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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의 눈높이에서 법을 묻고 보살의 자리에서 법을 전하는 통역자 지덕 스님과 서울 법회 모습 |
관세음보살의 마음으로 법을 전하는 자비의 통역자
티베트는 관세음보살과 본존의 인연이 깊은 반면 한국과 중국은 아미타불과 인연이 깊은 것 같다는 린포체의 말마따나, 긴 연휴 중에도 아미타불 관정과 수행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연령대는 물론 티베트 불교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부터 꽤 오랫동안 수행해온 사람들까지 그 수준도 제각각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다양한 질문과 작은 반응까지 놓치지 않고 챙기며 린포체로부터 최대한 쉽고 구체적인 설명을 끌어내는 동시에, 참석자와 동행한 강아지에게도 사랑의 눈길과 미소를 보내는 지덕 스님. 그녀의 통역은 언어 이상의 것이라 특별하다.
30년간 티베트 불교 수행을 해오고 있음에도 대중의 눈높이에서 법을 묻고 보살의 자리에서 가르침을 전하는 다리의 역할은 법회 이후 법석으로 이어진다. 간단한 식사나 차를 나누며 자유롭고 편한 대화의 장을 마련해주는 스님의 배려 덕에 사람들은 평소 마음에 품었던 의문이나 질문을 풀어놓는다.
그녀 안에는 유쾌하고도 발랄하고 자유로운 말괄량이 삐삐가 있는 것 같다. 상상력과 감수성 넘치는 빨간 머리 앤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면에선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를 닮은 것도 같다. 그보다는 이 사랑스러운 소녀들을 가득 품고 있는 자비의 어머니, 관세음보살 같다.
“제가 생활했던 인도 따시종의 수행자들에 비하면 저는 10분의 1도 못 돼요. 특히 그곳 무문관 어른들의 생활을 보면 동화와 같아요. 그분들이 부처님 법을 믿고 따르고 확신하는 마음의 양은 제가 지금까지 30년간 가까이 있으면서도 흉내조차 낼 수 없죠. 마치 DNA 속에 신심이 있는 것 같아요.”
너와 나를 구분하고 이익과 손해, 칭찬과 비방, 불행과 행복을 구분하면서 이것 아니면 저것, 두 곳을 왔다 갔다 하느라 멀미하고 번뇌 속에서 고통받으며 사는 것이 우리 삶의 흐름이라면, 따시종은 너와 나의 구분이 없고 구분될 필요조차 없어 모든 것이 원초의 본질로 들어가 일원성의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삶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전 따시종을, 둑빠 까규를 좋아하고 존경해요. 삶과 죽음, 이익과 손해, 비판과 칭찬 등 세간팔풍에 절대 마음을 안 두고 오로지 완전한 본질 자체만 추구하거든요. 그래서 사실 가까이하면 재미없어요. 같이 지내면 서로 인사도 주고받고 슬프면 위로도 해주면 좋은데, 아무리 슬퍼도 ‘본질이 공한데 슬픔이 어딨니?’ 하는 식이거든요. 하지만 거짓이 진짜가 되고 무엇이 옳은지 모를 정도로 혼란스러운 AI 시대에, 본질의 법맥을 천 년 넘게 이어온 분들이 옆에 계시면 혼란 속에서도 진정한 가치를 세세생생 추구해갈 수 있는 법을 알려주시죠. 머리로 아는 법은 죽을 때 아무 소용없어요. 가슴으로 깊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어야 해요.”
지덕 스님이 서울 중심지에 수인원만센터라는 린포체들의 처소 겸 불당을 마련한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표면적 가르침뿐만이 아니라 동화같이 맑고 순수한 티베트 스승들의 정서와 일상에 녹아 있는 지혜와 자비를 도시 사람들에게도 느끼게 하고 싶었다. 한편 스님은 구도의 길을 함께 가는 여러 개의 온라인 명상 모임을 수년째 이어오고 있다. 저녁에는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집중하는 선정 수행 모임과 인도 무문관의 스승(켄뽀)을 줌으로 모셔 티베트 불교의 교학과 명상을 함께 익히는 도제창 모임이 있다. 스님이 통역을 맡은 도제창은 5년간 연휴 때도 빠지지 않고 매일 모여 수행하는 모임이다. 그리고 새벽 5시엔 티베트 불교의 기초를 다지는 예비 수행을 함께하는 사가행 모임이 있다. 사가행은 절과 참회 기도, 만다라 공양, 구루 명상을 각각 10만 번씩 해야 하는 수행이라, 줌으로 서로의 수행 모습을 보며 의지를 다지는 모임이다. 이 같은 온라인 명상 모임으로 하루의 시작과 마무리를 하고, 티베트 스승들을 모시고 법회를 열어 다리 역할을 하는 일상들 속에서 스님은 만년 삐삐 같은 발랄함과 순수함을 간직한 채 대자대비한 보살의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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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문관 수행의 전통을 잇는 따시종의 은둔 수행자들 |
일원성의 본질적 세계를 구축해가는 따시종의 삶
망망대해에 돛도 없는 조그마한 배가 풍랑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떠 있는 모습. 20대 중반에 출가해 강원에 다닐 때 내 자신에 대한 느낌은 이러했다. 이후 5년 정도 지난 무렵 그 돛단배에 작은 돛이 달린 느낌이었다. 그리고 30대 중반에 인도로 가 생활하던 어느 날 문득 그 돛단배가 다시 떠올랐다.
