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상징, 32상 80종호]
외모를 가꾸는 것이 아닌, 마음의 결을 드러내는 장엄 수행
먹고 싶은 대로 마음껏 먹었더니 몸무게가 95kg에 가까워진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거울 속 제 모습을 보는데, 식탐을 들킨 것 같은 상호가 너무 부끄럽게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3개월 동안 무려 23kg을 감량했습니다. 거의 먹지 않다시피 하며 운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습니다. 주변에서 걱정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스님, 낯빛이 너무 어두워요!”
정작 제 몸 상태는 어느 때보다 가볍고 좋았기에 의아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는 소리를 반복해서 듣다 보니, 정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을 찾아가 CT 검사까지 받았습니다. 혹시 신장이나 간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검사 결과를 보면서 의아한 표정으로 말하더군요.
“스님, 여기 보이시죠? CT에 작은 점 하나 없습니다.”
생활 속에 일어난 이 작은 사건 속에서 한 가지를 배웠습니다.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보살이라면 낯빛과 표정, 그리고 건강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화려한 옷이나 장신구로 외모를 꾸밀 필요는 없으나, 스승을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에 불필요한 걱정을 끼치지 않고 신심이 생길 수 있도록 외모를 장엄하는 방편도 수행인 것입니다.
숨길 수 없는 마음의 통로, 눈동자와 소리
“마흔 살이 넘은 사람은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 에이브러햄 링컨
링컨 대통령은 단정한 외모와 타인을 비방하지 않는 친절한 태도로 유명합니다. 그렇기에 그는 시대를 넘어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로 기억되는 것일지 모릅니다. 오늘날 곳곳에서 “어른이 없다.”라는 한탄이 들립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자신의 얼굴에 책임지는 덕목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단지 외모를 가꾸는 문제가 아니라, ‘어른’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품성과 자세를 포함합니다.
물론 외모지상주의는 경계해야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육경(六境) 가운데 ‘색(色)’이 가장 먼저 위치하는 이유는 인간은 눈이라는 감각기관에 가장 크게 의지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이는 것에 쉽게 집중하고, 집착하며, 휘둘리는 것은 인간의 본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방심하면 자신을 단정히 하려는 장엄 수행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꾸밈과 과시의 영역으로 넘어가기 쉽습니다.
“사람을 살피는 데는 눈동자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눈동자는 그 악함을 숨기지 못한다.”
— 맹자(孟子)
정신이 성장하지 못한 채 외모만 꾸미는 경우를 흔히 “조화(造花) 같다.”라고 말합니다. 얼굴은 ‘얼꼴’이라고도 합니다. ‘얼’은 마음을 뜻하니, 결국 얼굴이란 ‘마음의 꼴이 얼굴에 드러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조화와 같은 아름다움은 얼이 아닌 꼴만 가꾼 것입니다. 시대마다 달라지는 미의 기준을 따라 얼굴이라는 진흙을 빚어 모양만 아름답게 꾸며 놓은 것입니다. 이런 경우 마음이 드러나는 통로인 눈빛이 인형처럼 공허한 경우가 많고, 어떤 경우는 숨기려 해도 감출 수 없는 분노와 욕심이 눈동자에 드러나기도 하니, 사람 볼 줄 아는 현자들은 결국 얼굴 중에서도 눈동자를 통해 그의 얼을 느끼는 것입니다.
‘소리[聲]’ 또한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아름다운 외모에 호감을 느끼지만, 서로 가까워지고 시간을 함께할수록 점점 매력을 느끼기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색을 가꾸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안에서 나오는 소리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아는 것이 부족하면 말할 내용이 빈약해지고, 이해가 성숙되지 못하면 말에는 뿌리가 없어 흔들립니다. 나아가 자기 자신도 설득하지 못한 말에는 힘이 없습니다. 볼수록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멋지게 가꾸어진 정신의 소리를 내야 합니다.
왜 부처님은 마지막 백 겁을 상호에 전념하셨는가?
“모든 것은 마음이 앞서가고, 마음이 이끌어가며,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 『법구경(法句經)』
모든 것은 마음이 근본입니다. 지식은 축적되어 전문성을 갖추기까지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일만 시간의 법칙’이라고도 하는데, 하루 3시간씩 꾸준히 노력한다고 가정하면 대략 1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심지어 부가 축적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복리의 법칙을 고려하여 충분한 결과가 나오는 데까지 지식보다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인도의 세친(世親, 316 - 396) 보살은 『구사론(俱舍論)』에서 마음과 상호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섬부주의 남자로서 부처님을 대면하여 부처님을 인연으로 일으킨 사유[思]이며, 사소성(思所成)의 지혜이다. 그 3아승지겁 외에 다시 백 겁 동안 닦아야 마땅하며, 서른두 가지 상(相)은 각기 백 가지 복으로 장엄된다.”
