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원리 - 위빠사나로 가는 길|재가자의 바라밀다

수행의 원리
- 위빠사나로 가는 길

남시중
미국 변호사



불교 수행은 인간의 인식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인가?

불교에서 수행은 진화생물학적으로 형성된 인간의 인식 구조를 전환하려는 노력이다. 

현생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발생한 과다한 심리적 고통이라는 부작용을 수정하고자 하는 자구책이며, 동시에 생물학적 조건을 주어진 숙명이 아닌 도전 가능한 과제로 간주하는, 가장 숭고한 인간적 혁명의 시도라 할 수 있다.

수행은 단순한 심리적 안정이나 고통 회피를 위한 명상 기법이 아니다. 진정한 수행자는 먼저 ‘불법(佛法)’과 불교의 존재론적 관점을 정확히 이해하고,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수행에 나서야 한다.


인식 구조의 전환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경험을 말하는가?

미국의 2010년작 SF 드라마 <카프리카(Caprica)>는 인간의 뇌 데이터를 디지털화해 저장·전송할 수 있는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극 중 한 종교 단체는 신자들의 뇌 데이터를 ‘천국’이라 불리는 가상세계로 옮겨 공동체를 구축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여고생 주인공의 ‘의식(영혼)’이 사고로 군사용 로봇에 업로드된다. 육신은 사라졌지만, 디지털화된 자아는 금속 몸체 안에서 계속 존재하게 된다. AI 알고리즘과 그녀의 인격은 충돌하고, 낯선 몸을 새롭게 길들이는 과정이 시작된다. 

만약 당신이 이런 상황에 놓인다면, 어떻게 그 낯선 몸을 장악하고 통제하겠는가?


그렇다면 먼저, 이 로봇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자각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자각해야 할 것은—“이 로봇은 나의 몸이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이 비유의 핵심은 불교 수행 역시 “이 몸은 내가 아니다”라는 통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이다. 

로봇은 자신이 로봇임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외부 알고리즘에 따라 느끼고 생각하고 움직이고 있음을 자각한다면, 그는 ‘깨어 있는 로봇’—즉 ‘붓다 로봇’이라 부를 수 있다. ‘깨어 있음(사띠, sati)’은 곧 “이 몸과 마음 모두 내가 통제하는 나가 아니다”라는 자각에서 시작된다. 

붓다는 ‘무아(無我, anattā)’를 설하며 되묻는다. “만일 ‘참나(ātman)’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어째서 우리는 몸과 감정, 생각을 뜻대로 통제할 수 없는가?”


우리 몸을 로봇에 비유하는 것이 타당한가?

인간의 몸은 본질적으로 생물학적 로봇이며, 감정과 반응의 약 95%는 무의식적 자동화, 즉 인공지능과 유사한 알고리즘 원리에 의해 이루어진다. 자의식도 그 뒤를 따라가는 해석 장치에 가깝다. 

호흡, 심장박동, 감정과 생각의 대부분은 자의식과 무관한 하위 뇌 회로에서 발생하며, 우리가 ‘의지’를 갖고 내린 결정조차 실은 전전두엽을 비롯한 신경 회로의 전기적 반응 결과일 뿐이다. 행동과 정서는 유전자로 프로그래밍된 알고리즘에 따라 조절되며, 이는 수십만 년의 진화 과정을 통해 점점 더 정교해졌고, ‘나’라는 존재가 마치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통제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뇌과학에서 ‘자아 모델 (self model)’이라 부르는 생물학적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나’라는 유령은 마치 스스로 모든 것을 주도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결국, ‘나(我相, ahaṁkāra)’가 이 몸과 마음을 조종하고 있다는 감각도, 인류 진화가 만들어낸 고도의 착각—곧 뇌의 작동 구조에 기인한 것이다. 이 깨달음이 무아다.


우리 몸이 로봇이고, 뇌의 반응이 일종의 알고리즘이라면, 

그 알고리즘을 수정하고 통제하는 일이 과연 현실에서도 가능한가?

모든 생리 기능을 통제할 필요도, 그것이 바람직하지도 않다. 컴퓨터로 자동화된 현대 항공기를 조종사가 필요할 때만 개입하듯, 수행자 역시 핵심 국면에서만 개입하면 된다. 수행의 목적은 기존 알고리즘을 조정해 새로운 인식과 반응의 구조로 전환함으로써 ‘고(苦)’를 소멸하고 반응과 행동을 자유롭게 재설정해나가는 데 있다. 

