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 가피, 제도(濟度)란 무엇인가|불교, 유신론인가 무신론인가?

구도, 가피, 제도(濟度)란
무엇인가

혜담 스님
불광법회 선덕(先德)


깨달음을 구하겠다는 마음과 실천이 기본
불교에서는 우리들이 사는 이 세상을 사바세계(娑婆世界, sahā loka dhātu)라고 부른다. 사바세계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인토(忍土), 즉 참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라는 뜻이다. 권력의 유무나 재산의 유무와 관계없이 누구라도 살아 있는 한 참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가운데 이 인토를 벗어나고자 수행자가 된 인물이 계신다. 바로 싯다르타 고타마(Śiddhārtha Gautama)라는 성자이다. 이 성자는 29년을 세속(世俗)에서 태자로 살다가 출가해 6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서 인간으로서는 감내(堪耐)하기 어려운 고행의 수행을 완성해서 고타마 붓다가 되셨다.

고타마 붓다는 보통 사람처럼 출생과 입멸(入滅)이 있고, 출가수행과 깨달음의 증득에 따른 부처됨[성불(成佛)]의 과정을 전부 겪은 붓다이다. 이 고타마 붓다의 생애에 관해서 기록한 책을 보통 불전(佛典)이라고 부르는데, 불전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어서 고타마 붓다의 출생과 출가수행과 성불(成佛)과 초전법륜(初轉法輪)과 입멸(入滅) 등을 자세히 전하고 있다. 고타마 붓다께서 성불하신 과정을 보면 출가 전에 세간살이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세간의 모두를 다 경험하셨다. 마침내 죽음을 향해서 달음질치는 그 삶을 아시고, 그 문제를 해결한 죽음이 없는 저 언덕을 모두에게 보이시고자 과감히 왕궁을 뛰쳐나오신다. 이렇게 출가를 단행하고 먼저 아라다 칼라마(Ārāḑa-kalāma)라든가 우드라카 라마푸트라(Udraka-rāmaputra) 등의 위대한 사상가라고 천하가 떠받드는 많은 당시 최고의 성자들을 찾아가서 그분들에게 배우고 문답하고 그들이 도달한 세계를 밟아서 끝까지 마치신다.

그러나 두 스승의 경지가 생사를 끊을 수 있는 대열반은 이룰 수 없음을 알고, 그들을 하직하고 마지막으로 고행(苦行)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고행을 시작하신다. 고행을 시작한 지도 다섯 해가 지나갔다. 아무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지독한 고행을 계속해보았지만, 자신이 바라던 최고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마침내 고타마는 선정수행과 고행수행이 둘 다 참다운 수행이 되지 못하고, 생사 해탈의 진리가 되지 못하며, 결국 일체중생을 구원하는 도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시고 그 모두를 떠나신다. 이렇게 고행과 기왕의 수행과 결별하고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이 자리에서 육신이 다 죽어 없어져도 좋다. 우주와 생명의 실상(實相)을 깨닫기 전에는 이 자리를 떠나지 않으리라’라고 맹세하면서 독자적인 새로운 수행을 시작하신다. 그 자리에 앉으셔서 성도(成道)에 장애가 되는 온갖 요인들을 하나하나 분석해 그 모두를 극복하고 마군(魔軍)을 항복 받아 나이 서른다섯 살, 섣달 초 여덟 날에 동쪽에 샛별이 빛나는 순간 성도를 하셨다. 이처럼 불교 수행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발심 수행하는 구도의 정신이다.

