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가 추구하는 아름다움
법정 스님은 『무소유』에서 꽃 한 송이를 바라본 특별한 순간을 이야기한다. 어느 날 도반 스님이 가꾼 화단 앞에 서니, 그곳에는 양귀비가 활짝 피어 있었다. 스님은 꽃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깊이 매혹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경이였다. 그것은 하나의 발견이었다. 꽃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인 줄은 그때까지 정말 알지 못했다. 가까이 서기조차 조심스러운, 애처롭도록 연약한 꽃잎이며 안개가 서린 듯 몽롱한 잎새, 그리고 환상적인 그 줄기가 나를 온통 사로잡았다. 아름다움이란 떨림이요 기쁨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불교 수행자의 글에서 이렇게 세밀하고 풍부하게 아름다움을 표현한 글을 만나는 일은 드물다. 보통 불교인은 ‘아름다움’의 예찬에 인색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 그것이 곧 집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인간적인 감정이지만 수행의 길에서는 미적 감수성이 집착을 불러올까 두려워 멀리한다.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 속에서는 진리와 선(善)이 더 강조되고, 아름다움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다.
반면에 서양철학에서는 진(眞)·선(善)·미(美)가 모두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라 여겨졌다. 플라톤은 ‘궁극의 이데아(본질)가 감각적으로 드러난 것이 아름다움’이라고 말했다. 세상에 진리가 존재하고, 그것이 우리의 감각 기관을 통해 알려질 때,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그 속에 깃든 진리를 알아차리고 있다는 뜻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세속적인 아름다움은 변화하고 사라지는 덧없는 것이므로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불교와 서양 고대철학의 생각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부처님은 덧없는 세속의 것에서는 참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진리와 선함이 깃든 삶 속에서는 깊은 아름다움이 드러난다고 했다.
불교 경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부처님이 직접 ‘아름다움은 진리다’라고 말씀하신 구절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부처님은 진리가 곧 아름답다고 가르치셨다고 해석한다.
1970년대에 초기 불교 경전을 영어로 번역한 후안 마스카로(Juan Mascaró)는 『상윳따 니까야』를 옮기면서 ‘성스러운 수행자’를 ‘아름다운 수행자’라고 표현했다. 그는 깨달음의 길을 단순히 거룩한 삶이 아니라, 아름다운 삶이라고 본 것이다. 물론 다른 학자들은 이런 번역이 지나치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마스카로는 해탈 속에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고 주장했다. 진리를 경험하는 길은 단순한 진리 탐구가 아니라, 동시에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여정이라는 것이다.
비구 보디(Bhikkhu Bodhi)는 불교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세속적인 미와는 다르다고 말한다. 눈으로 보는 겉모습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마음의 맑음과 선함, 즉 내면의 아름다움을 뜻한다. 인도 예술가 샤크티 마이라(Shakti Maira)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는 불교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정신의 청정함, 즉 내면의 빛이라고 했다.
초기 경전을 보면, 『전륜성왕경』에서 부처님은 ‘승려에게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셨다. 그리고 명확하게 답하셨다. 아름다움은 외모가 아니라 품성과 행동에서 비롯된다. 계를 지키고, 올바른 행동과 자제를 습관처럼 실천하며, 사소한 잘못에도 마음을 살피는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장로니게』에서는 비구니 수바(Subhā)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묘사한다.
“진리의 가르침 속에서 평안을 찾은, 대장장이의 딸 수바를 보라. 욕망의 집착을 벗어나 나무 아래 선정에 잠긴 그녀는, 바른 가르침을 따라 더욱 밝고 아름답다.” 이 게송에서는 믿음과 진리에 의해 신심이 충만한 수바를 아름답다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아비담마 문헌에서는 ‘아름다운 마음(sobhana citta)’과 ‘아름다운 정신적 요소들’을 분류하며, 그 안에 연민, 지혜, 마음챙김 같은 덕목을 포함한다. 결국 불교에서 아름다움은 진리와 선함에 따른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
내면의 아름다움은 관계 속에서 꽃핀다
한 사람의 내면적 아름다움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전해질까? 그것은 눈으로 곧바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울 속 얼굴은 쉽게 비춰 보이지만, 마음속의 빛은 그렇지 않다. 내면의 아름다움은 단번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경험을 함께 쌓아가며 서서히 느껴지는 가치다.
마음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따뜻한 말투나 편안한 표정, 성실한 태도 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감지한다. 작은 배려 한마디, 진심 어린 경청,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내는 모습은 겉모습보다 훨씬 오래 마음에 남는다.
결국 내면의 아름다움은 관계 속에서 꽃핀다. 누군가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눌 때, 말보다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그 사람이 품고 있는 마음의 결이다. 그래서 내면의 아름다움은 장식처럼 덧붙여진 외양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시간이 빚어낸 깊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성격이나 정신적 고결함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것이 표현을 통해 우리의 감각과 감성을 흔들어주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그 아름다움이 즉시 느껴지고, 또 어떤 이는 시간이 지나야 드러난다. 하지만 오래 함께할수록 꾸밈없는 모습 속에서 진심이 보이고, 내면의 아름다움은 더욱 선명하게 빛난다.
우리 마음이 둔해 있으면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만 쉽게 끌려 내면의 아름다움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러나 마음이 깨어 있거나 수행을 통해 분별심이 가라앉으면, 상대의 마음이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더라도 자비와 평온함 같은 내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불교는 번뇌에 가려진 눈으로는 참된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 없다고 말한다. 성자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선함을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감지하지 못한다. 세속의 아름다움에는 쉽게 매혹되면서도, 진정한 아름다움에는 정작 눈이 멀어버리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결국 표현하는 이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의 마음이 서로 연결될 때 드러난다. 계율을 지켜 살아가는 수행자와 세속의 아름다운 여인이 모두 각자의 모습을 드러내지만, 어떤 이는 여인에게서, 또 어떤 이는 수행자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아름다움은 단순한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이어질 때 비로소 살아나는 것이다.
진리와 선, 그리고 아름다움은 결국 하나의 고리처럼 맞닿아 있다. 우리는 타인의 도덕적 품성을 느낄 때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감동한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에도 그것과 통하는 선한 바탕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연결이 없다면 우리는 아름다움을 결코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경전은 마음과 정신의 아름다움을 오랫동안 전해왔다.
법정 스님이 꽃이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있었던 것도, 단순히 꽃의 색과 모양 때문이 아니었다. 스님은 꽃을 통해 드러나는 우주의 생명력, 흙 속에 숨어 있던 창조적 진실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흙 속에 묻힌 한 줄기 나무에서 빛깔과 향기를 지닌 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사건이야말로, 이 ‘순수한 모순’이야말로 나의 왕국에서는 호외감이 되고도 남을 만한 일이다.”
아름다움은 우리 마음이 깨어나는 순간, 세상과 이어지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꽃 한 송이 앞에 멈춰 섰던 법정 스님처럼, 우리도 삶 속에서 문득 찾아오는 그 순간들을 놓치지 않아야겠다. 그것이야말로 진리와 연결된 진정한 아름다움이니까.
문진건|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통합심리대 철학 및 종교연구소에서 석사와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불교대학원 명상심리상담학과 책임교수를 거쳐 현재는 동방문화대학원대 불교문예학과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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