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수행생활 · 세이 린포체 편
스승은 구름과 같고, 제자의 믿음은 대지와 같으니
얼마나 서원이 깊었기에, 그는 사람뿐 아니라 짐승조차 자신의 이름을 듣기만 해도 삼악도에 떨어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을까. 히말라야의 척박한 동굴 속에서 쐐기풀로 연명하며 수행하느라 몸이 푸른색으로 변했다는 전설의 성자. 그 일화가 정말 사실인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가 남긴 서원은 실로 그러하다는 세이 린포체의 말에, 법회에 동참한 반려견 푸코에게로 축하인사가 날아온다.
그의 일대기를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는, 푸코 앞자리에 앉은 노인의 투박한 목소리에선 떨림이 느껴진다. "밀라레빠의 일대기를 읽을 때마다 그 인고와 수행 과정이 너무 처절해서 생각만 해도 울컥하고 눈물이 납니다. 마음이 그냥 미어져요. 그에 비하면 제 수행은 너무나 보잘것없어 그저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이런 제가 감히 그분의 수행을 따라가고, 수행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노인의 고백에 린포체는 “그의 전기를 생각하며 간절히 수행하는 것은 그의 마음을 자극하여 가호와 성취를 얻는 길”이라며 밀라레빠 수행을 적극적으로 해보길 권한다.
"일은 내가 놓지 않으면 절대 나를 놓아주지 않아요. 생업의 분주함에서 벗어난 노년이야말로 인신보배로서 수행하기에 가장 귀한 기회이죠. 그리고 밀라레빠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그 마음이, 내 수행이 부족하다고 생각되어 부끄러움을 느끼는 그 마음이 바로 ‘신심(信心)’이고 ‘정화’입니다. 내 안의 아집이 닦여나가고 있기 때문에 그런 부끄러움이 생기는 겁니다. 그렇게 부끄러워하고 그리워하는 마음 사이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것이 신심이죠. 그 마음이 이미 스승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예요.”
신심은 정화의 결과이며, 정화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묶고 있는 개념이 느슨해져 감을 의미한다. 본래가 공하기에 본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것에 그 의미가 있다.
“티베트에는 ‘스승을 성취한다’는 뜻의 ‘라둡’이라는 말이 있어요. 그것은 스승이 실제로 현신해 곁에 머무는 외적 현상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내적 일치, 본질의 현현을 뜻합니다. 스승의 고독과 스승의 마음, 의지, 사상, 그리고 그분이 쌓은 거대한 공덕 등을 깊이 사유함으로써 내 안에 있는 본연의 스승, 즉 마음의 본성을 온전히 깨닫는 것이 라둡의 목적이죠.”
그러한 상태에서 스승에게 가피를 청함으로써 마음을 변화시켜가는 것. 그것은 과일이 익어가는 과정과도 같다. 적절한 온도와 물, 시간 등 여러 상황과 조건이 쌓여야 과일이 맛있게 익어가고 타인에게 이로움을 주듯, 마음이 익어지려면 가피와 사랑, 공, 연민의 지혜 등이 쌓여야 된다.
“가피는 엄마의 젖줄을 연결하는 것과 같아요. 그 가피력에 의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얻을 것은 본연의 자리를 깨닫는 겁니다. 스승의 가피와 힘, 에너지를 우리에게 들어오게 하는 중요한 열쇠가 바로 ‘신심’이고 ‘간절함’이죠. 그냥 입으로만 스승을 찾는 게 아니라 그에게서 자비와 연민이 일어나도록 온몸에 털이 서고 눈물이 쏟아질 만큼 절절한 마음으로 구해야 해요. 조작함이 없는 간절한 헌신과 신심이 일어날 때, 모든 아집을 내려놓고 스승과 심장으로 연결되는 진실한 마음을 낼 때, 그때 스승의 마음의 본질과 하나가 됩니다.”
린포체의 이 같은 설명에, 밀라레빠만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진다는 노인은 수천 년 전 그가 극한의 고독과 고행 속에서 스승이 사무치게 그리워 “아버지, 마르빠여”라고 외쳤을 때 구름 속에서 마르빠가 나타났다는 일화를 떠올렸을 일이다. 혹은 밀라레빠가 스승과의 합일에 대해 남긴 계송을 떠올리며 또다시 울컥했을지도….
‘스승의 몸은 구름과 같고 제자의 믿음은 대지와 같으니, 스승의 가피라는 비가 내릴 때 제자의 가슴에는 깨달음의 싹이 돋아나누나. 스승과 나 사이에는 한 치의 틈도 없으니, 우리는 이미 한 바다에서 만난 물방울이라.’
