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치료와 불교에서의 자아
서광 스님
한국명상심리상담연구원 원장

이번 호에서는 잭 앵글러(Jack Engler)와 폴 풀턴(Paul R. Fulton)이 공동으로 쓴 「심리치료에서 자아와 무아」라는 주제의 글을 소개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불교심리학과 서양의 정신치료를 통합하는데 공헌해온 임상 전문가이다. 특히 잭 앵글러는 「You have to be somebody before you can be nobody」라는 타이틀의 글을 발표한 인연으로 한때 서양 불교계에서 상당한 이목을 끌기도 했었다. 그의 글이 나온 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무아’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이 ‘자아’의 힘을 강조하는 서양의 정신치료자들에게는 난해한 주제였기에 공(空)에 대한 가르침과 함께 불교의 명상을 심리치료에 적용하는데 관심을 두었던 치료자들에게는 상당한 이슈가 되었던 토론 주제 가운데 하나였었다.
그런데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내용들을 보면 알겠지만, 그동안 서양의 심리치료가 ‘무아’의 개념을 ‘자아’의 개념과 함께 현실의 삶과 실제 임상 장면에 활용해온 치료 체계-내면가족체계(Internal Family System: IFS)-를 보면 참으로 놀랍고 감탄스럽다. 내면가족체계는, 우리의 내면에도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작용하는 부분들이 복잡하게 얽혀서 다양한 역동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들의 관계가 마치 우리의 가족 구성원 관계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즉 가족이라고 하는 조직 자체가 누구 한 사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나’라고 하는 존재는 하나의 단일한 특성과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들처럼 여러 다양한 부분들로 내면의 가족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뜻이 맞고 조화와 균형, 상호 존중하는 자세로 소통할 때, 건강한 가족이 될 수 있듯이 우리 내면의 부분들도 ‘나’를 이루는 부분들이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때 건강하다는 것이다.
치료에서 내면가족체계는 억압, 갈등, 비난 등 부정적인 작용을 하는 ‘나’의 부분들이 서로 조화롭고 통합적으로 작용하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한 목표를 위해서 무아에 접속하는 것을 성공적인 치료를 위한 열쇠로 보고 내담자들로 하여금 무아에 대한 자유로운 경험으로 나아가는 방법과 길을 안내한다. 이를테면 내면가족체계에서 첫 번째 도전과제는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다양한 부분들을 인식하고, 부분들의 존재와 활동을 인정하는 것이다. 두 번째 과제는 그러한 부분들을 자아로 착각하지 않음으로써 환상에 불과한 자아를 보호할 필요성도 줄어들기 때문에 어느 정도 무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세 번째 도전 과제는 각각의 부분들이 건설적이고 바람직한 역할을 찾을 수 있도록 부분들과 함께 노력하는 것이다. 내면가족체계에서는 이러한 도전들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나’의 부분들을 ‘나’ 또는 ‘나의 것’으로 취하지 않은 채, 부분들을 명료하게 자각하고 관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내면가족체계에서 치료의 기제는 우리가 겪는 순간순간들의 감정을 자신의 전체가 아닌 부분으로 인정하고 이해함으로써, 격한 감정을 경험하는 순간에도 그 감정을 자신과 동일시하거나 휩쓸리지 않고 또 다른 감정이나 생각들이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에게 화가 났을 때, 우리 자신이 화의 감정과 동일시해서 자신이 화 자체가 되어서 남편을 향해 화를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을 향한 사랑, 감사, 의지 등 무수히 많은 다른 감정들도 자신의 일부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 모든 부분들의 감정들을 중간자 입장에서 들어주고 수용해주는 것이다. 그 구체적 방법의 일종으로 “오는 것은 오게 하라. 가는 것은 가게 하라. 남아 있는 것을 보라”는 라마나 마하시의 말은 『대승기신론』의 생멸심을 상기시키면서 상당한 여운을 남긴다.
그런데 위의 탈 동일시 기법들은 내면가족체계뿐만이 아니라 요즘 대중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불교명상을 기반으로 하는 모든 치료 체계들에게서 보이는 공통점이다. 반면 내면가족체계가 보여주는 독특한 점은 ‘무아’의 가르침을 치료 체계에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의 내적인 심리 상태를 다루거나 또는 타자와의 대인관계에서 원만하고 조화로운 관계 맺기나 소통에 특별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아주 유익한 방편을 제공해주고 있다.
