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생각, 나무의 생각|나무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인간의 생각, 나무의 생각


남효창

숲연구소 이사장

단풍은 나무 입장에서 철이 든다는 의미다. 이미 이 가을에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가을이다. 나무는 가을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단풍이 물들고 잎을 떨어뜨린다는 것은 추운 겨울을 무사히 넘기고자 하는 나무의 생존 전략이다. 그러니까 나무는 앞으로 다가오는 3개월이란 미래의 시간을 예측하며 사는 생물인 셈이다. 겨울의 가장 깊은 날인 동지를 지나면 이미 그때부터 춘분이란 시간을 준비한다. 잎과 꽃을 돋아내는 봄은 이미 겨울철에 준비한 결과물이다. 나무는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는 지구의 이치에 잘 순응하는 지상의 가장 대표적인 생물이다. 하지만 인류가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는 방법은 나무처럼 감각으로 획득된 과학이 아니라 지각에만 의존하는 과학적 삶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더 이상 절기의 변화를 느끼며 살기엔 인간의 진화 방향 설정에 문제가 있다. 해가 남쪽으로 지는지 서쪽으로 지는지, 밤과 낮의 변화가 자전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인지조차도 알 필요가 없을 만큼 인류의 삶은 자연의 이치와는 먼 삶을 살아가고 있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풀벌레 소리를 듣고, 상쾌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는 일은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우리에겐 참으로 낯선 일이다.

나무에게 가을은 두 가지 중요한 과제를 주었다. 그 하나는 여름내 성장시켰던 자신의 열매를 가능한 한 자신으로부터 멀리 보내는 일이며, 또 다른 하나는 추운 겨울을 무사히 견뎌내기 위해 겨울을 준비해야 하는 일이다. 자신의 열매를 멀리 보내야 하는 이유는 중력에 의해 자신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땅 위에 떨어지게 되면, 열매 속의 씨앗이 발아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빛이 부족하며, 씨앗이 발아해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땅속 영양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가능한 한 자신의 열매를 멀리 보내려고 하는 나무의 전략이 놀랍도록 신기하다. 겨울이 뚜렷한 지역에서 살아가는 나무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몸속에 지질 성분을 많이 생산해 비축해둔다. 이는 마치 부동액과 같은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추운 지역에서 적응해 살아가는 자작나무는 자신의 몸속에 기름 성분인 지질을 많이 만들어 겨울 추위를 이겨낼 수 있게 됐다. 자작나무의 나뭇가지를 태우면 자작자작 소리가 나는 이유는 바로 이 지질 성분 때문이다. 나무는 과학을 얻기 위한 삶을 살지 않는다. 과학은 삶의 결과물 일 뿐이다. 

현대인은 매우 편리하고, 또 세련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모두 과학기술 문명의 혜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편리하고 세련된 삶을 위해 치뤄야 하는 불편한 대가는 분명 있어 이상기온이나 황사, 각종 피부 질환, 사스, 메르스와 같은 질병 등이 우리를 성가시게 하거나 때로는 위협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 우리가 믿고 있는 자연관에 대한 개념 변화와 생활태도 변화 없이는 해가 거듭될수록 더욱더 우리의 삶을 압박해올 것이다. 바로 환경의 위기, 환경의 역습이다. 이러한 위기 현상은 서서히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고 있다. 도시의 삶에서 자연이 살아 있는 농촌으로 거주지를 옮기거나, 자녀를 위해 농촌이나 대안학교를 선택하기도 한다. 우리가 먹는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으로 유기농산물을 선호하거나 거주하는 주거 공간 또한 친환경적인 재료를 선택하는 경향도 강해지고 있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것이 환경의 역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대안이 될까? 우리가 먹을거리와 주거 공간, 주변 자연환경 중 어느 하나가 오염되었다거나 불안전할 때 부분적으로 유기농 음식을 섭취한다고 해서, 내가 사는 주거 공간만 친환경적이라 해서 과연 건강한 삶이 보장될까. 때문에 과학기술 문명의 발전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태도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란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모든 과학기술의 발전이 오로지 인간을 위한 방향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은 아닐까.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 이 땅의 주인이라고 인식하는 것 말이다. 

