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는 왜 우리를 더 외롭게 만드는가 — 불이중도로 읽는 SNS 시대의 소통법

[불이중도(不二中道)의 현실적 의의와 적용]


연결되었지만 외로운 SNS의 그림자

과학기술의 발전 덕분에 우리의 삶이 풍요롭고 편리해진 점들을 꼽자면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인간 생활의 기본 조건인 의식주 전반에 걸쳐서 어마어마한 발전이 이루어졌고 지금도 가속되고 있다. 그리고 이동⋅수송 수단과 통신 수단의 발달은 물리적 거리를 넘어 세계를 좁혀 놓았다. 비행기, 열차, 자동차, 배를 타고 어디든지 옛날에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속도로 돌아다닌다. 심지어는 우주에도 드나든다.

근래에는 통신 수단의 발달이 이동 수단의 발달보다 훨씬 더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전화, 인터넷, 이메일, 웹 등 온갖 통신 수단이 스마트폰 하나에 담겨 호주머니에 쏙 들어와서는 하루 종일 우리와 딱 붙어 다닌다. 즉 언제 어디서나 손가락 놀림 몇 번만으로 누구든 연락을 주고받거나 온 세상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게 해준다. 태어날 때부터 그러했던 젊은이들이야 아무런 감흥이 없겠지만, 개인 집에 전화기를 놓는 것이 특권이었던 50여 년 전을 기억하는 노인들은 이런 얘기가 나올 때마다 탄식을 내뱉는다. 세상 참 좋아졌지!

하지만 세상에 좋기만 한 일은 없다. 물론 나쁘기만 한 일도 없고. 이동⋅수송 수단의 발달은 인간의 활동 반경을 획기적으로 넓혔다. 그러나 그 기술은 사람을 연결하는 데만 쓰이지 않았다. 더 먼 곳까지 더 큰 파괴력을 전달하는 무기가 함께 발전했고, 현대사회는 울리히 벡이 말한 ‘위험사회’라는 새로운 역설을 안게 되었다.

통신의 발전에도 명암이 있다. 이제는 일상의 통신에서 전화보다도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SNS(social network service, 사회관계망서비스)는 어떨까. 1970~80년대 전화 모뎀선 상으로 모여서 정보를 교환하고 필담으로 채팅을 하는 BBS(전자게시판)에서 시작된 온라인 커뮤니티는 싸이월드를 거쳐 오늘날 페이스북, 엑스(X), 인스타그램, 카카오톡 등 다양한 SNS로 발전하였다. SNS의 효시가 된 친구 찾기 내지 만들기 플랫폼에서 보듯이, SNS는 잃어버린 관계를 복원하거나 새로운 관계를 쉽게 맺어주는 매우 유용한 도구이다. 특히 소극적이거나 내향적인 사람들에게 대면 소통의 부담을 줄여주어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시작할 수 있는 ‘느슨한 연대’의 기회를 넓혀준다. 옛날식으로 묵직하고 진지하고 끈끈해야지만 친구가 되고 동료가 되어 어울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냥 가볍게 연결되고 쉽게 끊어진다. 또한 자신을 창의적으로 표현하고 오프라인에서는 찾기 힘든 공통의 관심사나 고민을 가진 커뮤니티를 발견함으로써 정서적 지지와 연대감을 얻도록 하는 것도 SNS의 긍정적인 기능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세상에 좋기만 한 일은 없으니, 여기에도 문제가 없을 리 없다. SNS를 통한 소통은 ‘연결되어 있으나 소외된 상태’를 만든다. 클릭 한 번으로 맺어지는 관계는 갈등을 회피하고 보기 좋은 모습만 편집해 보여주는 피상적인 유대에 불과하며 그런 관계는 소외를 대체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때보다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외롭다는 진단이 나온다.

SNS가 주도하는 네트워크 사회의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SNS가 현대 사회의 극단적인 정치적·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핵심 원인이라는 점에 대해 많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스마트폰과 SNS로 24시간 연결되어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극단적으로 갈라져 싸우는 사회현실을 본다. 그 원인은 주로 ‘알고리즘의 상업성’과 ‘인간 심리의 취약성’이 결합한 결과로 진단된다.

SNS의 메커니즘은 ‘좋아요’와 ‘싫어요’, ‘팔로우’와 ‘차단’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선택을 반복하도록 유도한다. 알고리즘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며 확증편향의 성벽을 쌓고, 나와 다른 의견은 틀린 것, 척결해야 할 것으로 몰아가는 심리에 빠지게 한다. 이 끝없는 ‘편 가르기’ 속에서 우리의 관계와 정신은 피폐해진다. 이 이분법의 늪에서 빠져나올 브레이크는 없는가? 불교가 제시하는 불이, 중도, 연기의 통찰에서 이를 위한 지혜를 찾을 수 있다.