불교심리학에 의하면,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보호하는 자아가 우리들의 믿음과는 달리 실체가 없다. 그것을 ‘진짜’라고 착각하는 것이 심리적 고통의 주원인이라는 것이다. 일어나는 모든 경험에 일관된 ‘나’는 없다. 그러므로 불교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근원적인 실체는 ‘무아’ 혹은 팔리어 아나타(anatta)로 설명된다. 무아는 현대 심리학과 심리치료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새로운 개념이지만,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이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심리적 고통을 완화하는 데 커다란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서양에서 자아는 흔히 어린 시절에 적절한 정서적 자양분과 사회생활에서 계속되는 상호작용에 의해서 자연적으로 발달하고 성취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서양 심리치료는 우리가 흔하게 알고 있는 자아에 대한 견해-나는 존재한다-를 취하고 있다. 그러한 견해는 다른 이들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하며, 도덕적 판단과 통제, 그리고 궁극적 가치에서 비교적 영향을 받지 않는 자아에 도달하는 것이 최상의 성장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불교심리학은 영속적이고 독립된 자아를 성숙의 특징으로 받아들이기보다 분리되고 영속적인 자아에 대한 집요한 착각을 심리적 고통의 주된 원인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치유 체계에서 불교수행은 즐거운 것은 붙잡으려 하고, 괴로운 것은 피하려고 하는 것이 착각을 강화시키고, 불행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궁극적으로는 자아의 덧없음을 밝히려고 한다. 불교에서 아나타(anatta) 또는 무아는, 대개 비교적 진보된 수행 단계의 통찰(마음챙김, 또는 위빠사나 vipassana) 명상의 산물로 여겨진다. 사실 무아는 자아의 표상을 분리되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서 구성하지 않는 어떤 경험의 순간이다. 나 자신을 ‘나’, ‘나의 것’ 혹은 어떤 표상이나 정체성을 전혀 구성하지 않는 어떤 시간이다.
무아의 순간이 자연스럽게 일어났던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이름이 불리는 것을 듣고 생각 없이 대답하는 것, 아이가 처음으로 자전거를 넘어지지 않고 탔을 때의 희열, 피아니스트가 완전히 몰입해서 자신을 의식하지 않고 연주할 때, 상담사가 환자에게 완전히 동화되어 듣고 있는 것 등이 있다. 이러한 모든 경험은 그 핵심에 우리들이 하는 일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느낌을 갖게 한다. 실제로는 그것조차 부정확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무아의 순간에는 ‘나’라고 느끼는 감각이 없고, 주체와 대상 사이에 주관적인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자각은 ‘비이원’적이다. 이런 종류의 모든 경험은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 느끼는 것, 그리고 행동하는 것이 분리된 자아-행위의 주체와 대상-를 중심으로 구성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심지어 ‘생각’을 자아 없이 하거나 ‘내’가 그것을 한다는 생각 없이 매우 잘 일어날 수 있다. 그런 무아의 순간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호기심과 연민, 그리고 즐거움을 가지고 좀 더 효율적이고 현명하게 기능하는 경향이 있다.

임상 훈련에서의 자아, 그리고 무아
우리들 대부분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로 인해서 심리적 에너지가 묶여 있는 영역들이 있다. 성공적인 치료는 갈등하지 않는 영역을 확장시키고, 갈등하는 영역을 축소시키는 데 있다. 이 과정은 자기중심주의로부터 무아로 이동하는 것과 유사하다. 우리가 중심축이 같은 그룹 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원 내부의 대부분은 아주 개인적이고, 방어적이고, 흥분적인 ‘나’ 또는 ‘나의 것’과 관련되어 있다. 바깥쪽 원은 우리가 ‘나에 관한 것이 아닌 것’으로 경험하는 부분이며, 개인적인 것이 개입되지 않는 부분이다. 내 정체감의 위기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선 소유적이 되고, 나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 문제에 대해선 그렇게 관심을 두지 않게 된다. 무아의 성장은 ‘나에 관한’ 원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반면, 동시에 ‘나에 관한 것이 아닌’ 나머지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치료에서 환자는 매우 개인적으로 받아들였던 어떤 일(상사가 째려봄)이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이 벌어진 일(상사는 그날 아침에 자기 남편과 싸우고 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수 있다. 무아에 대한 통찰이 커지면 개인의 경험은 점점 더 개인적인 것이 개입되지 않은 채로 다가올 것이고, 끝내는 자신의 죽음까지도 그렇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경험은 단지 경험일 뿐이고, 우리의 경험이 나에게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지나치게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임상적 적용
