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의 행위를 자신이 직접 실천하는 행위가 참선이다
참선(參禪)이란 용어에는 여러 가지의 의미가 깃들어 있다. 우선 참선이란 좌선(坐禪)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좌선은 앉은 자세로 하는 선의 행위다. 다음으로 참선은 선지식(善知識) 곧 스승을 찾아다니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좌선 수행이다. 또한 참선이란 공안공부(公案工夫)하는 것이다. 공안이란 개인이 반드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생 최대의 문제를 가리킨다. 이처럼 참선이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결국 좌선이라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성취함으로써 개인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면 다시 선이란 무엇인가. 선은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한 수행의 방식을 일컫는다. 소위 보리수 아래 앉아서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조용히 사유함으로써 인생과 우주의 이치를 깨달은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따라서 선의 출현은 불교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천오백여 년의 역사를 지니게 되었다. 바로 그 선의 행위를 자신이 직접 실천하는 행위를 참선이라고 말한다. 이에 참선은 궁극적으로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소위 기사구명(己事究明)을 가리킨다.
선의 성격은 무엇이고 어떤 것인가?
이와 같은 선의 성격은 무엇이고 어떤 것인가.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그 때문에 몇 가지로 한정해 그 기본적인 면모를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선은 어디까지나 종교다. 종교인 이상 좌선이라는 수행을 통해 자기의 본원(本源)에 철저해 절대와 상대의 대립적인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좌선이야말로 선 수행의 기본적인 형태이고, 이상의 실현을 위한 방법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목적이다.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하기 이전에 닦은 좌선은 수많은 방법 가운데 하나의 좌선이었다. 그 까닭은 선정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은 외도의 수정주의(修定主義)와 입장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붓다는 깨달음을 성취한 이후에도 좌선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 경우의 좌선은 소위 오후(悟後)의 수행이었다. 그 까닭은 증상(證上)의 묘수(妙修)로서 깨달음을 유지하고 실천하는 수행으로 소위 행불위의(行佛威儀)였기 때문이다.
붓다의 좌선은 오후 수행으로서 득도(得道)한 상태의 수행이었기 때문에 결코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신단좌(正身端坐)의 자세로 수행하고 있는 그 자체가 본증(本證)의 전체였고 결실이었다.
다음으로 선은 깨달음을 지향한다. 그래서 항상 대오(大悟)와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대오야말로 요컨대 중생적인 생명을 전환시켜 본래의 생명으로 돌아가는 자기혁신의 경험이다. 가령 향엄지한(香嚴智閑)은 돌멩이가 대나무에 닿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고, 영운지근(靈雲志勤)은 복사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깨달았으며, 청허휴정(淸虛休靜)은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그러한 경험은 끊임없는 마음의 정진에 의거한 긴장감이 올바른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촉발된 행위였다. 그것은 불법에 대한 깊은 체험으로서 불법과 자신의 마음이 일치되는 경험이기도 했다. 그러나 불법도 자기를 떠나서는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불법에 철저한 것은 자기를 구명(究明)하는 대오(大悟)의 경험이다. 그 대오는 실로 생명의 근원적인 통일로서 견성(見性)이고 또한 작불(作佛)이다. 견성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근원에 철저해지는 행위로서 본증(本證)의 자기와 계합해 본래면목으로 살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대오의 경험은 개아(個我)를 버리고 사욕(私欲)을 초월하는 근원적인 체험이다.
이와 같은 체험은 단지 일회적인 것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진실로 자기를 건설해 생명을 혁신하는 근본적인 계기이기 때문에 매번의 경험마다 일회적인 특수한 체험으로 다가온다. 그리하여 매번의 경험은 항상 새롭다.
