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 작가가 들려주는 인드라망, 토포필리아(장소애)

- 정여울 작가의 이럴 땐 이 책을!

이 푸 투안 지음, 윤영호․김미선 옮김, 사이 刊, 2020년

단순한 장소를 특별한 공간으로 만드는 힘 『공간과 장소』

“집에 사는 자는 집에 묶이고, 집을 나온 자도 마음이 집을 떠나지 않으면 묶여 있다.”
— 『숫따니빠따(Sutta Nipāta)』 제1장 「뱀의 경(Uraga Sutta)」

어린 시절에는 내가 이렇게 많은 장소를 여행하며 살게 될 줄 몰랐다. 여행과 출장이 섞여 있는 이동, ‘일과 휴식’이 공존하는 형태의 장소 이동이긴 하지만, 고된 일정이 잔뜩 쌓여 있을지라도 나에게 여행은 ‘휴식’이 된다. 일로부터 놓여날 수 없다면, 무엇으로부터의 휴식일까. 바로 ‘집에 묶이는 마음’으로부터의 휴식이다. “집에 사는 자는 집에 묶이고, 집을 나온 자도 마음이 집을 떠나지 않으면 묶여 있다.”는 말씀을 펼쳐 놓고 보니 여행이 주는 기쁨의 뿌리를 알 것 같다. 익숙한 장소가 가져다주는 편안함이 좋지만, 그 장소에 묶여 있을 때, 우리는 이런저런 잡념에 사로잡힌다. 더 아름답게 꾸미고 싶고, 열심히 청소하고 싶고, 쌓여가는 짐들에 괴로워하면서, 집에 묶인 마음은 갈 곳을 잃게 된다. 불현듯 충동적으로 떠나는 여행이 좋은 이유는 공간에 묶인 마음을 풀어주는 해방의 몸짓이 자연스럽게 시작되기 때문이다.

공간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때 그곳은 ‘장소’로 발전한다

<공간과 장소>라는 기념비적인 역작의 저자 이푸 투안은 공간에서 우리 인간이 겪는 '경험'과 그곳에서의 '감정'을 중요시한다. "공간에 우리의 '경험과 감정'이 녹아들 때, 즉 공간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때 그곳은 '장소로 발전'한다"고 선언한다. 공간이 ‘서울시 마포구’라는 식으로 좌표를 찍을 수 있는 객관적 위치라면, 장소는 ‘내 마음이 비로소 편안함을 느끼는 곳’이라는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의미 부여를 필요로 한다. 저자는 우리의 일상적이고 미묘한 삶의 경험들이 장소에 대한 우리의 감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본다. '공간과 장소의 대비'를 통해 '인간과 장소 간의 따듯한 유대감', 즉 장소애를 탐구하는 것이다. 장소애를 가리키는 ‘토포필리아’라는 아름다운 단어는 그 단어를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달콤한 즐거움을 준다. 장소를 뜻하는 토포스topos와 사랑을 뜻하는philia가 합쳐진 토포필리아는, 공간을 향한 인간의 사랑이 합쳐졌을 때 비로소 그 공간은 ‘아름다운 장소’로 변신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여기에 햄릿이 살았다고 상상하자마자 이 성이 다르게 보이는 게 이상하지 않나요? 과학자인 우리는 이 성이 오로지 돌로만 되어 있다고 믿으면서 건축가가 그 돌들을 축조한 방식에 경의를 표하죠. 돌과 고색창연한 초록 지붕, 교회 안의 목각물들이 이 성 전체를 이루고 있어요. 그 중 그 어느 것도 여기에 햄릿이 살았다는 사실 때문에 변하지는 않지만 이 성은 이제 완전히 달라졌어요. 갑자기 성벽과 성곽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어요. 성의 안마당은 하나의 온전한 세계가 되고, 어두운 모퉁이는 우리에게 인간 영혼의 어두운 면을 떠올리게 하고, 또한 우리는 바로 여기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말하는 햄릿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공간과 장소> 중에서