밀라레빠의 정신을 이어가는 세이 가문의 길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 살인자가 되었지만, 스승의 혹독한 훈련과 처절한 고행 속에 위대한 성자로 거듭난 밀라레빠. 고통이 인간을 파괴하는 동시에 가장 깊은 이해와 깨달음으로 이끄는 역설을 보여주는 그의 일대기는 한 생에도 성불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전설의 서사이다. 그 경이롭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는 수천 년의 세월을 넘어 세이 가문의 핏줄과 정신 속에 이어져오고 있다. 밀라레빠의 실천적 수행 전통이 제자인 레충빠와 감뽀빠에서 샤캬 슈리를 거쳐 세이 린포체에게 흐르고 있다.
세이 린포체가 속한 샤캬 슈리 가문은 깨달음의 가르침이 스승에게서 제자로 전해지는 방식뿐 아니라,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피를 통해 법맥이 이어지는 혈통의 전승이다. 머리를 기르고 가정을 이룬 삶 속에서도 심오한 수행을 이어가며 재가 수행의 전통을 고수하는 핵심이기에 티베트 불교 내에서도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19세기 말 티베트의 위대한 성자로 추앙받은 샤캬 슈리는 말하자면 세이 린포체의 증조부이다. 그는 사원이 아닌 산속에서 생활하며 수천 명의 제자들을 길러냈고, 그 야생의 실천적 수행 정신은 세이 가문의 가풍이 되었다. 샤카 슈리의 직계 전승자이며 세이 린포체의 친부인 아뽀 린포체 또한 위대한 수행자로 존경받았으며 ‘밀라레빠의 마음의 아들’로 불렸다. 그리고 세이 린포체는 친부의 스승이었던 ‘빼마 초결’의 환생자로 인정받았다.
“제가 태어났을 때 16대 카르마파와 그 외 여러 스승들께서 ‘빼마 초결’의 환생자로 지목하셨죠. 저는 전생을 잘 기억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6살 무렵에 환생자라는 확인을 분명히 한 계기가 있었어요. 제 전생의 제자인 스님이 머리맡에 스승의 그림을 모셔두었는데, 그걸 보자마자 ‘이건 내 건데 왜 네가 가지고 있니?"라고 말한 적이 있었죠.”
환생자에게는 보통 ‘린포체’라는 호칭이 따른다. ‘법의 보배’라는 뜻의 린포체는 단순히 이름이나 직위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허공계가 존재하는 한, 중생이 존재하는 한 자신의 이익을 버리고 항상 타인의 이익을 위해 움직일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 이들을 ‘린포체’라 하고 ‘보살’이라고 한다.
“린포체는 탐진치를 정화하고 ‘보리심’을 온전히 갖춘 사람을 의미하죠. 중생을 이롭게 하는 마음, 그런 습을 가진 이들은 화신(몸)으로 계속 나툽니다. 중생을 위해 일해야 되니까요. 이런 이들의 환생은 티베트뿐만 아니라 한국과 전 세계 어디에나 분명 존재할 겁니다. 그래야 이 사바세계가 유지되니까요. 다만 티베트에는 그런 사람을 ‘환생자’라는 이름과 자리에 올려 주는 전승이 있고, 까르마파가 처음으로 그 전승을 시작하셨죠.”
환생자로서, 수행자로서, 그리고 가장으로서의 무게까지 짊어져야하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여러 정체성과 역할과 책임의 무게를 어떻게 감내하며 조화와 균형을 이룰 수 있을까?
“제겐 환생자로서의 정체성과 개인으로서의 자아가 분리된 적이 없어요. 그 차이를 전혀 느끼지 못하죠. 저는 물론 가족을 사랑하고 좋아합니다만, 사랑과 애착이 본래 허무한 것임을 알기에 인생에서 해야 할 역할로서 최선을 다할 뿐 집착하진 않습니다. 아버지로선 자녀들이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힘을 실어주는 데 최선을 다하죠. 수행자로서 법이 어떤 이익이 있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자녀들에게 열심히 가르쳐왔어요. 둘째 아들이 환생자라, 특히 법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배우고 있어요. 저는 환생자라 해서 특별히 삶의 무게를 느낀 적은 없어요. 다만, 그 이름과 자리에 걸맞은 행위를 하기위해 나름의 노력을 하며 살아왔죠. 가문의 전승자로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지키고자 하는 것은 법의 전승과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이죠.”
밥을 먹을 때도 부처인 내게 공양 올리듯
중생을 위해 ‘보리심’으로 무장된 존재들, 그러기에 환생을 거듭하는 이들에게도 수행하며 겪는 어려움이나 괴로움이 있을까?
