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도사] 인연 닿는 모든 이를 품으셨던 분을 떠나보내며
제행이 무상하여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하지만, 참으로 소중하고 귀하신 주봉(周峰) 배명인 님을 영결하게 되니 슬픈 마음 가눌 길이 없습니다.
님께서는 어지러운 세상을 지탱하는 큰 산이셨고, 일가친척은 물론 인연 닿는 모든 이를 보살피고 이끄시는 대보살이셨습니다. 험난한 일에는 솔선수범하여 길을 여는 지도자이셨고, 어려운 이에게는 봄볕처럼 자상한 보호자이셨으며, 우리 모두를 품격 있는 삶으로 인도하는 참스승이셨습니다.
80년 광주에서 님의 신변 안전을 걱정하는 저에게 “내가 이 사람들을 지키는 사람인데, 누구에게 나를 지켜달라 하겠느냐?”하시며 미동도 않으시고 자리를 지키시던 모습은 책임자의 고독한 결의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몸이 불편하여 결근한 간부 검사에게 “국가의 중책을 맡은 몸이 어찌 개인의 것이냐?”고 말씀하시며 건강 관리도 근무라 하시던 모습에서 공직자의 서슬 퍼런 자기 절제를 배웠습니다. 제가 혈액원 부정 사건을 수사하여 광주 지역 혈액 공급이 어려워지자, 몸소 금남로에서 헌혈 캠페인을 벌여 매혈 제도를 폐지하셨던 그 단호한 결단력도 잊을 수 없습니다. 검사들이 교주로 모시고 스스로 교도(敎徒)라고 자처하는 농담까지 하였습니다.
제가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사임한 여파로 광주고검장, 법무연수원장으로 징계성 좌천을 당하셨을 때도, 님께서는 언짢은 기색조차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그곳에 새겨져 있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는 의미의‘천주(天柱)’, 만고의 참된 근원이라는 ‘만고진원(萬古眞源)’, 그리고‘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라는 글자들을 보여주셨던 일, 고향 웅동의 불모산(佛母山)과 천자봉(天子峰)을 함께 오르며 일러주신 가르침들도 이제는 가슴 시린 추억이 되었습니다.
님께서는 늘 정갈한 품위와 진실한 마음으로 사셨습니다.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타인을 먼저 배려하셨고, 묵묵한 실천으로 본보기가 되셨습니다. 님께서는 웅동 향인들의 자부심이자 영광이셨고, 님이 머무셨던 자리마다 남겨진 흔적은 크고 깊습니다. 검찰과 법무부는 그 어느 때보다 바르고 청렴하여 국민의 신뢰를 받았고, 법무법인 태평양, 진해고등학교와 그 동창회, 서울법대 동창회, 그리고 배씨 종친회에 이르기까지 님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전례 없는 활력과 단합을 꽃피우셨습니다. 안기부장으로서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뒷받침하신 공로 또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나라에 어른이 없다.”고 한탄하시던 말씀, 성묫길에 “집에 누워 있으나 산에 누워 있으나”라며 무심히 던지신 생사일여(生死一如)의 말씀, 그리고 제가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 취임을 보고드렸을 때 “제 자리를 찾았으니 큰 업적을 남기라.” 격려해 주시던 그 음성이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이제 더는 그 따스한 음성을 듣고 인자한 모습을 뵙지 못한다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집니다. 남겨주신 가르침과 소중한 업적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기억들은 남은 이들의 삶 속에서 위로가 되고, 때로는 삶을 지탱하는 든든한 기둥이 되어 줄 것입니다.
오늘 우리 어쩔 수 없어 님을 보내드려야 하지만 아무도 결코 마음에서는 보내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길이 기억하겠습니다. 베풀어 주신 큰 사랑 잊지 않겠습니다.
이제 모든 세연(世緣)의 짐을 내려놓으시고 극락왕생하시옵소서. 정갈했던 님의 삶을 높이 기리며, 삼가 명복을 비옵니다.
2026년 4월 9일
(재)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
구상진 재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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