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폭력, 평화,
그리고 불교의 무외시(無畏施)
허남결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교수


국제구호단체 로터스월드의 캄보디아-태국 국경 지역에서 무력 분쟁으로 발생한 난민 돕기(출처|로터스월드)
우리가 평화적 일상을 누리고 있는 이 순간에도 세계 여러 곳에서는 크고 작은 분쟁과 살상행위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2022년에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2년 전 발발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 간의 국지전도 세계의 반전·평화주의자들을 깊은 절망감에 빠뜨렸다. 도대체 정치는 왜 있고, 종교의 역할은 과연 어디까지인가. 더 나아가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아무리 정의로운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전쟁은 필연적으로 민간인 살상과 각종 범죄 및 난민의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역사는 전쟁이 언제, 어디서나, 항상 존재했다고 기록해왔다.
불교는 정말로 반폭력적인가
보도에 의하면 최근 몇 년 사이에 불교 국가인 미얀마에서도 최소한 74만 2,000명 이상의 로힝야족(Rohinya) 난민들이 불교도의 탄압을 피해 거주 지역을 탈출해야만 했다. 국가수반이었던 아웅 산 수 치와 정부 관료들은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의 고통에 대해 붓다의 가르침이기도 한 ‘무외시(abhayadāna;無畏施)’를 선물하기는커녕 국내 정치용 수사(rhetoric)에 불과한 “평화, 안정, 그리고 법의 지배”를 내세워 로힝야족에 대한 국가 폭력을 정당화했다. 아웅 산 수 치는 미얀마의 군사독재로부터 오랫동안 탄압받았던 민주 인사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미얀마의 지배층은 무슬림인 소수 로힝야족에게 자비와 무외심을 베풀면, 불교도인 다수 국민의 안전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정치적 이유를 내세워 탄압을 당연시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다른 맥락의 자국민 보호주의자들에게서 반복적으로 들어왔던 국내 안보와 난민 보호 사이의 잘못된 이분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1)
마이클 제리슨(Michael Jerryson)에 의하면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불교 국가들은 종교적 반대자들이나 이웃 나라의 불교도들 및 같은 나라 안에서도 자신이 속한 종파 외의 다른 불교 종파와는 공존보다 충돌을 선택했다. 그는 특히 초기 불교 경전들이 불교의 원칙과 국가의 주권 사이에서 다소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붓다가 당시 북인도의 마가다국과 코살라국의 군주들로부터 교단의 존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정치적, 재정적 후원을 받았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한 종교적 보상으로 불교 교단은 통치자들에게 전륜성왕(Cakravartin)이나 법왕(Dhammarāja) 또는 달라이 라마(Dalai Lama)와 같은 종교·정치적 칭호를 부여함으로써 그들의 통치행위를 정당화해주는 한편, 불교의 종교적 권력과 국가의 세속적 권력이 양립할 수 있는 상호 유대 관계를 구축해왔다.2) 이른바 호국불교(護國佛敎)라는 개념도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불교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훗날 전륜성왕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기원전 3세기 무렵의 아소카(Aśoka)왕은 재위 13년째에 있었던 칼링가(Kalinga) 전투 이후 정복 전쟁을 포기하고, 붓다의 가르침인 다르마에 의한 자비로운 통치를 대내외에 천명했다. 그가 인도 전역에 세운 석주와 거기에 새겨진 칙령에는 힘이나 강제에 의한 통합보다는 다르마에 의한 정복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그는 불교에 귀의한 이후에도 1만 8,000명 이상의 자이나교도들을 무참히 죽이는가 하면, 또 다른 잔학한 행위도 서슴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3) 어쩌면 아소카왕은 불교적 이념과는 별개로 현실적인 통치행위에 있어서는 무력의 사용이 불가피함을 알고 있었던 실용주의자 전륜성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붓다는 끝까지 비폭력, 평화주의를 가르쳤다
