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불교 이야기

어머니는 아흔 한 살이다.
허리가 굽어, 젊으실 적보다 키가 10cm는 줄어든 것 같다. 그래도 매일 아침 예불을 올리고 염불을 한다. 기억력도 좋아 경도 줄줄 외우신다. 몸이 굽은 채로 절도 하신다. 똑바로 서지 않아도 기도는 똑바로 간다고 믿으시는 것 같다. 어쩌면 실제로 그럴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가끔 아들을 불러 묻는다.
“술 많이 마시지는 않지?”, “살아있는 것 해치진 않지?”. “혹시라도 개고기 먹지마라.”
나는 그냥 웃고 만다. 예순이 다 된 아들한테 아직도 그런 걸 묻는다. 하지만 어머니는 웃지 않는다. 진심이니까. 진심인 사람 앞에서 혼자 웃으면 쑥스럽다. 나는 얼른 표정을 고친다.

쌀 한 말 짊어지고 올라간 산사에서의 한 달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였다. 어머니께 말했다. 절에 한 달만 다녀오겠다고. 책 좀 보러가고 싶다고. 지금 생각하면 무슨 배짱이었는지 모르겠다. 사춘기도 오기 전에 혼자 산으로 들어간 것이다. 충북 제천, 비구니 스님이 혼자 계신 작은 절이었다. 나는 책 한 보따리와 쌀 한 말을 짊어지고 올라갔다.
방 한 칸. 부엌 한 칸.
아침에는 나무를 했다. 점심에는 책을 읽었다. 할머니 스님이 부르면 내려가 예불을 구경했다.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스님과 공양을 함께 들었다. 스님은 말이 없으셨다. 나도 말이 없었다. 둘 다 말이 없으니 오히려 편했다. 그때 읽었던 책은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나무 타는 냄새와 인자해 보이셨던 비구니 스님 얼굴뿐이다.
최루탄 연기 속에서 다시 만난 부처님
대학에 가서 불교를 다시 만났다.
1학년 필수과목이었다. 불교학개론과 불교문화사. 불교학개론의 담당 교수는 박완일 선생이셨다. 선생은 이상한 분이었다. 느릿느릿 말씀하시는데, 중간 중간 시국과 관련된 이야기가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붓다의 탄생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정치 이야기가 나왔다. 열반 이야기를 하다가는 또 다른 무언가가 나왔다. 강의가 아니라, 일종의 만담이었다. 라디오 드라마 같았다. 채널을 돌릴 수가 없었다. 불교 강의를 듣는 건지 만담을 듣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선생 덕분에 붓다의 일생은 또렷이 기억에 남았다.
어울렁 더울렁 학보사 기자를 했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집회와 시위가 벌어졌다. 대학본관 앞 부처님이 서 계신 곳 앞에서 매일 집회 취재를 했다. 매캐한 최루탄 가스냄새가 캠퍼스를 휘감아 돌았다. 낭만보다 결기가 넘쳤고, 따뜻한 말보다 격한 구호가 신문에 가득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불교계 신문 기자가 됐다. 아는 것도 없는데 절을 쏘다녔다. 수습도 못 뗐는데 1994년 종단분규가 터졌다. 법당 앞에서 스님들이 싸웠다. 나는 하릴없이 그 장면을 취재했다. 상상했던 불교와 눈앞의 불교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여 있었다. 회의감이 몰려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완벽한 사람들만 모인 곳이 어디 있겠나. 스님들도 사람이 아니던가. 완벽한 사람이 모인 종교가 있다면 그건 종교가 아니라 SF 소설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뫼비우스의 띠를 돌아 다시 제자리로
혼란이 잦아들 무렵 불교TV(btn)가 생겼다. 얼떨결에 나는 PD가 됐다. 아침 저녁으로 뉴스 생방송을 했다. 그러다 입봉작으로 '뉴미디어 시대의 불교'라는 특집을 만들게 됐다. DOS로 부팅하던 컴퓨터에 윈도우95가 막 깔려 나올 무렵이었다. 디지털은 시작 단계였고, 초고속 인터넷은 없었다. 지금은 『불교평론』 주간으로 있는 홍사성 제작국장이 나를 불렀다.
"중요한 프로그램이니까 잘 해봐."
신출내기에게 개국 특집 프로그램을 맡겨주신 국장께 고마웠다. 그런데 말이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작가는 없어. AD도 없고, 선생이 직접 출연도 하고, 편집도 해야 돼. 단 카메라감독은 지원해줄게. 제작비는 50만원이야."
기획, 구성, 편집, 출연까지 혼자서 하라고? 50만원은 누구 코에 붙이라고? 자리에서 물러나왔다. 막막했다. 할 수없이 해야 하니까 했다. 기독교 목사님도 만나고, 하이텔 불교동호회 사람들도 만났다. 굵직한 IT기업들의 서버실도 들락날락했다. 학인 스님을 삼성SDS에 모시고 가서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화상통신 장면도 찍었다. 스님은 모니터 속 상대방을 보며 합장하셨다. 그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스님도, 나도, 모니터 속 누군가도.
IMF가 왔다. 회사가 흔들렸다.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절반이 넘는 동료들이 회사에서 내쫓겼다. 1년이 넘게 월급이 밀렸다. 버틸 수가 없었다. 결국 회사를 떠났다. 여러 직장을 떠돌았다. 그리고 2022년, 다시 불교TV로 돌아갔다. 맡은 일은 유튜브였다. 뉴미디어로 시작했는데, 뉴미디어로 돌아간 것이다. 인연이라는 것이 다 이렇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둥글게 말려 빙빙 돌다가 결국 제자리다. 하지만 같은 자리가 아니다. 나이가 들었고 세상은 변했고, 불교도 달라졌다.
어머니는 오늘 아침에도 기도하셨을 것이다.
“아들이 술 많이 마시지 않기를. 살아있는 것 해치지 않기를. 자식들이 건강하기를..”
나도 아침에 일어나 나직이 기도문을 읊는다.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내가 될 수 있기를. 마음에 선한 씨앗 하나를 심을 수 있기를. 부처님 가르침을 조금이나마 세상에 펼칠 수 있기를...”
어머니와 나는, 서로 모르게 같은 방향으로 기도하고 있다.
어머니는 아흔이 넘은 굽은 등으로, 나는 아직 제대로 펴지지 않은 마음을 추스린 채로 기도한다. 부처님 계신 문중에서 살아오며 절밥이라도 먹고 살았으니 이만한 것이라고 위로도 해본다. 모두 다 함께한 인연들 덕분이다.
유권준 l 동국대학교 지리교육과를 졸업했다. 불교계 신문사와 방송, 일간지 인터넷팀에서 일했다. 현재는 불광미디어 콘텐츠실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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