내면가족체계(Internal Family System, IFS-Schwartz, 1995, 2001)는 무아에 접속하는 것을 치료적 변화로 이끄는 열쇠로 보는 최근의 치료 접근이다. 이 접근법은 또한 특정한 개입을 통해서 어떻게 무아에 대한 자유로운 경험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내면가족체계는 외적인 가족 구성원들처럼, 내적으로도 서로 복잡하고 역동적인 관계의 ‘부분’들로 구성된 체계가 있다는 사실을 관찰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이는 불교심리학에서 말했듯이 자아는 처음부터 단수로 된 독립체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첫 번째 도전과제는 ‘나’라는 존재가 본질적인 그 누군가가 아니라 나에 대한 다양한 측면들, 즉 부분들을 인식하는 것이다. 두 번째 과제는 그들과 섞이지 않는 것이다. 내가 섞이지 않을 때, 나는 즉시 어느 정도 무아 혹은 아나타에 이를 수 있고, 환상에 불과한 자아를 보호할 필요성도 줄어들게 된다. 세 번째 도전은 삶과 일을 조화롭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써 그들이 건설적이고 바람직한 역할을 찾을 수 있도록 부분과 함께 노력하는 것이다.
만약 내면가족체계 첫 회기에 초대받아서 ‘내면으로 들어가는’ 한순간을 갖게 된다면, 나는 어떤 유형의 마음챙김 수행에서나 직면할 수 있는 동일한 생각, 감정, 신체 감각, 불안, 욕구, 신념, 그리고 몰입의 흐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면가족체계 모델에서는 나의 주의를 요구하는 나 자신의 일부가 나와 소통하고 싶어 하는 생각 또는 감정에 다가간다. 다시 말해서 그와 같은 생각이나 감정이 일시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고유한 역사, 대상에 대한 고유한 관점과 접근 방법, 특이한 믿음, 특징적인 기분과 감정, 다른 부분과의 고유한 관계,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내 삶에 작용하는 고유한 역할이나 기능을 가지고 있는 나의 일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제 내가 자기 비판적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며, 상처받은 나의 한 부분에게 그것이 나와 소통하고 싶은 것을 나에게 말하거나 보여주기를 바라면서 다가간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제일 먼저 발견하는 것은 다른 어떤 특별한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나의 이 부분이 보이고 들리는 것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다음으로 내가 발견하는 것은 보이고 들리고 싶은 다급한 욕구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내가 만일 편견이나 판단으로 다가간다고 느끼면 이 부분도 스스로를 드러내거나 나와 관계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내가 다가가는 것이 진실하다면, 그 부분은 나의 질문에 응답할 것이며, 자기가 나에게 무엇을 이해받고 싶은지 보여주거나 말해줄 것이다.
다음으로 내가 발견하는 것은 나의 이 부분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고, 더 중요하게는 자신의 노력에 대한 감사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절망하고, 비열하며, 이기적인 나의 그런 부분들을 포용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방어도, 촉진도 없는 무아에 대한 도전이자 가능성이다. 내가 또 발견하는 각 부분이 내 삶에서 특정한 역할을 수행해왔으며, 고유의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나의 특정한 부분의 행동이 얼마나 나쁘게 보이거나 느끼게 되는지와 관계없이 내가 만일 진실하게 탐색한다면, 나의 부분은 항상 진실로 내가 원하는 최고의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각 부분은 더 많은 상처와 실망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나의 내적 또는 외적 삶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내가 다룰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노력해오고 있다.
성공적인 치료에서도 부분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내 자신의 일부로 남아 있게 된다. 내면가족체계의 치료 목표는 지휘자가 개개인의 악기들이 연주를 잘하지 못할 때 그것을 오케스트라 밖으로 던져버리려 하지 않듯이, 부분들을 단일 인격에 결합시키려 하거나, 변화시키고, 교정하고, 제거하려고 하지 않는다. 일부 영적 전통에서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원하지 않거나 ‘불선한’ 부분을 ‘초월하는’ 것도 내면가족체계의 목표가 아니다. 전체 시스템의 행복에 기여할 수 있는 더 좋은 역할을 찾아서 함께 작업하는 것을 배우도록 돕는 통합이 목표다.