셋째로 선은 자신의 전체를 긍정한다. 그래서 절대타자로서 초월적인 신을 내세우기보다는 자기의 마음이 부처라는 심즉불(心卽佛)의 입장을 지향한다. 그 사상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낸 말이 일체중생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이다. 이것은 범부와 부처의 모순대립을 근원적으로 통일시킨 것이다. 그러나 선은 불성을 성불의 가능성으로서만 추구해 실현하려는 행위는 아니다. 그와 달리 본각진성(本覺眞性)과 계합한 수행이고 깨달음이야말로 선의 본질이다. 선은 본래청정의 불심을 깨달음으로 드러내는 지혜와 그것을 수행의 행위로 보여주는 선정의 합일이다. 그러나 불심 그 자체를 깨달음으로 간주하기는 할지라도 그것을 목표로 삼아 객관적으로 지견(知見)하는 것은 아니다. 곧바로 불심과 계합해 불심으로 살아가면서 그것을 전체적으로 드러내는 행위다. 소위 직지인심(直指人心)과 견성성불(見性成佛)이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넷째로 선은 항상 언어 문자와 함께 할 경우에만 진가를 발휘한다. 그러나 경전의 문자에도 한계를 정하고 또한 그 절대성을 부정한다. 교학에서는 각각 의지하는 경전을 지니고 있어서 그 문자를 유일한 경증(經證)으로 삼았다. 그러나 문자에 의해서 드러난 개념은 결국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고 물고기나 토끼를 잡는 통발이나 올무다. 선을 실천하는 사람은 달을 잊고 손가락에 얽매이거나 물고기나 토끼를 잊고 통발이나 올무에 빠져서는 안 된다. 이것이 선에서 말하는 소위 불립문자(不立文字)다. 그러나 불립문자란 개념의 실체화를 배척하는 것일 뿐이지 문자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자에 휩쓸리지 않고 도리어 문자를 활용하기 때문에 불리문자(不離文字)다.
다섯째로 선은 본래 자기의 발견이다. 어디서 갑자기 땅에서 솟아나거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반드시 지도해주는 선지식과 도반과 지침이 필요하다. 선지식과 제자[師資]의 인격과 인격이 몸소 만나는 전법(傳法)과 사법(嗣法)을 중시한다. 그래서 면수사법(面授嗣法)은 마치 한 그릇의 물을 다른 한 그릇에 고스란히 쏟아붓듯이 붓다의 진정한 깨달음이 역대의 조사에게로 잘 전승되어 남음이 없고 모자람도 없게 이루어지는 행위를 말한다. 이것은 붓다의 인격 전체가 그대로 조사(祖師)의 인격이 되어 어느 때든지 그리고 어느 곳이든지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경험이다. 또한 역대의 조사들 자신이 각각 붓다의 자각으로 되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여섯째로 선은 본래의 모습 그대로를 존중한다. 무엇을 성취하기 위해 애써 조작적으로 분별하는 행위를 멀리하고 순수하고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상황을 지향한다. 그런 까닭에 진정한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선자에게는 세월이 가는 줄도 모르고 매일의 생활이 여일하게 오간다. 기타 선은 생활 그 자체다. 그래서 선의 성격은 불법의 생활화를 역설하면서도 작선문(作善門)인 까닭에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추구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선은 엄격한 금욕주의의 가르침이라든가 난행고행(難行苦行)의 행위쯤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선이 무언가 굉장한 것이기 때문에 범부에게는 함부로 흉내도 내기 어려운 그 무엇으로 간주하게끔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로써 선을 경외시하고 나아가서 출가해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선자들의 전유물로만 생각해 출세간적인 어떤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따라서 아예 처음부터 선에 대해 어렵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경원(敬遠)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선은 그렇게 고답적이고 초연적이며 그것을 맛보기 위해서는 금욕이라고 생각하는 행위를 통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선은 몸과 마음을 경쾌하게 유지해 몸은 언제나 바르게 그리고 마음은 언제나 곧게 하면서 적절한 잠을 자고 적절한 밥을 먹으며 적절한 건강을 유지할 것을 추구한다. 그 때문에 『좌선의(坐禪儀)』에서도 좌선한답시고 지나치게 몸을 혹사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몸은 마음을 담고 있는 그릇이면서 동시에 마음의 모양을 올바르게 형성시켜주는 그릇의 형태이기도 하다. 나아가서 마음은 몸을 근거해 존재하고 몸을 따라 작용한다. 이것이 바로 선 수행에서 몸의 자세를 중시하는 까닭이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는 선 수행은 불가능하다. 또한 제대로 마음을 가다듬지 못하고는 몸이 바르게 서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좌선의 공부에서는 똑바로 앉아라,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라, 그래서 깨침을 자각하라고 말한다.
김호귀|동국대학교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논문 「묵조선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인문학 독자를 위한 육조단경』, 『선어록으로 읽는 금강경』, 『묵조선의 이론과 실제』 등이 있고, 『금강삼매경주해』, 『통록촬요』 등의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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