“이젠 파도와 풍랑이 사라진 잔잔한 바다에, 돛단배의 크기는 조금 커져 있었고 돛도 똑바로 달려 있었죠. 아주 큰 망망한 바다라 멀긴 엄청 먼데, 그대로 바람 타고 쭉 가기만 하면 되겠더라고요. 그런 확신이 들었던 때가 따시종에서 암틴 노장님을 모시고 있을 때예요. 노장님과 있을 때면 많은 경험들이 항상 가슴으로, 가르침으로 들어왔어요. 어떤 과정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가슴으로 들어온 순간 문제가 그냥 해결되고, 머리가 순간적으로 그 이치를 이해했죠. 암틴 노장님과의 사이에선 깨달음이 그렇게 가슴으로 시작되었어요,”
문수보살의 분노존인 야만타카 수행의 성취자였던 암틴 노장님을 지덕 스님은 10년간 시봉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만큼 스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이지만 그러한 인연을 맺기까진 많은 여정과 일들이 있었고, 강원에 있을 때 우연찮게 접한 책 한 권이 그 시작이 되었다.
“『나는 티베트의 라마승이었다』라는 책이 손에 들어왔는데, 밤에도 놓을 수 없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봤었죠. 그러고 나서 보니 어느새 제가 새벽에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이런 분들과 인연이 되어 공부하고 싶다는 발언을 하고 있더라고요. 이후 3학년 말에 설오 스님이라는 분이 편입하셨는데, 대만에서 유학해 아는 것이 많으셨죠. 함께 맡은 소임이 강원 내 도서관 사서였는데, 졸업 무렵 스님이 티베트 불교에 망자의 의식을 정토로 옮겨주는 ‘포와’라는 법이 있다며, 사랑하는 가족이나 지인들, 반려동물이 죽었을 때 극락정토로 보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며 포와를 배우러 인도로 가자고 했죠.”
스승 같은 도반이 이끌어준 여행길에서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여러 스승들을 만났다. 보드가야에서 포와에 특화된 수행을 하신 디궁 까규의 린포체를 만나 포와 수행을 배웠고, 샤까파의 샤까텐진 린포체가 강원을 연다고 해 데라둔이라는 곳에 갔다 달라이 라마를 처음 뵈었다.
“그때까지도 전 티베트 불교가 정확히 뭔지, 달라이 라마가 어떤 분인지 잘 몰랐어요. 달라이 라마가 어떤 분인지 설오 스님이 설명해주는데, 그런 큰 스승을 뵌 기회에 내 업이 녹고 수행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추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분을 뵌 순간 얼마나 눈물이 흘러내리는지 책자로 얼굴을 가리고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었죠.”
이후 다람살라에서 본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스님들과 민중들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행진을 하고 계셨다. 그것이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행진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내 할 일을 안 하고 있다는 까닭 모를 생각이 들며 또다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한동안 다람살라에서 지내며 달라이 라마 법회를 들으러 다녔는데 그분만 보면 왜 그리 눈물이 나는지, 그분의 미소와 웃음마저 왜 내겐 눈물인 건지 알 순 없었지만 3년을 그렇게 울었어요. 그래서 이 공부를 더 해봐야겠다 싶어 인도에 좀 더 머문다는 것이 20년을 살게 되었죠.”
감정이 이성 옆으로 와 함께하다
캄툴 린포체와 암틴 노장님을 만난 것은, 번잡한 다람살라에서 벗어나 조용한 수행처를 찾던 중에 2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따시종을 추천받아서였다. 길상한 마을이라는 뜻의 따시종은 티베트 불교의 4대 종파 중 하나인 까규파 내에서 무문관 수행의 전통을 잇는 둑빠 까규의 마을이다.