불이중도는 갈라진 것을 이어주는 지혜

손바닥과 손등은 겉보기엔 완전히 반대 방향을 보고 있지만, 결국 한 손이다. 동전의 양면도 마찬가지이다. ‘불이’란 ‘너와 내가 똑같다’는 뜻이 아니다. 서로의 차이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의 연결성을 보는 관점이다. 즉 너 없는 나는 존재할 수 없다는 상호의존성(연기법)을 뜻한다. 갈등 상황에서 우리는 흔히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이분법에 갇힌다. 하지만 상대방의 극단적인 주장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결핍이나 두려움이 투영된 결과일 수 있다. 상대를 ‘타도해야 할 적’이 아니라, ‘나와 연결된 공동체의 일부’로 여기는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나 자신을 비롯해서 세상 모든 존재를 독립된 개체로만 보는 게 아니라 상호의존하는 연기적 존재로 보는 것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나와 온 세상 개체들이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는 이치는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가 생명체로서 가지고 태어난 자기중심적인 본능을 넘어서는 이치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식구조를 해체해서 근본적으로 개조해야지만 체득할 수 있다. 그래서 불교의 깨달음은 곧 불이법의 깨달음, 연기법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SNS에서 그 이분법적인 관성에 따르는 쉬운 사용법을 거부하고 실질적인 관계와 소통의 SNS를 활용하기 위한 방법, 그 구체적인 방안 몇 가지를 불이중도의 이치를 바탕으로 해서 생각해 본다.

이분법을 내려놓고 관계를 회복하는 세 가지 방법

우선은 화면 너머에 살아있는 인간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팔정도의 정어(正語) 수행이기도 하다. 말이 글이 되고 댓글이 되는 오늘날, 바른말은 화면 너머의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SNS에서는 텍스트만 보이기 때문에 상대를 실체성을 잃은 무생물로 쉽게 박제해 버린다. 댓글을 쓰기 전에, 화면 너머에 나와 똑같이 상처받고 아파하는 ‘진짜 사람’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비대면과 시차 있는 대화의 탈인간화 함정을 피할 수 있다.

둘째는 ‘좋아요’든 ‘차단’이든 클릭 직전에 쉼표를 찍는 것이다. 특히, 분노를 유발하는 게시글을 보았을 때 즉각적으로 댓글을 달거나 공유하기보다 서너 번의 호흡을 고르는 것으로 쉼표를 찍는다. 이를테면 지관(止觀, 멈추고 바라보기)이다. 내 안의 감정이 ‘분노’로 치우치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극단적 행동으로 이끌고 가는 견인줄이 끊어진다.

셋째는 어떤 글이나 말에서든지 맥락을 읽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조가 빠지고 글자로만 주고받는 대화에서는 맥락이 안 드러나고 어휘들이 표면적인 뜻으로만 전달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늘 경험하듯이 같은 단어라도 대화의 맥락과 환경, 어조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쓰일 수 있다. 그러나 대개 일상적인 어투를 그대로 글로 옮기는 SNS 대화에는 그런 것들이 드러나지 않는다. 거친 표현이 완충장치 없이 전달되고 더욱 거친 반응을 끌어내게 마련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거친 표현으로 응대하기 전에 숨 한 번 몰아쉬고,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화가 났을까?’라는 호기심을 발동시켜서 거친 한마디 뒤에 숨은 상대방의 불안, 인정욕구, 외로움 등을 읽어낸다면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기 전에 제대로 된 소통의 여지가 마련될 것이다.

맥락을 온전히 파악할수록 이분법에서 벗어난다. 어느 쪽이든 극단에는 해답이 없으니 극단에 치우치지 말라는 중도의 이치가 중간의 길을 취하라는 뜻이 아님은 잘 알려져 있다. 양극단을 함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한 차원 더 높고 넓은 정신세계를 갖추라는 뜻이다. 불이중도의 대화는 내 주장을 포기하거나 무조건 상대에게 맞추는 유약함이 아니다. 오히려 내 중심을 단단히 잡은 채 상대방의 존재 가치도 함께 인정하는 가장 용기 있는 소통 태도이다. SNS에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혐오의 말과 마음을 멈추고 서로의 다름이 조화를 이루는 소통의 공간을 가꾸면서 이 갈등의 시대를 건너가기 위한 이런저런 대증요법을 넘어 근본적인 지혜와 방법을 거기에서 찾을 수 있다.

SNS는 사람을 연결하는 기술이다. 그러나 사람을 이어 주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마음이다. 불이중도는 상대를 나와 분리된 적으로 보지 않고 함께 관계를 이루는 존재로 바라보게 한다. 혐오와 단절이 일상이 된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 빠른 통신 기술이 아니라 더 깊은 관계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그것이 불이중도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가장 현실적인 의미일 것이다.

 

윤원철|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미국 스토니브룩 뉴욕 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초빙석좌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로 있다. 『불교사상의 이해』, 『종교와 과학』 등의 공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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