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의 시대에 등 돌린 ‘시대의 방랑자 숲’, 부여 무량사 설잠 스님 길

 천년사찰 숲길 걷기명상


무량사 극락전과 석등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
명상 아닌 게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무량사 설잠 스님(김시습) 길에는
왠지 모를 애잔함이 스며 있다.
시대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한평생 올곧은 지조를 지키다가
생을 마감한 설잠 스님의 서늘한
체취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영달과 이익을 좇아
불나비처럼 떠도는 정치의 시대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설잠 스님의 애달팠던 삶을 보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화두가 발끝에서 뇌리로 전해진다.


느티나무 숲길

부여 무량사와의 깊은 인연을 찾아서

오월 중순인데도 덥다 못해 뜨겁다. 기후 위기의 시대에 이상고온 현상이 지구인들을 괴롭힌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30도를 웃도는 기온이 농작물의 가뭄을 초래하고 봄이 사라지는 듯 봄꽃들이 일찍 꽃잎을 떨어뜨린다.

온갖 번잡한 생각이 만연하던 5월 부처님 오신 날을 며칠 앞두고 ‘부여 무량사 설잠스님길’을 찾았다. 교통이 불편하지만 한번 방문해 본 사람들은 사찰의 규모에 감복한다.

필자와 부여 무량사는 깊은 인연이 있다. 2017년 6월 부여 무량사로 문화유산 답사에 동참하며 취재도 하며, 인생의 전환점을 삼았기 때문이다. 당시『불교신문』기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문화유산 답사 모임을 결성해 4년째 문화유산을 답사하며 우리의 전통문화 인식에 대한 지평을 넓히고 있다. 국제문화유산답사회(회장 안광민)는 지난 26일 보령 성주사지와 부여 무량사, 청양 장곡사 일대를 돌아보며 불교문화 유산에 담겨 있는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국제문화유산답사회는 지난 2014년 4월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학과, 자연치유학과 등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는 내외국인 학생들이 주축이 된 모임으로 회원은 40여 명이다. 이들은 매년 4회(4월, 6월, 9월, 11월 마지막 주 월요일)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답사를 진행해 13회째 답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답사에는 불교계 원로학자인 홍윤식·이종찬·송재운 동국대 명예교수도 동참해 심도 깊은 답사가 진행됐다. 홍윤식 교수는 무량사 답사에서 5층석탑 앞에 직접 다가가서 백제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탑 형식을 계승한 독특한 석탑이라는 설명을 하기도 했다.”

2017년 답사 인연으로 석사학위 후 중단했던 학업을 이어 2020년 ‘법정 스님 시대정신 형성과 전개과정 연구’로 박사 학업을 마칠 수 있게 됐다. 이 모임은 은사인 고 백원기 교수가 주도한 한국숲과문학명상협회의 발족으로 이어졌고, 백 교수가 지난해 별세한 이후에도 제자로 협회교재를 발간해 숲명상, 문학힐링, 싱잉볼명상, 차명상, 그림명상, 마음챙김 명상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기관(산림청 인가 민간단체)으로 성장하고 있다. 33년의 기자생활을 마감하면 백 교수의 후학으로 숲치유와 문학치유지도자로 길을 바라보고 있다.



시대의 불의에 맞선 설잠 스님, 김시습의 삶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 명상 아닌 게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무량사 설잠 스님길에는 왠지 모를 애잔함이 스며 있다. 시대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한평생 올곧은 지조를 지키다가 한 생을 마감한 설잠 스님(1435~1493)의 서늘한 체취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설잠 스님이라는 법명보다는 김시습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인물. 조선 세종 때 ‘조선의 공자’로 불릴 만큼 천재성을 타고 태어난 신동이었던 스님은 조선왕조의 처절한 왕권다툼과 불의에 저항하는 충신들의 죽음을 보고 불문(佛門)에 의탁해 전국을 유랑한다.

유교와 불교, 도교를 두루 섭렵했던 김시습은 21살 때 삼각산 중흥사에 머무르며 수행하고 있을 때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소식을 접한다. 울분을 참지 못해 대성통곡한 그는 서책을 불사르며 관직에 나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 심지어는 화장실에 빠지기도 했다.

22살 때 사육신이 마침내 처형되자 김시습은 성삼문, 유응부 등의 주검을 수습한다. 이후 온 산하를 주유한 설잠 스님은 경주 금오산(지금의 남산)의 용장사에 정착해 부처님께 조석으로 예불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한다. 금오신화는 불의가 판을 치는 현실에 고통받으면서 이상적인 것을 염원한 성과물이었다.

스님은 남산 용장사에서 매일 맑은 물을 올려 예불하고 예불이 끝나면 곡을 하고 곡이 끝나면 노래하고 노래가 끝나면 시를 지었다. 시가 끝나면 또 곡을 하고는 시를 불태워버렸다. 조선왕조에서 벌어지는 정의롭지 못한 일련의 사건을 보면서 그는 절망에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면서 마음 한켠에서는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기도 했다. 그러한 산물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이다.

한 일간지 칼럼니스트는 설잠 스님의 금오신화 저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절대 낙관할 수 없는 절망적 현실의 횡포, 그렇다고 비관만 하며 사람살이의 이상과 원칙을 저버릴 수는 없는 상황. 바로 이 지점에서 전기소설 금오신화는 탄생한다. 김시습은 ‘인간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 사회의 인정과 진실이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결단코 포기될 수 없는 것임을 역설한다.”

