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상 스님과 함께하는 마음공부] 깨달음, 깨달은 자에 대한 환상
깨달음에 대한 환상 버리기
'깨달음', '해탈', '부처'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전혀 깨달음, 해탈, 부처와는 관계가 없다. 당신이, ‘깨달은 부처는 이럴거야’라고 생각하는 그 모든 깨달은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말 그대로 이미지, 상(相), 허상에 불과하다. 그것은 내가 그림 그려놓은 깨달음에 대한 환상일 뿐, 깨달음 그것 자체는 아닌 것이다.
바로 그 깨달음, 해탈, 부처에 대한 나의 허황되고 과장된 해석들이 나의 깨달음을 방해하고 있다!
지금 불교에서나, 불자들, 혹은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깨달음과 부처에 대해 과장되고 환상적인 어떤 것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평상심이 곧 도라고 하듯, 깨달음은 그렇게 대단하거나 과장되고 환상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깨달음은 가장 평범한 것이고, 우리가 늘 누리고 쓰고 있는 것이며, 귀하고 찾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너무 흔해 빠져서 없는 곳이 없다.
깨달음에 대한 환상을 버리기 전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깨달음에 대한 환상 속의 깨달음을 찾아 나서고, 끊임없이 추구하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추구는 무엇을 위한 추구일까? 부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 내가 그려놓은 깨달음이란 이미지, 즉 허상을 추구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정확한 환상이다.
깨달음을 '저 위'에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평범한 이 곳'으로 돌려 놓아야 한다. 그랬을 때, 이 평범하고, 이 당연한, 아무 것도 아닌 그것이 드러날 수 있는 토대가 준비된 것이다.
평상심이 곧 도다
도는 닦는 것이 아니라 다만 물들지 않는 평상심이다. 좋은 것은 취하고, 싫은 것을 버리려는 생각에 물들지 말라. 더 돈 벌고, 인정받고, 관심 받으려고 과도하게 애쓰지 말라.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평상심이다.
마조 스님은 “도는 닦을 것이 없으니, 다만 물들지만 말라”고 했다. 왜 그럴까? 마조 스님의 표현에 의한다면 “자성은 본래 그대로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물들어 있다는데 있다. 마조 스님은 물드는 것을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조작하려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생멸심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 내려는 것이 물드는 것이다. 더 돈을 벌고 싶고, 더 인정받고 싶고, 더 관심 받으려고 끊임없이 생각으로 조작해낸다.
한 생각 마음을 일으켜 조작해 내지 않고, 물들지 않고, 그저 지금 이대로, 있는 이대로의 현실을 그저 있는 그대로 볼 수만 있다면, 눈앞에는 아무런 일도 없다. 모든 일이 다 있지만 아무 일도 없다. 삼라만상 모든 일이 다 일어나면서도, 눈앞에서 적멸이다. 이것은 그럴싸한 말이 아니라, 당연한 현실이며 진실이다. 조작하여 물드는 마음만 따라가지 말고, 눈앞에 있어 보라. 곧장 이것이다. 이것이 전부일 뿐, 다른 무엇이 없다.
마조 스님은 “평상심이 바로 도”라고 하면서 “평상심은 인위적 조작이 없고, 옳고 그름이 없고, 취하거나 버리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다. 인위적으로 생각을 일으켜 끊임없이 좋은 것을 취하고, 싫은 것을 버리려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이 바로 평상심이며 도다.
이 평상심이 바로 우리의 매 순간의 현실 아닌가. 공연히 붙잡아 집착하고, 문제를 만들고, 취하고 버려야 한다고 여기며, 세상과 싸우려 들지만 않으면, 눈앞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단 말인가. 모든 일이 다 있으면서도, 아무 일이 없다.
깨달은 자는 그런 모습이 아니다
어떤 스님께서 이런 질문을 주셨다. 깨달은 사람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대낮처럼 모든 것을 환히 다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자기마다 만들어 놓은 깨달은 자에 대한 상이 있다. 더욱이 그런 도인에 대한 상은 너무나도 높고, 신비적이며, 우리와는 차원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대부분이다.
선(禪)에서는 깨달은 자를 그저 평상심, 즉 평소의 그 마음을 쓰고 사는 사람일 뿐, 우리와 다를 것이 없다고 했다. 다만 번뇌가 소멸되었을 뿐, 분별망상에 사로잡히지 않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리가 없다고 믿는다.
깨달은 자는 척 보면 우리의 미래를 맞힐 수도 있고, 팔자를 한 눈에 알아보며, 벽 뒤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아맞히고, 조금 뒤에 절에 누가 올지도 훤히 다 아는 사람일거라고 여긴다.
혹은 깨달은 자는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일 것이고, 깨달은 자는 아주머니나 평범한 할아버지일 리가 없으며, 큰스님의 모습을 하고 계시거나, 재가자라고 하더라도 특별한 복장에 특별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일 것이라고 여긴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깨달음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그런 것을 깨달음이라고 여기게 되면, 그런 상태를 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삿된 스승을 만나게 된다. 깨달음에 대한 그 어떤 상도 가지지 말라.
내가 스스로 깨닫기 전에는 깨달음이 어떤 것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만들어 놓은 깨달음 상이 없었을 때만, 비로소 깨달음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다.
깨달음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일 수 있다. 깨달은 자는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당신 곁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너무 높은 깨달은 자에 대한 상을 가진 사람에게는 결코 이 평범한 도인이 눈에 띌 수 없다. 심지어 스스로 자기 성품을 확인하고서도, 깨달음은 이런 것일 리 없다고 여김으로써, 자신의 깨달음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깨달음에 대한 상을 내려놓을 때, 깨달음은 아주 가깝다. 아니, 바로 지금 이것이다. 이 가까운 것.
법상 스님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불교학을 공부하다가 문득 발심해 불심도문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0여 년 군승으로 재직했으며, 온라인 마음공부 모임 ‘목탁소리(www.moktaksori.kr)’를 이끌고 있다. 현재는 ‘헬로붓다TV’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목탁소리 지도법사로서 서울 목탁소리휴 주지, 상주 대원정사 주지, 로 있다. 저서로 『보현행원품과 마음공부』, 『수심결과 마음공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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