붓다는 ‘자각(사띠)’과 ‘성찰(위빠사나)’을 통해, 자기 뇌의 알고리즘을 현상학적으로 관찰하고 해체함으로써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에 도달했다. 이것이야말로 명상 수행의 본질이다.


사띠 수행에도 일정한 방법이나 훈련이 필요한가?

감각이나 감정, 사고 흐름을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은 낯설고 어색할 수 있다. 이렇게 상상해보라: “나는 로봇 안에 갇힌 의식이다. 이 몸은 자동 알고리즘에 따라 움직이고, 나는 그 과정을 지켜보는 ‘관찰자’다.” 아 이 로봇은 “이런 상황에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구나”, “이럴 때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하는 식으로, 관찰자의 언어로 기술해보라.

호흡과 결합한 관찰 훈련은 초기에 사띠의 기초 체력을 키우는 데 효과적이다. 붓다가 직접 지도한 ‘둘숨날숨 명상(anāpāna-sati, 入出息念)’은 사띠 그 자체로 착각될 정도다. ‘간화선(看話禪)’ 화두처럼, 일상 속에서 수시로 이렇게 자신에게 질문해보라—“지금 뭐 하니?” 이 질문을 반복하면 뇌는 어느 순간 이를 자동화하며, 매몰된 자의식을 일단 한 걸음 물러서게 하는 자연스러운 습관이 된다.

화두로 어떤 질문을 계속 던지기만 해도 ‘나’라는 자동화된 반응 구조에서 한 걸음 벗어나 관찰자로 회귀하게 된다. 자동으로 비행하지만 조종사가 수시로 안전운항 점검을 하는 식이다. 화두선의 장점을 일상생활에서 활용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사띠는 하나의 테크닉으로 규정하거나 대치할 수 없는 내면의 인식 태도다. 수행자는 붓다의 ‘사념처(satipaṭṭhāna)’ 설법을 참고해 각자 다양한 방법을 얼마든지 개발할 수 있다 (『불교문화』 9월호 ‘명상의 원리’ 참조).

수행이 몸과 뇌의 작동 알고리즘을 읽고 이를 조절하거나 전환하려는 노력이라면, 과학적 근거가 있는가?

의식의 발생 원리에서 세계적 명성을 가진 신경정신분석 학자 마크 솜스(Mark Solms)는 감정을 뇌간(특히 PAG, periaqueductal gray) 수준에서 자동 생성되는 생득적 충동 시스템으로 보고, 이 반응이 상위 전전두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조절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원초적 감정 충동이 유발된 이후에도, ‘메타인지적 관찰’—즉 사띠—를 통해 그 강도나 반응은 조절 및 전환이 가능하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저명한 뇌과학자 리사 바렛(Lisa Barrett)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란 뇌의 예측 모델에 따른 일종의 ‘가설적(hypothetical)’ 알고리즘 반응이라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감정을 회피 또는 억제하려는 요가 명상과 달리, 불교 명상은 예측 모델에 내장된 알고리즘 자체를 재프로그래밍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현상학적 통찰은 과학으론 영원히 접근 불가능한 영역이다. 과학적 근거보다 더 중요한 것은, 3,000년 가까이 축적되어온 수행자들의 일관된 체험이다.


불교 수행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고(苦)의 소멸 아닌가?

수행의 목표는 ‘고(苦)’의 완전한 소멸, 즉 ‘열반(涅槃, nibbāna)’이지만, 그 뒤에 남는 것은 재가 아니라 새롭게 움트는 보살행이다. 먼저 ‘나’의 고통을 덜어내는 일이 시급하나, 그 자아 중심의 ‘고(苦)’ 또한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무아를 통찰하지 않으면 온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수행은 환경이나 의지와의 싸움이 아니라, 뇌와 몸이 지닌 정서적 안정과 에너지 효율을 향한 진화의 순풍에 돛을 올리는 일이다. 시작은 시간이나 여건이 아닌 결의이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불법(佛法)에 대한 깊은 이해다.  



남시중|시카고에 거주하며 성균관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저널리즘 석사(MSJ)를, 캘리포니아주립대에서 법학 박사(JD) 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개를 위한 변명-보신탕과 동물 권리론에 대한 철학적 성찰』, 『벤처@실리콘 밸리』, 『Why Meditat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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