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인사이트]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비움 속에 맛보는 충만함

어머니의 소원이 불행의 씨앗이 된 까닭

부처님오신날인 오늘은 정말로 부처님 말씀의 묘미를, 그 맛을 진짜로 음미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서양에서 그 맛을 발견하고 맛본 사람이 몇이 있지만 우선 한 사람을 잠깐 소개해 드리면 레비-스트로스라는 인류학자가 『슬픈 열대』라는 책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교는 내세가 없다. 다른 모든 종교는 내세가 있고 신이 있지만 불교는 신이 없다. 불교는 우주를 무(無)로 본다. 불교는 종교를 넘어섰다. 종교를 넘어선 수련이다. 그런데 불교 뒤에 나온 종교들이 진보는커녕 퇴보를 보이고 있다.’ 그는 과거 당시에 있었던 종교, 바라문교라든지 또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모든 종교를 다 넘어서는 불교를 이야기 한 것입니다. 아주 혁명적인 인류의 양식, 정신적인 양식을 제공하신 분이다. 혁명적인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런 말씀을 들을 때 현대적 맥락에서 현대인으로서의 갈 길을 한번 고민해 보는 것 그런 게 오늘의 의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중아함경』에 이런 말이 있어요.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연기와 법이 말하자면, 둘이 아니다’라는 거죠.

그런 묘리를 말씀하시는데 그걸 다른 말로 하면 기막힌 역설의 법 기막힌 역설적 설법 속에 당연하고 풍부한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 고타마 붓다의 말씀하신 방식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헤르만 헤세 소설에 이런 것이 있어요. 단편소설 『아우구스투스』 속에 어린 외동아들을 둔 어머니가 자기 아들 소원을 하나 들어달라고 대부 앞에서 소원을 말합니다. 입에서 나온 말이 ‘내 아들은 모든 사람한테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이야기를 한 순간 기뻤는데 그 직후에 말 못할 후회와 슬픔을 느낍니다. 왜 기쁨과 슬픔이 둘 다 올까 돌이켜 보니까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다 보면 아들이 자꾸 자기를 가득 채우려고 하는 마음이 날 건데, 잘못하다가는 이것이 큰 불행의 씨앗이 될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이게 너무 과욕인, 엄청난 소원이 아닌가 해 가지고 아차 하는 순간, 이미 그 아들은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만 하는 길을 걷고야 맙니다. 그래서 평생을 사랑을 받기는 받아요. 만나는 모든 여인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즐거움과 기쁨과 이런 것을 가득가득 받는데 그러다 보니까 아우구스투스가 완전히 이 세상엔 그리울 것이 없는 사람,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 남의 아픈 상처나 불행은 아랑곳 하지 않은 사람이 돼버렸어요. 말하자면 인간으로서는 가장 속된 사람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어머니가 바라던 훌륭한 인간과는 반대방향으로 가버린 인간이 돼버린 겁니다. 나중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돌아가신 것이 별로 가슴에 아픔이나 슬픔으로도 와 닿지 않을 만큼 공감능력을 잃어버린 사람, 자기중심의 분망한 자아로 가득 찬 사람이 돼버렸어요. 거의 평생을 권세와 이익 쪽에 기울어져 살다가 끝내는 자기에게 상처받고 버림받고 소외당한 모든 사람의 원망하는 눈초리, 저주에 가까운 고통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느낍니다. 아! 지나간 인생은 결코 진짜로 가득한 삶이 아니었구나, 헛된 것으로 넘쳤던, 허무한 것이었구나 하고 죽을 생각으로 독이 든 포도주 잔을 앞에 두고 회한과 비애 속에 잠깁니다. 마지막 순간 어릴 적에 자기를 사랑해주던 대부를 떠 올립니다. 그때, 옛날 아우스투스 어머니의 소망을 들었던 그 대부가 나타납니다. 그러자 생각합니다. ‘이제 나는 없다. 나의 모든 것을 버리겠다. 아니 이미 버렸다. 그리고 버림 받았다. 늦었다. 그러나 내 죽을 각오로 새로 출발할 수는 없을까’ 생각합니다. ‘내가 사랑을 남으로부터 제일 많이 받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남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나는 이제부터 아무것도 없는 사람,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다. 그러나 마음만은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다’고 180도 전환을 합니다. 그러자 길이 보였어요.

자기를 비울수록 채워지는 역설

부처님의 기막힌 역설의 묘미는 비유하자면 바로 이런 곳에 있습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법무아(諸法無我)를 깨달아, 제행이 무상함의 절절함을 알고 제법의 허상을 바로 보아 자기를 버리고 무아의 광대무변으로 나아가면 도리어 삼라만상이 자기 아닌 것이 없는 인간이 된다는 거예요.

