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효창 박사의 나무 이야기
뿌리가 흙에 닿았을 때,
씨앗은 처음으로 자신이 아닌 세상의 감각과 맞닿는다.
흙은 손바닥처럼 부드럽지만,
안으로 더 들어가려 하면 분명한 저항을 준다.
온도는 낮보다 밤의 기운을 닮아 서늘하고,
그 속에 오래 잠겨 있던 물기에서는
풀과 이끼의 냄새가 은근하게 올라온다.
씨앗은 그 모든 낯선 촉감을 처음 느끼면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것은 자극이며, 자극은 관계의 시작이다.
자연은 생명에게 결코 온순하지 않다.
특히 씨앗에게는 더 냉혹하다.
햇빛은 너무 멀고, 땅은 너무 무겁다.
비는 너무 적거나, 너무 많다.
먹히거나 썩어버리는 운명이 대부분이고,
살아남는 것은 극소수다.
그럼에도 씨앗은, 단 한 번의 기회를 향해
스스로를 밀어 올린다.
흙이 너무 단단하거나 너무 질척할 때가 있고,
미생물이 서서히 틈을 파고들기도 하며,
곤충들이 거침없이 알을 심기도 한다.
그러나 씨앗은 자신을 움켜쥐던 껍질을 내려놓고,
미지의 흐름 속으로 뿌리를 더 깊이 뻗는다.
이것은 뿌리의 용기이자, 생명의 첫 관계 맺기다.
씨앗이 흙을 처음 만나는 순간은,
우리가 세상에서 처음 사람을 만나거나,
처음 공동체에 들어가거나,
처음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과 닮았다.
처음 학교에 들어가던 날,
처음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주던 순간,
처음으로 혼자가 된 어느 밤.
모든 처음은 두려움과 함께 왔다.
그러나 그 두려움 덕분에 우리는 조금씩 더 성장했다.
안으로 움켜쥐었던 결심이
바깥 세계에 닿으며
비로소 존재가 확장되는 그 순간처럼.
씨앗에게 흙이 그렇듯,
우리에게도 삶은 늘 낯선 흙이다.
그러나 뿌리내림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조건이다.
미루면 존재는 썩고,
너무 서두르면 상처 입는다.
결국 우리는 자신만의 속도로,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세계와 맞닿는다.
그날, 상수리 씨앗이 흙에 닿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조용히 손을 내밀어
악수하는 장면 같았다.
그 악수는 약속이었다.
“나는 이제 너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겠다.”
그리고 그 약속은,
서로를 바꾸기 시작했다.
잎보다 먼저 감각이 열린다.
그 첫 악수는 단순한 만남이 아니었다.
거기서 생명은, 눈보다 먼저 감각을 열었다.
상수리 씨앗이 낙엽 아래에서 처음 내민 것은 잎이 아니었다.
연약한 뿌리 한 줄기.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가느다란 몸이 세상과 맺은 첫 대화였다.
그것은 물리적인 접촉만이 아니었다.
뿌리는 흙의 온도를 느꼈고, 수분의 분포를 읽었으며,
곁을 스치는 미세한 균의 냄새와 근처 다른 뿌리에서 전해지는
아주 옅은 화학 신호까지 받아들였다.
토양 입자 사이의 압력, 흙 속에 스민 옛 비의 기운—
그 모든 것을 잎이 나기 전에 이미 감각하고 있었다.
생명은 말보다 감각으로 먼저 세계를 이해한다.
아직 판단은 오지 않았다.
잎은 피지 않았고, 줄기는 세워지지 않았으며, 꽃도 향도 없는 시기.
그럼에도 이미 생명은 주변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감각은 질문이고, 기다림이며, 스스로를 열기 위한 신호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시작되지 않을까.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전, 누군가의 말에 반응하기 전,
우리는 먼저 느끼는 존재였다.
차가운 공기, 가만히 얹어진 손의 온기, 새벽빛이 이마를 스치는 순간—
그것들이 우리의 내부 어딘가를 건드렸고,
그 반응들이 우리 존재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었다.
아이의 첫울음처럼, 감각이 먼저 깨어나서
우리를 세계 속으로 이끌었다.
상수리의 뿌리가 흙을 읽는 순간처럼,
우리도 종종 언어 이전의 감각에서 방향을 찾는다.
그 방향은 논리도, 지식도 아니다.
내면의 압력, 외부의 미세한 변화,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의 조합이다.
잎은 눈에 보이지만, 감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잎은 감각의 결과다.
살아 있음은 보이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느낀 것에 반응하기 때문에 자라나는 것이다.
그날, 낙엽 아래의 씨앗은 잎 하나 내지 않았지만,
나는 분명히 그것이 살아 있다고 느꼈다.
감각이 먼저 깨어 있었기 때문이다.
남효창
자연과학을 전공하고 숲 식생학 석사, 자연환경 정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산림환경정책학과 연구원 및 서울대 임업과학연구소 특별연구원을 지냈다. 숲 연구소이자 실내 치유 정원인 ‘마인바움’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 『나는 매일 숲으로 출근한다』,『나무와 숲』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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