탈 동일시의 지혜
부분들은 종종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집요해서 우리가 그들을 알아차리기 전에 우리를 납치해서 장악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고 나서는 우리가 말하거나 행동할 때,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 부분에 대해서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분이 되어서 말하거나 행동한다. “나는 화가 난다” 또는 “나는 죄책감을 느낀다” 또는 “나는 창피하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화가 나는 것은 나의 일부분이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또 다른 부분이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 역시 또 다른 부분일 뿐이다. 그래서 첫 번째 단계는 항상 부분의 존재나 활동을 인정한 다음, 부분들로부터 분리하고, 물러나는 것이다. 혹은 부분들을 거부하거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관계하기 위해서 부분들로 하여금 물러나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부분이 뒤로 물러나고 내가 더 이상 그 부분이 ‘나’라고 동일시하지 않는다면, 나는 무엇을 발견할까? 인도의 현자 라마나 마하시(Ramana Maharshi)가 즐겨 말했듯이, “오는 것은 오게 하라. 가는 것은 가게 하라. 남아 있는 것을 보라.”(Adyashanti, 2006, p. 65에서 인용) 무엇이 남아 있는가? 나의 부분들과는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뭔가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알아차리면서 관찰하고, 우리 자신의 많은 부분들과 혼합되지 않고, 그들로부터 서서히 분리될 때, 우리의 근원에 있는 영속적인 나, 자아가 아니라 어떤 판단이나 의제가 없는 단순한 자각 그 자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진실로 무아로 산다는 것은 창의적이고 치유적인 방식으로 내 자신의 모든 부분과 상호작용하는 것을 의미하고, 나의 내면가족의 적극적인 구성원이 되는 것이며, 다른 부분들이 보이고 들리도록 격려하는 것이며, 더욱 건설적인 역할을 하도록 보살피는 것이며, 그들이 서로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내가 나의 부분들과 섞이지 않을 때, 나는 나의 핵심, 나의 본질, 나의 진정한 본성, 나의 자연스러운 상태가 이미 된 것이고, 항상 선한 상태로 있을 것이며, 자아의 어떤 특정한 표상과 동일시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말하는 지혜(panna)라는 것이다. 특별한 실체가 아닌 것에 대한 아주 분명한 깨달음이고, 따라서 차별 없이 모든 것을 향해서 연민적일 수 있다.
타고난 연민
자신이 연민적이고 평화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연민과 평화가 이미 그곳에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제한된 자아상과 신념의 인질로 삼는 우리 자신의 부분에 휩쓸리지 않을 때, 그들은 모든 이들에게서 똑같이 선하고, 치유적이고, 창조적인 특질로 드러난다. 내면가족체계는 핵심적인 선한 특질을 정의하기 위해 8C를 사용한다. 8C는 고요함(calmness), 명료함(clarity) 또는 지혜(wisdom), 호기심(curiosity), 연민심(compassion), 자신감(confidence), 용기(courage), 창조성(creativity), 유대감(connectedness)(Schwartz, 2001)이다. 내면가족체계는 또한 기쁨, 유머, 수용, 용서, 그리고 감사를 추가적인 긍정적 특질로 본다(Schwartz, 1995). 이러한 특질은 불교심리학에서 발견되는 ‘바라밀(paramis)’ 수행이나 ‘칠각지(bojjhangas)’(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인들: 마음챙김, 조사, 에너지, 기쁨, 고요, 집중, 평정)와도 비슷하다. 이들은 깨달음과 진실로, 지혜로운 행동을 위한 필수적인 마음 특질이다(Nyanatiloka, 1972). 그들은 항상 비추는 태양과 같다. 문제는 오직 구름이 덮고 있는 것뿐이다. 구름이 걷힐 때, 나를 낚아챘던 부분을 뒤로 물러서게 했을 때, 무아의 햇볕이 내리쬐기 시작할 것이다.
무아로부터 보는 것
무아의 상태에서 나는 어떤 자의식이나 자각하고 있는 자아를 갖지 않고 오직 깨어 있을 뿐이다. 자각도 나의 또 다른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자각은 또한 경험이 아니다. 자각은 ‘이것’과 ‘저것’으로 표현될 수 없다. 자각은 모든 경험의 조건이다. 경험을 가능하게 만든다. 거기에는 나의 부분들을 ‘나(me)’와 ‘나의 것(mine)’으로 취하지 않은 채, 그들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관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내면가족체계 용어로 말하자면, 내가 부분적으로든 또는 전체적으로든 자신의 어떤 부분에 휩쓸리지 않을 때, 거기에는 보는 자가 없는 봄이 있고, 생각하는 자가 없는 생각이 있고, 행위자가 없는 행위가 있다.