설잠 스님은 만년인 1492년 여름 만수산 무량사로 들어온다. 짚신과 지팡이 하나로 전국을 주유한 지 30여 년이 된 후였다. 그 이듬해 2월 스님은 묘법연화경 발문을 쓰고 3월에 마지막 시를 남기고 입적하는데 임종게송(臨終偈頌)이 된 셈이다.

春雨浪浪三二月(춘우랑랑삼이월) 봄비 줄기차게 흩뿌리는 삼월
扶持暴病起禪房(부지폭병기선방) 선방에서 병든 몸을 일으켜 앉는다
向生欲問西來意(향생욕문서래의) 그대에게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을 묻고 싶다만
却恐他僧作擧揚(각공타승작거양) 다른 승(僧)들이 떠받들까 두렵다.


무량사로 들어서는 다리

만수산 무량사에 스며 있는 설잠 스님의 발자취

정의로운 세상을 염원하며, 고통스런 현실을 조문(弔文)한 ‘시대의 방랑자’가 머물렀던 만수산 무량사에 든다. 만수산의 깊은 숲은 더위를 품어 열기를 식혀준다. 계곡은 오랜 가뭄으로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외기둥 2개가 오래된 기와를 이고 있는 일주문 너머로 수백 년 넘은 느티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무량사로 들어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한다. 사찰의 역사를 말해주는 사적비와 공덕비가 도열하듯 서 있고 사찰이 배려해 준 듯한 휴식터인 정자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다리를 건너 우측으로 들면 천왕문이 눈썹과 마주친다. 계단을 오르면 천왕문 너머에 석등과 5층석탑, 2층 규모의 극락전이 액자에 들어차 있는 듯이 눈에 쏙 들어온다. 무량사의 풍경은 전국에 사진 찍는 작가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하다. 초여름 평일임에도 사진을 찍는 작가들의 셔터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종각 옆에 서 있는 느티나무와 소나무의 늘어짐이 석탑과 5층석탑, 극락전의 묘한 조화를 이룬다.

천왕문 너머에 석등과 5층석탑

극락전 옆 요사채인 우화궁을 지나 사찰 안쪽으로 접어든다. 좌측에는 설잠스님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영정이 모셔져 있는 영정각이 있다. 우측에는 개울이 있고 그 너머에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설잠스님이 거처했다는 곳으로 2007년에 복원했다. 스님의 호인 청한자(淸寒子)의 이름을 따서 ‘청한당(淸閒堂)’이라 부른다. 청한당으로 다가가서 극락전을 바라다본다. 얕은 개울을 건넜을 뿐인데 세속과 한 걸음 더 떨어진 선계(仙界)에 들어온 기분이다. 이곳에서 만년을 보냈을 설잠스님의 마지막 모습이 뇌리에 스치며 미간이 찌푸려진다.


청한당(淸閒堂)

영정각으로 향한다. 500여 년 전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껴안아 고통스럽게 살았던 스님의 모습이 진영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다. 극락전 앞마당을 나와 도솔암과 태조암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사철 숲길이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진 이 길은 자동차가 다니는 포장도로다. 하지만 길섶에는 밤나무 감나무 자작나무 등 유실수와 조경수가 어우러진 숲길이다. 즐비한 감나무는 과거 이곳에 많은 암자가 있었거나 근자에는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일주문에서 30여 분 오른 끝자리에는 태조암이 있다. 여기에서부터는 만수산 등산로가 이어져 있다. 과거 무량사에는 12암자가 있었다고 하니 만수산의 넉넉한 품을 짐작할 수 있다.

산행을 다음으로 미루고 다시 발길을 돌려 일주문 밖으로 향한다. 무진암 입구에 있는 설잠 스님 부도를 친견하러 가기 위함이다. 매표소 아래로 내려와 다리 건너에 위치한 무진암 입구에는 여러 기의 부도가 있는데 가장 큰 부도가 설잠 스님 부도다. 스님의 부도탑 이름이 특이하다. ‘五歲 金時習之墓’라고 적혀 있다. ‘오세 김시습지묘’라니 스님의 부도탑이 ‘묘’라고 적힌 이유는 스님이 입적한 후 곧바로 다비를 하지 않고 매장한 뒤 3년 후에 관을 열어보니 생전모습과 같았서였다고 한다. 이를 본 스님들이 성불한 선지식으로 여기고 다비를 한 뒤 부도에 모셨다. ‘오세’라는 호칭은 세종대왕이 신동이라 불리는 스님의 어린 시절 글솜씨를 칭찬한 일에서 연유되었다.


설잠 스님 부도탑 
국제문화유산답사회 회원들이 무량사 일주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량사 설잠 스님 길을 걷는 내내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겁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이 짧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의미 있는 삶이라 할 수 있는가?”

이번 숲길은 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응어리져 있다. 학업을 이끌어 주었던 홍윤식 교수님도, 백원기 교수님도 세연을 다해 피안으로 가셨다. 삶에 대한 원초적 질문이 발끝에서 맴돈다. 무량사를 나오며 설잠 스님의 삶과 나 자신의 삶을 반추해 본다.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관직에 나가지 않고 세상을 주유한 생육신의 절개와 스님으로서 살아온 역정이 영화의 스크린처럼 흘러간다. 개인의 영달과 이익을 좇아 불나비처럼 떠도는 정치의 시대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설잠 스님의 애달팠던 삶을 보며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화두가 자꾸 발끝에서 뇌리로 전해진다.

 

글/사진__여태동 시인. 경북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및 동국대 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를, 동방문화대학원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사찰과 전통한옥 고택, 동화, 고승인터뷰, 도시농부 일기 등 10여 권의 책을 출간했고 법정 스님 관련 등 10여 편의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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