에서 주입해 생긴 것이 아니다. 전자기에 관한 제1법칙과 제2법칙 등 불멸의 과학적 발견을 이뤄낸 패러데이는 가난한 형편 탓에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채 제책소 견습공으로 일하며 책을 읽어 최고의 물리학자가 되었다. 백열등•축음기•영사기•알카리 축전지 등 1,093개의 주요 발명 특허를 낸 에디슨 역시 정규 초등학교 교육을 단 3달밖에 받지 못했다. 이들은 기존 학계의 수학적·이론적 교리에 갇히지 않고, 철저한 실험과 직관을 통해 전자기학과 근대 기술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미국의 뼈대를 세운 워싱턴은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으면서도, 약 6개월간의 영국군 협력 민병대 경험만을 바탕으로 대륙군 총사령관이 되어 영국 정규 대군과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기성 군사학의 교리에 갇히지 않는 탁월한 결단력으로 승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현대적 민주공화국인 미합중국의 출범도 주도했다. 링컨 역시 평생 정규 교육을 받은 기간이 1년 미만이었으며, 프랭클린 또한 2년의 정규 교육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 책을 읽고 끊임없이 사색하며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꿰뚫는 지혜를 체득했다.
또한 스티브 잡스는 리드 대학교를 한 학기 만에 자퇴한 후, 제도 교육의 스펙 쌓기가 아닌 캘리그래피(서체) 수업 등 자신의 직관이 이끄는 배움을 추구하여 기술에 인문학적 반야(般若)를 결합한 스마트폰 혁명을 이룩했다. 일론 머스크 역시 박사 과정을 이틀 만에 그만두고 창업 전선에 뛰어들어, 기존 우주항공 학계가 모두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던 재활용 로켓을 '제1원리 사고법(First Principles Thinking)'이라는 근원적 통찰로 성공시키며 지식의 양이 아닌 본질을 꿰뚫는 지혜의 힘을 증명했다. 이처럼 이 위인들은 기성 사회가 짜놓은 단층집의 문법을 과감히 거부하고, 자기 내면의 반야 지혜와 직관의 힘을 믿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했던 창의적 지혜의 선구자들이었다.
7) 아승기 품에는 1천만(1억이라는 설도 있음)에 해당한다는 구지(俱胝, Koṭi)로부터 각각 그 제곱인 다음 수가 122개 열거되어 있는데 그 마지막이 불가설불가설전이다. 구지 다음인 아유다(阿庾多, Ayuta)는 구지를 1천만으로 볼 때 10¹⁴로서 100조이고, 그 다음 나유타(那由他, Nayuta)는 10²⁸이며, 불가설불가설전은 10^(3.7×10^37)이어서, 이름 그대로 말할 수 없이 큰 수이다. AI 답변으로는 우주 전체의 원자 개수가 약 10⁸⁰개에 불과하고 현존 슈퍼컴퓨터가 다룰 수 있는 가상적 수치(부동소수점 한계 등)를 1.8×10³⁰⁸ 수준이라 보더라도, 화엄경의 불가설불가설전은 인류의 컴퓨터 과학으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한에 가까운 대수(大數)라고 한다. 이러한 수는 제자들도 만들어 낼 수 없었을 것이고, 부처님께서 숫자도 없던 당시에 느닷없이 이런 큰 수를 말씀하신 것은 오늘날에라도 불지견이 어떠한 것인지 짐작하게 하려는 의도셨을 것이다. 또한 화엄경의 기본개념인 해인삼매(海印三昧)는 시공을 초월한 우주의 총체적 상호연기의 실상에 도달한 상태라 할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최종의 우주적 지혜일 것이다.
8) “저 넓은 바다에 한 마리 눈먼 거북이가 살고 있는데, 백 년에 한 번씩 물 위로 머리를 내민다. 바다 위에는 구멍 뚫린 나무 판자 하나가 떠돌고 있다. 이 거북이가 머리를 내밀 때 우연히 그 나무 구멍에 목이 걸릴 수 있겠느냐?” 제자들이 “그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라고 답하자, 부처님께서는 “어리석은 중생이 죄업을 짓고 지옥·아귀·축생의 삼악도에 떨어진 뒤, 다시 사람의 몸을 얻는 것은 이 거북이가 나무 구멍을 만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다.〔김윤수 역주(2019), 『잡아함경Ⅲ』 제406 맹구경, 운주사, 213~214면〕 ; 부처님께서 손톱 위에 흙을 조금 얹으시며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이 손톱 위의 흙과 대지의 흙 중 어느 것이 더 많으냐?” 제자들이 대지의 흙이 비교할 수 없이 많다고 답하자, 부처님께서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존재는 손톱 위의 흙만큼 적고, 사람의 몸을 잃고 삼악도에 떨어지는 존재는 대지의 흙만큼 많다”고 경책하셨다.(위 『잡아함경Ⅲ』 제442 조갑경, 운주사, 72~73면) ; 또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묘장엄왕본사품에는 “부처님을 만나 뵙기는 참으로 어려우니, 마치 우담바라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고, 눈먼 거북이가 바다에서 구멍 뚫린 나무를 만나는 것과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다. 조사들은 “득수인신(得受人身)이 맹구우목(盲龜遇木) 같고, 조봉불법(遭遇佛法)이 우담화(優曇華) 같도다”, 높은 다락방 위에서 바늘을 던져 아래에 있는 바늘구멍에 꿰어지는 것‘(맹인득침 盲人得針)’, 또는 높은 벽 위에 실을 메단 바늘을 던져 아래에 있는 바늘귀에 맞추는 것‘(주벽라사 走壁螺絲)’ 만큼 정법을 만나기 어렵다고도 하였다.
9) 《영가진각선사증도가(永嘉眞覺大師證道歌)》에는 師子兒衆隨後 三歲卽能大哮吼(사자 새끼를 사자 무리가 뒤따름이여 세 살에 곧 크게 소리치는도다), 若是野干逐法王 百年妖怪虛開口(여우가 법왕을 쫓으려 한다면 백년 묵은 요괴가 헛되이 입만 엶이로다), 象駕觴嶸漫進途 誰見螳螂能拒轍(코끼리 수레 끌고 위풍당당히 길을 가거니 버마재비 수레길을 막는 걸 누가 보겠는가) 등의 표현도 있다.
구상진|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검사 생활을 했고, 서울시립대 법학과 교수 및 동 대학 로스쿨 원장, ‘법조불교인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변호사, ‘헌법을생각하는변호사모임’ 명예회장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불교와 자유민주주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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