◎ 내면가족체계로 가는 길 훈련
* 편안한 자세를 취한 후 두어 차례 깊이 숨을 쉬어보세요.
* 준비되었다고 느끼면, 점차적으로 여러분의 관심을 내면으로 돌리고, 길의 시작에 서 있다고 또렷하게 상상해보세요. 당신의 생각과 감정들, 당신의 몸과 신체 감각들을 또렷하게 모읍니다. 그들에게 당신의 의도는 그저 홀로 그 길을 걸어가고 싶을 뿐이라는 것을 알려주세요. 그리고 당신이 지나가는 동안 그들 모두 여기에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는 것도 알려주세요.
* 만일 그들이 당신이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에 대해서 불안해하면, 당신은 돌아올 것이고,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세요. 그리고 이것이 모두에게 유익할 것이라는 것도 알게 해주세요. 여전히 불안해하는 부분이 있으면 덜 불안해하는 부분들이 돌봐주도록 하세요. 불안해하는 부분들이 여전히 당신이 가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그들과 함께 그들의 걱정에 대해서 대화해보세요. 당신이 가도 좋다고 느끼게 되면, 길을 가기 시작하세요.
* 여러분이 걸을 때 여러분 자신의 걷는 모습을 보고 있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자신의 어떤 부분과 섞여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 스스로 길을 갈 수 있다는 걸 여전히 믿지 못하는 보호자 또는 목격자 부분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무아의 체험을 하게 되면, 여러분은 자신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바로 보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보는 자는 스스로를 보지 못합니다. 당신이 그 길을 혼자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을 두려워하는 부분을 찾아서 다른 부분에게로 돌아가라고 요청해보세요. 돌아가지 않는다면, 왜 두려운지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 계속해서 걸으면서 모든 감각을 열어보세요. 그냥 보고, 느끼고, 듣고, 감촉하고, 맛보는 것이 어떤가요? 만약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 생각들에게 깨끗함으로 돌아가서 점점 더 순수한 자각과 순수한 현재에 있으라고 요청하세요. 각 부분이 뒤로 갈수록 여러분의 몸과 마음에 열려 있는 공간을 알아차리세요. 에너지의 흐름이 증가되는 것을 알아차려 보세요. 당신이 당신의 부분에 휩쓸리지 않을 때, 당신의 중심핵은 어떠했나요?(이것은 무아에 대한 짧은 경험입니다.)
* 당신의 부분들에게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고 느낄 때, 당신의 부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돌아가세요. 당신의 부분들에게 다가가고 있을 때, 당신이 그들과 섞이지 않는 공간과 에너지에 열려 있는지를 살펴보세요. 당신이 이러한 에너지를 가지고 돌아갔을 때, 당신의 부분들이 어떻게 당신을 맞이하는지를 알아차려 보세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 당신 없이 그들이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를 보세요. 그들에게 당신으로부터 필요한 어떤 것이 있는지를 물어보세요. 당신이 경험한 넓은 공간과 에너지를 그들과 함께 공유해보세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부분들에 미치는 효과에 주목해보세요.
* 끝으로, 당신을 가도록 놓아준 부분들에게 감사를 전하세요. 그리고 당신을 가지 못하게 했던 부분들에게도 당신으로 하여금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세요. 일상으로 돌아올 때, 무아의 공간과 에너지를 함께 가지고 올 수 있는지 보세요.
비이원적인 무아를 자각하는 상태는 불교의 마음챙김 수행에서와 마찬가지로 내면가족체계 치료 모델에서도 똑같이 중요하다. 이 두 가지 치유 방식에서 흥미 있는 차이는 내면가족체계에서는 무아가 보다 드러나게 우리의 내적 부분들과 상호작용을 한다는 점이다. 자아에 대한 폭넓은 이해는 내면가족체계와 같은 획기적인 치료 모델에 영감을 불어넣어주고, 가슴을 자유롭게 해주는 무아에 대한 이해로 환자를 안내하는데 사용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심리적 개입을 알려준다. 무아에 대한 직관적 깨달음은 불교심리학에서 말하는 지혜다. 그러한 깨달음은 필연적으로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에 대한 이해를 알려준다. 이는 결국 우리가 심리치료를 어떻게 해야 할지 재고해보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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