알다시피 불교도의 수행이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는 경지는 선정 속의 고요한 마음에 뿌리내린 내적인 힘과 통찰력 위에 바탕을 둔 완벽한 비폭력의 성취다. 하지만 자기만의 방식대로 세상을 살려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공격적으로 대할 경우 평범한 불교도가 그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비폭력적으로 상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 불교도는 다른 집단들과 마찬가지로 크고 작은 폭력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이나 가족 또는 조국을 지키기 위한 폭력의 행사에 기꺼이 동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세상의 다양한 가치에 매몰되어 있고, 때로는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 무력의 사용이 불가피하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붓다의 조용하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승리는 증오를 낳고, 패자는 고통 속에 산다. 고요한 자의 행복한 삶은 승리와 패배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SN.Ⅰ.83;Dhp.201)”
붓다는 아자타사투왕이 자신의 삼촌이자 붓다의 추종자이기도 한 파세나디왕의 영토를 침범했을 때 이렇게 말하면서 “정복은 패자에게 비극을 낳고, 이러한 비극은 다시 언젠가 정복자를 굴복시키겠다는 욕망과 증오를 키운다”고, 아자타사투왕을 조용하게 경책했던 것이다. 날이 갈수록 폭력의 일반성과 평범성이 우리들의 일상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 오늘날 붓다의 비폭력주의는 다시 한번 더 우리의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불교의 무외시는 종교 간의 대화를 이끌어낼 보편적 가치다
우리나라도 불과 70여 년 전에 한국전쟁의 참화를 겪은 바 있다. 그때 세계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극동의 조그만 나라를 위해 청년들의 고귀한 목숨과 물심양면의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우리는 낯선 이방인들이 제공한 무외시의 혜택을 받았고, 그 선물의 열매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가져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처럼 불교에서 말하는 무외시는 보편적 휴머니즘의 원천이자 그것의 구체적 실천바라밀이기도 한 것이다. 어려움에 처한 생명체에게 온갖 종류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대자비의 실천인 무외시는 불교윤리의 의무론적 측면이자 좋은 결과와 자비를 동시에 추구한다는 점에서 목적론과 덕론도 함께 품고 있는 ‘오래된 미래의 아름다운 법문’이라는 칭송을 받을 만하다.
엄격하게 말하면 불교의 역사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발발하는 흔한 이유들로 인해 다른 종교문화권과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전쟁의 역사를 함께 공유하고 있다. 다만 불교 안에서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직접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경전에서 전쟁을 미화하거나 부추기는 언급을 아예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교의 ‘불살생계’는 이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상징한다. 그동안 불교는 갈등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자원과 수단들을 풍부하게 발전시켜왔다. 그뿐만 아니라 불교는 통치자의 호전적 폭력성을 누그러뜨리고 중국과 같은 거대한 제국이 큰 내부적 갈등 없이 오랫동안 존속하는데도 나름대로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도 불교는 종교 간의 대화를 주도할 수 있는 명분과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종교라고 볼 수 있겠다. 이처럼 불교의 역사는 곧 다양성을 인정하고 발전시킨 아름다운 전통의 평화지향적 종교였던 것이다. 이는 우리 불교도들이 역사적 자부심을 가져도 충분히 좋은 일이 아닐까 싶다.
<주>
1) Christina A. Kilby, “Legal Reasoning About Displacement and Responsibility: A Dialogue Between the Buddhist Monastic Discipline and IHL”, Journal of Buddhist Ethics, vol.30(2023), pp.229~254
2) Michael Jerryson, “Buddhism, War, And Violence”, in Daniel Cozort, James Mark Shields eds., The Oxford Handbook of Buddhist Ethics(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8), pp.453~478 참조
3) 같은 책, p.466
허남결|동국대학교 국민윤리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문학 박사). 현재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불교윤리와 공리주의의 접점 모색에 관심이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공리주의 윤리문화 연구』가 있고, 번역서로는 『불교와 생명윤리학』, 『자비 결과주의』, 『불교응용윤리학 입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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