— 『구사론』
성불의 길은 평균적으로 3아승지겁에 다시 백 겁을 더한 시간이 걸리기에 초장기 수행의 여정입니다. 지식 그리고 부가 축적되는 시간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차원의 시간입니다. 세친 보살은 이 성불의 과정에 대해서 ‘선지혜(先智慧) 후상호(後相好)’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곧 부처님의 지혜를 배우고 사유하여 완성하는 데에는 3아승지겁의 시간이 필요하고, 부처님의 32상 80종호를 장엄하는 데에는 백 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중 후상호를 완성하는 백 겁의 수행을 후대 학자들은 ‘백겁종상(百劫種相)’이라고 정리했습니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점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부처님의 깨달음의 지혜가 거의 완성된 상태라고 하더라도 다시 백 겁 동안 상호를 장엄해야 비로소 성불이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이는 중생을 교화하는 과정에서 외적인 모습 또한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얼핏보면 이러한 견해는 색을 중요시했던 부파불교 시대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주장처럼 보일 수 있지만, 대승 경전인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보살은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해 청정한 몸의 업을 닦나니, 이로써 원만한 상호를 얻어 보는 이로 하여금 기쁨을 느끼게 하고 신심(信心)을 일으키게 하느니라.”
— 『대보적경』 -
둘째, 『구사론』의 ‘백겁종상’의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백복장엄(百福莊嚴)’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32상 하나하나 장엄하기 위해 닦아야 하는 복덕의 크기를 일정한 기준인 수량화로 설명하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체중생의 병고를 해결하고 구제하는 복덕의 크기를 ‘1복(福)’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복덕이 백 번 축적되면 32상 가운데 하나가 완성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바로 ‘백복장엄’입니다.
마음이 근본이 되어 삶을 바꾸는 ‘백복장엄’의 길
태국 방콕에 있는 사찰에는 거대한 와불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수많은 관광객 사이를 지나 법당 끝에 이르면 부처님의 발바닥을 친견할 수 있는데, 그곳에는 정교한 법륜 문양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32상 가운데 하나인 ‘천폭륜상(千輻輪相)’입니다. ‘천폭륜상’을 장엄하기 위해서는 법륜을 굴려 중생을 구제하는 수행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일체중생의 고통을 모두 구제해 줄 만큼의 공덕을 낳는 법륜의 수행을 백 번 축적할 때 비로소 발바닥에 선명한 수레바퀴가 그려진다고 하니, 혹시 언젠가 이 ‘불족상(佛足像)’을 친견하실 기회가 있다면, 이런 마음을 한 번 품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아! 저 문양 하나를 위해 부처님께서는 온 세상을 백 번이나 치유하며 걸으셨구나!’
부처님의 32상 중 다른 몇 가지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의 32중 부처님의 눈동자에 대한 모습으로 ‘안청상(眼靑相)’이 있는데, 눈동자가 맑아 푸른 연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맑고 자비로운 시선으로 중생을 바라보는 공덕이 백 번 축적된 결과라고 합니다. 우리가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 앞에 서면 그 자체로 안심이 되고 감동받는 이유도 어쩌면 이러한 공덕의 향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부처님의 목소리는 ‘범음상(梵音相)’을 갖추어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이익이나 감정을 위한 말이 아니라, 오직 중생의 마음을 안심시키는 말을 실천하신 백복의 공덕이 이러한 목소리를 장엄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특별한 장엄 가운데 하나가 ‘미간백호상(眉間白毫相)’입니다. 두 눈썹 사이에서 대광명을 발하는 흰 털을 말합니다. 이 대광명은 오직 부처님만 나타내실 수 있는 신통으로, 다른 ‘백복장엄’의 천 배에 달하는 수행을 통해 성취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위대한 공덕이 축적되었기에, 부처님의 대광명의 신통은 눈앞의 한 사람만이 아니라, 온 법계에 환희를 전하는 기적을 선보이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완성하신 부처님조차 마지막 백 겁을 상호의 장엄에 전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미간백호상을 갖추지도 못한 제가 제자들의 걱정을 ‘괜한 것’이라 일축했던 것은 분명 경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지혜를 성숙시키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세 가지 장엄을 제안해 봅니다.
첫째, ‘안청상’을 위한 시선의 장엄입니다. 상대의 허물보다 먼저 그 사람이 짊어진 고통의 무게를 먼저 읽어주십시오. ‘당신은 온전한 존재입니다.’라는 축원을 눈동자에 담는 연습입니다.
둘째, ‘범음상’을 위한 소리의 장엄입니다. 내가 내뱉는 말이 상대에게 약이 되는지, 독이 되는지 스스로 먼저 살펴보십시오. 진실하고 따뜻한 말은 결국 상대를 치유하는 범음이 됩니다.
셋째, ‘천폭륜상’을 위한 걸음의 장엄입니다. 나의 발걸음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길인지 살펴보십시오. 타인의 아픔을 향해 움직이는 그 발걸음이 우리 발바닥도 수레바퀴를 새기게 될 것입니다.
한 번의 실천은 먼지처럼 작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먼지가 차곡차곡 쌓여 습관이 되고, 습관은 태도가 되며, 태도는 마침내 마음의 보석이 됩니다. 그리고 그 보석의 빛은 우리의 얼굴과 눈빛, 말 그리고 생각과 삶을 바꿉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근본으로 하여 상호를 가꾸는 ‘백복장엄’의 참된 의미일 것입니다.
원빈 스님|해인사에서 출가했다.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행복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경남 산청에 있는 송덕사의 주지를 맡고 있다. 저서에 『원빈 스님의 금강경에 물들다』, 『굿바이, 분노』 등이 있다.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