햄릿이 살았던 곳이라는 의미 부여가 일어나자마자 평범한 성이 너무도 특별하고 아름다운 장소로 보이는 것처럼, 주인공과 스토리텔링을 알게 되면 모든 공간은 특별한 장소가 된다. 소중한 추억이 깃든 식당, 사랑하는 사람과 첫 번째 데이트를 한 카페가 사라져버리면 깊은 상실감을 느끼는 것처럼, 우리는 공간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 의미가 상실되는 순간 깊은 아픔을 느끼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몸과 마음이 있다. 살아있는 한 몸이라는 장소가 있기에, 실제 장소가 사라지더라도 그 장소의 기억은 몸 속 어딘가에 남아 우리의 남은 날들을 지켜준다. 그런 의미에서『법구경』의 문장은 커다란 위로를 전해준다. “지혜로운 자는 어디에 머물든 그 장소에 물들지 않는다. 연꽃이 물에 있으나 물에 젖지 않듯이.” (『법구경』 제1장) 장소가 주는 기쁨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 장소에 완전히 물들지 않는 굳건한 마음이 우리를 지켜주지 않을까. 장소가 곧 나 자신이 될 수는 없기에, 아무리 아름다운 장소라 할지라도 그 장소를 달팽이집처럼 등에 이고 다닐 수는 없기에. 아름다운 장소는 그저 거기 있음으로써 충분하며, 우리는 그 어떤 장소도 영원히 소유할 수 없기에.

잃어버린 장소는 인드라망으로 이어져 마음 속에 남는다

한편, 우리는 장소를 향한 애착을 끊어내기 힘든 생명체임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사랑하는 장소, 특히 집이나 고향을 잃어버림으로써 느끼는 고통을 노스탤지어nostalgia라고 한다. 노스탤지어라는 단어에는 상실의 고통이 배어 있다. 노스탤지어에는 장소에 얽힌 시간의 관념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장소를 그리워하면서 그 장소에 얽힌 우리들의 시간, 추억, 이야기를 그리워하는 것이기에.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커다란 깨달음을 준 개념이 바로 인드라망이었다.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연기’의 개념과 연결된 인드라망. 장소도 마찬가지다. 장소는 그 장소를 경험하는 존재 없이 장소일 수 없다. 어느 한쪽만으로는 성립하지 않는다. 사람이 장소를 만들고, 장소가 사람을 만든다. 이 상호 의존의 관계망 속에서 장소는 끊임없이 생성된다. 인드라망(Indra’s Net)은 이를 아름답게 표현한다. 제석천의 궁전에 무한히 펼쳐진 그물. 그물의 매듭마다 보석이 달려 있고, 각각의 보석은 다른 모든 보석을 반영한다. 세계의 모든 장소는 이 인드라망처럼 연결되어 있다. 내가 서 있는 이 장소 안에 세계의 모든 장소가 반영되어 있고, 세계의 모든 장소 안에 이 자리가 반영되어 있다. 어느 한 장소의 소멸은 전체 망의 변형이다.

인드라망을 생각하면, 문득 내가 잃어버린 모든 장소들조차 내 마음 속에서만은 그 무엇도 부서지지 않은 채 아름답게 살아남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장소를 경험한 나, 그 모든 장소 속의 이야기와 끝끝내 연결된 인드라망 속의 ‘나’라는 존재가 바로 여기 존재하기에. 잃어버린 장소에 대한 미련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 때문에 너무 아픈 날에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네트워크, 인드라망을 떠올린다. 그 어떤 시간의 덫으로도 포획할 수 없는 아름다운 인연의 네트워크, 그 어떤 집착으로도 온전히 소유할 수 없는 세상 모든 존재들의 눈부신 네트워크, 인드라망을 생각하며 잃어버린 모든 시간들을 향한 아픔을 씻어낸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마음 속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는 그 추억의 장소야말로 진정한 노스탤지어의 장소이며 토포필리아(장소애)의 장소가 될 것이다. 그러니 어떤 장소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너무 슬퍼하지 않기를. 그 장소의 모든 기억과 인연이 우리의 마음 속에 남아 바로 오늘의 나, 오늘의 인드라망을 자아낸 것이니.

 

정여울
작가. 『데미안 프로젝트』 저자, 『서바이벌 리포트』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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