제행이 그냥 무상이 아니라, 비록 제행이 영속한 듯해도 찰나생찰나멸 변멸하여 허무하고, 비록 제법이 가득한 듯 존재하여도 그 어느 것 하나 실체인 것 없으며 무아인 것입니다. 제법이 무아가 아니라 제법이 유아고 모든 것으로 자기를 채우려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자기는 허무로 떨어지고 존재의의는 없어진다는 겁니다. 위 이야기 속에서, 우리 일상 속에서 그걸 보잖아요. 자기 아들에 집착할 때 아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알겠습니까? 아들에 대한 집착이 적어지고 여유가 있을 때, 대부 같은 할아버지가 될 때 어린 아이에 대한 여유가 생기잖아요? 어머니 아버지가 대부 할아버지처럼 어린 자식을 제대로 보려면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돼요. 평정하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해요. 비움이 있어야 돼요. 마음을 비워야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인류의 비극도 인류의 문제도 인류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도 뭔가 마음을 비워야 됩니다. 권력이나 폭력, 물질의 힘, 또는 조직과 홍보선전의 힘보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들어내고 비우면서 다른 더 높은 가치나 원력, 보살도적 방편으로 나아가는 노력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비운다는 것이 가진 사람이 여유가 있어서 비우는 거 하고 뭔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하고 의미가 다릅니다. 타이틀도 없고 지식도 없고 돈도 없고 권세도 없는 그런 사람이 마음을 비울 수 있다는 것과, 그런 걸 많이 가진 사람이 비우는 것하고는 천양지차입니다. 그런데 고타마 붓다의 위대함이 어디 있냐면 지위도 버리고 권세도 버리고 모든 역사와 세계를 초월해서 일단 가진 게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겁니다. 문명도, 야생도 초월해서 일체를 버리는 무아의 단계, 철저히 마음을 비울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분이라는 겁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싶죠? 지금이야말로 가장 그런 필요성, 소용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미국, 이란은 원수들처럼 싸워요. 독선과 아집, 승부욕과 지배욕으로 꽉 찬 트럼프와 네타냐후는 성속(聖俗)전체 지배욕으로 가득 찬 전제국가 이란하고 맞붙어 싸워요. 또 패권지향적 중국과 미국은 서로 더 잘나 보이겠다고 다투고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해가지고는 인류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부처님이 보여주신 거라고요. 제행무상은 제행은 있다고 실체처럼 보이지만, 변멸하고 없어진다는 거예요. 제법무아도 제법이 있다고 보이지만 제법은 없다. 실체가 없다, ‘법을 말하지만 한 법도 말한 게 없다. 중생제도라고 말하지만 한 중생도 제도한 바 없다. 사상(四相)을 말하지만 무룻 일체 상은 상 아님이다’라는 겁니다. 한마디 말 속에 역설의 묘리를 설하며 온전한 이치를 밝히신 겁니다.

그런데 그 묘리의 묘미를 인류가 이해하고 깨닫는 순간 아하(!) 국가는 어떻게 움직여 왔으며, 인류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것인가 그 역설적 이치의 실제적 적용을 부처님께서 일깨우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역설을 그저 역설로만 여기고 마는 경우도 많아요.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초기경전에는 제행과 제법의 존재함에 관한 연기법적 진정성 있는 말씀이 가득한데,『금강경』이나『반야심경』, 대승경전은 무상과 무, 무아 같은, 주로 관념적 말씀이 많은지라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대승경전들,『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이야말로 최고의 경전이고 최상승경전인데 몰라서 하는 소리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게 있지 않습니까? ‘연기면 이미 법, 법이면 이미 연기’ 또 ‘법이면 무아, 무아면 법’이라고 하는 것 말입니다. 연기적 내용은 초기 경전에 많이 있었어요. 그러나 초기 경전에도 다르마 언급이 많이 있어요. 대승경전은 다르마 쪽을 강조했어요. 그런데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는 자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고 이미 초기 경전은 이야기했고 또『금강경』에서도 사상(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여의면 보살이 되는데 사상을 여의지 못하면 다시 유루법(유위법, 윤회 등)에 떨어진다고 하는 말도 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무슨 말씀일까? 그 두 흐름, 연기와 법이라는 흐름 속에서 둘이 아니라는 취지를 이미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휴암 선사는『장군죽비』에서 유위법인 연기의 이치도 연기법적 통찰을 통해 비연기적 공도리와 무아 즉 무위법이 되는 이치, 환언하면 “연기는 비연기로, 비연기는 연기로 된다”고 밝힌 겁니다. 왜냐? 이것저것이 존재해 있다고 하는 순간 이미 이것, 저것 자체가 연기적이므로 이것, 저것 자체의 실체성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비울 수 있다면 국가의 문제도 나의 문제도 해결 가능해

그런데 지금 이 현재의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 조금이라도 마음을 진짜로 비울 수 있는 사람은. 자기 국가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 남에게서 상대방에게서 나를 볼 줄 아는 사람, 또 내 속에서 남을, 상대방을 볼 줄 아는 그런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이게 왜 중요하냐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서로를 공감하고 서로의 입장을 역지사지하고 하려면 그런 지혜가 있어야 돼요. 그런 마음이 있어야 돼요. 그런데 많은 종교나 철학은 자기를 고집하기만 해요. 자기들이 훌륭하고 자기가 실력이 있다는 것만, 자기 종교가 탁월하다고 자기 철학이 탁월하다고 하는 것만 강조를 합니다. 그런데 고타마 붓다는 달라요. 

노자도 무위자연을 고집합니다. 공자 맹자도 고집이 있어요. 공자는 칠십대 가면 고집이 없고 달라요. 그런데 고타마 싯다르타 붓다는 자기를 고집함이 없는데도 세상은 가장 존귀한 인간으로 봐요. 자기를 하나도 고집하지 않는데 존귀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그러한 묘리를 우리에게 이미 2570년 전에 모델로 보이신 거죠. 바로 오늘은 그런 이치의 묘미를 맛보는 날이에요. 동양적 묘미도 아니고 서양적 묘미도 아니고 어중간한 절충식 묘미도 아니에요. 다 초월하면서 다 융합한, 그런데 융합하겠다. 내가 초월하겠다는 그런 마음도 없이. 그런 의식도 없는 그러한 묘리의 묘미.

그 묘미를 맛보는 날 우리는 인류문명의 문제, 국가의 문제, 나의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실마리를 조금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오늘의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그 의미가 살아나고 보람이 생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두서없는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 이 글은 불기 2570(2026)년 5월 24일, 대한불교진흥원 괴산 다보수련원 다보사 법당에서 봉행된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회에서 설한 김규칠 전 이사장의 봉축 법문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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