“그곳에 달빛처럼 빛나는 분이 계신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그분이 바로 캄툴 린포체였어요. 암틴 노장님은 그곳에서 주로 외국인들에게 법을 주는 소임을 맡고 계셨죠. 따시종은 환경보단 수행을 우선하는 전통이 있어 환경이 많이 열악했는데, 정말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죠. 덥기는 얼마나 더운지 새벽에 선선한 기운이 잠깐 도는 순간이 있는데, 그때만 기다리다 해가 빨리 떠버려 그 순간조차 잃어버린 날은 망연자실했죠. 물도 나오지 않아 목욕할 때는 냇가로 가 설오 스님과 번갈아 우산을 펴들고 목욕을 했고, 심지어는 우리가 외출한 사이 집이 불타 여권이며 5년 동안의 생활비를 홀라당 날린 적도 있었어요.”
게다가 따시종은 법을 주는 데도 엄격했다. 이 법과 인연이 될지 안 될지를 오랫동안 두고 보며 소 닭 보듯 하는 것이 따시종 어른들의 스타일이라, 스님도 그런 과정을 거쳐야 했다. 예비 수행부터 차곡차곡 한다면 법을 줄 수도 있다는 반승낙을 받고 시작한 사가행은 불에 그슬린 세간살이와 집을 정리하고 청소하면서, 그리고 새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도 지속해 8개월 만에 마칠 수 있었다. 이후 관정을 받고 본 수행을 하면서 따시종에 방문한 한국인들을 위한 통역을 하며 암틴 노장님을 시봉했다.

야만타카(문수보살의 분노존) 수행 성취자인 스승 암틴 노장님과 함께한 모습
하루 같은 10년이었지만, 잊지 못할 기억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중 하나를 꼽자면, 노장님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인도에 작은 땅을 구해 집을 짓던 중 길고양이가 한쪽 구석에 새끼들을 낳고 사라진 사건이 있었다. 도저히 보살펴줄 자신도 마음도 나질 않아 내보낼 생각을 하던 중에 노장님을 뵈러 가 그 얘길 했다.
“그러자 노장님이 ‘그래 뭐 그러면 마을 사람들한테 한국 비구니 스님 둘이 고양이 만두를 해 먹었다고 할게”라고 하시는 거예요. 키우라는 소리셨죠. 그런데 그게 당연했던 게, 한번은 노장님 무릎을 덮고 있는 숄 안에 무언가 꿈틀거리는 게 있었는데 쥐새끼들 다섯 마리가 있는 거예요. 깜짝 놀라 어디서 났는지 여쭤보니, 지붕에서 떨어졌는데 죽을까 봐 보호해주고 있다고 하셨죠. 그런 분 앞에서 새끼 고양이들을 버릴 생각을 했던 거죠. 한 마리는 죽고 두 마리가 있었는데, 생후 12일 정도밖에 안 된 상태라 주사기를 사서 거기에 우유를 넣어 먹여 키웠어요. 그때부터 그 아이들 눈빛을 보게 되었는데, 우리와 다른 옷을 입었을 뿐 똑같은 존재라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설오 스님이 한국으로 먼저 들어가 혼자 살 땐 ‘장수’라는 개를 키운 적도 있었는데, 어찌나 겁이 많은지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요. 저를 지켜주긴커녕 고양이도 무서워하고 자기 밥을 동네 개가 빼앗아 먹어도 짖지도 못하고 ‘어우’ 하며 서럽게 울어댔죠. 그놈은 겉모습만 장수였지, 진짜 겁돌이였어요.”(웃음)
인도에서 온갖 힘든 일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쥐새끼들조차 자식처럼 대했던 스승을 모실 수 있고 그 곁에 있을 수 있음에 행복했다. 지나고 보면 반짝이는 찰나와 같았던 그 아름다운 시절에도, 고백하건대 내 감정은 이성과 따로 놀곤 했다. 이성은 항시 스승에게 집중하길 바랐고 몸은 스승을 시봉했지만, 감정은 걸핏하면 마음 맞는 친구들을 찾아 신나게 놀러 다녔다. 그런 감정에게 이성은 ‘참 안타깝다. 너는 왜 그렇게 집중하지 못하고 오롯이 하나가 되지 못하니?’ 하고 꾸짖었고, 감정은 이성에게 ‘안 되는걸 어떡해!’라며 푸념했다. 그러다 스승이 떠나신 날, 그의 시신 앞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던 감정이 이성 옆으로 조용히 와 앉아 같이 무릎을 꿇고 함께했다. 스승이 떠난 그날로부터 내 감정은 그렇게 다소곳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함영|1998년부터 글을 지어 다양한 매체에 기고했고, 『빅이슈 코리아』에서 편집장을 지냈으며, 글짓기와 기획 및 출판 등으로 곰탕을 끓여 꽃을 꽂고 있다. 『밥맛이 극락이구나』, 『인연으로 밥을 짓다』, 『곰탕에 꽃 한 송이』 등 다수의 저서와 연재물로 ‘음식과 사람의 인연을 통한 성찰’이라는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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