“저 또한 늘 겪는 것이 슬럼프이죠.(웃음) 그럴 때마다 외부에 대한 애착이 과연 어떤 이익이 되는지, 내 마음을 조복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지를 관찰합니다. 가령 화가 일어나는 순간, 그것이 나뿐만 아니라 타인도 불편하게 함을 알아차리고 즉시 자애와 연민으로 대치하는 거죠. 우리 안의 독을 약으로 바꾸려면 사물의 실체(본질)를 꿰뚫어 보는 지혜가 필요해요. 그러려면 진리를 듣고 사유하고 익히는 과정을 통해 무지를 없애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재산이나 부귀를 통해 행복을 얻으려 하지만, 그것을 만들고 지키고 늘리는 과정은 결국 고통일 뿐이죠. 용수 보살님은 가장 최고의 부와 재산은 ‘만족'이라고 하셨어요. 얼마가 있든 만족하는 사람은 진정한 부자이죠. 법의 실체를 이해하고, 스스로 만족을 찾는 것만이 궁극적인 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아버지인 아뽀 린포체를 비롯해 세이 린포체의 스승들은 하나같이 청빈하고 겸허하며 자애로운 삶을 유지했다.
“아뽀 린포체는 수행을 굉장히 열심히 하셨고 깨우침이 확실하게 현현하신 분이셨어요. 소남 산포는 평생을 무소유와 나눔을 실천하셨죠. 무엇이 생기든 모두에게 나눠주거나 법을 세우는데 사용하셨고, 당신은 절도 집도 없이 산속에서 나무로 집을 삼고 나뭇잎으로 옷을 삼고 지내실 만큼 자연인으로 사셨죠. 켄체 린포체는 마음의 깨침이 매우 높으시고 학자로서도 굉장히 뛰어나 부처님 말씀에 대한 이해도가 굉장히 높으셨어요. 그런데도 늘 겸손하셨고 고요하고 평온하게 사람들에 맞춰 얘길 하시면서 스스로를 깨알같이 여기셨죠. 달라이 라마께서 법문할 때도 일반인들과 섞여 앉아계셔서 달라이 라마께서 보시고 상석으로 오시라고 할 정도였어요.”
항상 낮은 자리를 지키며 자만하지 말 것. 스승들이 평생 실천으로 보여준 이 가르침은 세이 린포체가 아버지로서, 수행자로서 자녀들에게 강조하는 핵심 가르침이기도 하다. 깨알같이 작은 존재로서의 자신을 잃지 않는 한편 내 자신이 ‘본존’(부처)임을 아는 것. 이것은 수행을 일상으로 연결시키는 연금술과도 같다.
“수행은 남에게 보이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마음의 본질을 훈련하는 과정입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매 순간 내가 본존임을 잊지 않는 알아차림의 연속인거죠. 일상생활에서도 나를 포함한 내 주위 모든 생명체가 본존이며 이 세상이 정토라는 생각을 갖고, 그런 상태의 정념과 알아차림을 계속 유지해야 해요. 이때 우리가 음식을 먹는 행위는 본존에게 올리는 신성한 공양이 됩니다. 식사를 할 때 자신을 범부라고 생각하고 먹으면 그냥 소가 밥 먹는 것과 같지만, 자신이 본존임을 인식하면서 밥을 먹으면 공양을 올리는 게 되죠. 윤회와 열반은 손과 같아요. 윤회가 손바닥이면 열반은 손등이고 둘이 하나의 손인 거죠. 수행자는 윤회를 벗어나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윤회와 열반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걸 인식하지 못하면 그 둘은 엄청 멀고도 다른 세상이 되어버립니다.”
내가 부처임을 잊고 사는 깊고 거대한 착각의 본질.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매일 먹는 밥과 차 한 잔, 걷는 걸음은 그저 생명을 잇기 위한 연명에 불과할 뿐. 그 착각의 본질과 마주하는 순간에, 바로 지금 이 자리가 극락의 정토여라. 버릴 윤회도, 얻을 열반도 없음이라.
통역·사진 제공 수인원만센터
함영ㅣ1998년부터 글을 지어 다양한 매체에 기고했고, <빅이슈 코리아>에서 편집장을 지냈으며, 글짓기와 기획 및 출판 등으로 곰탕을 끓여 꽃을 꽂고 있다. <밥맛이 극락이구나>, <인연으로 밥을 짓다>, <곰탕에 꽃 한 송이> 등 다수의 저서와 연재물이 있고 ‘음식과 사람의 인연을 통한 성찰’이라는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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