명훈가피(冥熏加被)
위와 같이 구도의 정신으로 수행을 계속하고 있으면 자신이 깨달은 수준에 따른 불보살님의 가피(加被)가 따르게 된다. 여기에는 기도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인지 기본적인 구조를 알아두어야 한다. 부처님께선 대자대비하시고 큰 원을 세우셔서 큰 위신력으로써 완전히 모든 것을 이미 주셨다. 누구에게든지 은혜를 이미 주셨다. 모든 사람에게는 ‘부처님의 진리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어야 한다. 그런데도 첫째는 알지 못했고, 그다음에는 믿지 않고 망심이 가려 있어서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지 않고 다른 생각이 자꾸 나서, 부처님의 크신 은혜가 내 생명 위에 부어졌건만 내가 현실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오는 평화스러움과 기쁨을 명훈가피(冥熏加被)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기쁨을 주시고 성취를 주시는 경우가 많다. 지나고 보면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그 당시에 일이 그렇게 돌아갔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전부가 내 선택에 의해서 내게 온 것이 아니고 또 바람이 불어서 낙엽처럼 굴러온 것도 아니고 부처님의 지극한 자비가 함께 있었음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러나 부처님은 우리가 스스로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깨닫고 능동적으로 쓰기를 원한다. 은혜를 주시거나 기도를 해서 성취해 주시더라도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게 주는 현훈(現熏)의 방법을 쓰지 않는다. 명훈이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기쁨을 주신다.

제도(濟度)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과정을 열 가지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는 심우도(尋牛圖)가 있다. 마음으로 표현되는 소를 찾아가는 과정을 잘 표현하고 있는데, 마지막 열 번째 장면이 입전수수(入廛垂手)이다. 수행자가 수행에서 증득(證得)한 것을 자신의 안락을 즐기는 것에 머물지 않고 세간에 살면서 고통받고 있는 중생들 곁으로 다가가서 그들에게 진리를 전하면서 고락을 함께하는 행위를 말한다. 흔히 상구보리(上求菩提=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하화중생(下化衆生=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한다)한다는 보살의 서원의 회향처를 일컫는 표현이다. 그렇지만 이 표현은 위와 아래라는 등차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행위의 좌우를 함께 실천함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승려들의 입장에서는 선원과 교학의 수학을 끝내고 본말사의 주지직을 맡아서 사찰을 호지면서 신도들에게 법을 설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이웃 종교의 신부나 목사를 포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많이 혼탁해져서 소위 성직자나 수행자라는 사람들이 물신(物神)의 노예가 되어 하화중생이라는 본래의 서원를 망각하고 오직 재산을 축적하는 일에 삶을 바치고 있는 경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어쩌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말세(末世)가 되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세를 만드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비롯한다. 모든 사람들이 정법을 지키겠다는 서원을 가지고 실천한다면 말세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화엄경』에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현상은 자신의 마음이 만들었다는 말이다. 또한 일체유심조라는 말은 인류의 최첨단 과학인 양자물리학에서 증명된 사실이다. 과거·현재·미래가 동시에 존재하며 현재에서 과거에 지은 업(業)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또한 불교의 해인삼매(海印三昧)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우리 중생 세계에는 과거·현재·미래가 차례로 전개되지만, 깨달은 부처님은 이것들이 도장을 찍은 듯이 한꺼번에 보인다는 것이다. 그 열린 세계가 해인삼매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것은 의론적인 허구가 결코 아니다. 인도의 역사와 아소카왕의 탑들이 증명하고 있고, 동남아나 동북아시아의 불교가 그 사실을 현재도 실천으로 보이고 있다. 그런데도 삭발염의하고 수행하고 있는 스님들 가운데 깨달음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다. 그들은 삶의 수단으로 승복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자의 몸을 허물어뜨리는 존재는 사자의 몸에서 나온 벌레라고 비유하신지도 모른다. 스님들이 처음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던 초발심의 정신을 항상 가슴에 새기고 있을 때, 한국 불교는 다시 세계의 정신문화를 선도할 것이다.


혜담 스님|부산 금정산 범어사에서 광덕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승가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북쿄대(佛敎大)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선우도량 공동대표, 조계종 총무원 호법부장, 불광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불광법회 선덕, 각화사 회주로 있다. 주요 저서로 『혜담 스님의 반야심경』, 『고따마 붓다의 정관명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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