‘환경’이란 개념과 ‘생태’란 개념은 서로 어떤 의미일까. 환경이란 사전적 의미는 ‘나의 주변’ 내지는 ‘나를 둘러싼 살아 있거나(생물) 죽은(무생물) 모든 것’이다. 인간의 환경이란 인간을 뺀 또는 인간이 그 중심에 있고, 그 나머지 모든 주변을 의미한다. 이것은 지극히 자기중심, 즉 인간중심적 사고의 출발이다.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인간에게 유익한 것은 보존되고, 보호되거나 사육 또는 재배되어진다. 인간을 위해 유익하다면, 모든 것은 개발되어진다. 그렇지 못한 것은 무관심 상태에 있거나 죽음을 당한다. 인간의 환경적 관점에서의 세상은 ‘좋고’, ‘나쁨’이 확연히 구분되어진다. 식물에도 잡초가 있고 익초가 있다. 새들에게도 길조가 있고 흉조가 있다. 유해조수가 있고 유해식물이 있다. 자연을 보는 이러한 이분법적 분류는 무엇보다도 자연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은 지극히 어느 특정 종을 위해 모두가 희생되어야만 하는 ‘환경’이란 의미의 삶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생태’란 의미는 그와 다르다. 생태란 생물이 살아가는 공간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각각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며, 그 각각의 역할에는 더 많이 또는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그와 같은 구분이 없다. 그 나름의 역할들이 균등하게 중요한 것이다. 생태계는 그러한 역할들이 함께 묶여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환경’과 ‘생태’란 의미적으로 매우 큰 차이를 보일 뿐 아니라, 그것이 현실적 삶으로 실현될 때는 극과 극의 의미를 갖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에 있었던 산업혁명은 인류에게 대량 생산의 길을 열어주었다. 대량 생산을 위해 과학기술은 날로 발전하게 되고, 모든 자연환경이나 그에 깃들어 사는 생물은 모두 사육되고 재배되고 있다. 

환경은 우리의 삶 깊숙이 있고, 생태는 먼 곳에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도시 서울의 주거 공간은 대부분 빽빽이 들어선 연립주택이나 고층 아파트다. 반면 서구의 주거 지역은 대부분  주택과 더불어 주변에는 늘 푸른 녹지와 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과연 서로 다른 두 주거 공간에서의 삶은 어떤 차이가 있으며,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른 아침, 사람들이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듣는 소리는 기계음과 자연음의 차이일 것이다. 자동차 소음과 새소리. 하루를 새소리와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시작하는 사람과 소음과 탁한 공기로 시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삶의 차이가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대도시의 환경은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된 공간이 극단적 단순성을 보인다. 단순성은 편리하고 빠르고 직선적이다. 그 단순성에 현대인은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진다. 인간의 생각이 직선적이라면, 자연의 생각은 곡선이요, 포물선이요, 둥근 원이다. 


살아 있는 모두는 이 땅의 주인이며, 모두가 잠시 머물다 가야 하는 여행객일 뿐이다. (참개구리)


과학은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하고 무한한 상상력을 가능성으로 바꾸어주는 기쁨을 주었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는 인간의 생활을 여유롭고 윤택하게 해주었다. 오늘날 인류의 삶은 과학적 사고와 경제 논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의 삶을 어느 정도 자유롭게 해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학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상상을 초월할 범위까지 발전할 것이며 자본주의는 끝없는 인간의 욕망이 파멸을 가져올 때까지 지속될 듯하다. 이 과학이란 ‘신랑’이 자본주의 경제란 ‘신부’를 맞이해온 이래 그들의 방만한 살림살이가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돌아보는 건 이미 늦은 일이 아닐까 염려된다. 

과학과 자본주의 부부가 낳은 물질적 풍요로움은 총체적 ‘생태 위기’를 불러왔을 뿐만 아니라 그 부부는 지상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을 에너지원으로 간주하게 했다. 인간 또한 에너지를 생산하는 노동력으로 계산하게 함으로써 급기야는 정신적 빈곤과 인간성 상실의 위기를 초래했다. 인류가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과학에는 도저히 계산되어질 수 없는 ‘가슴으로 느끼는 감성’이 존재할 수 있는 여지가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없을 것이기에 인간성 상실의 문제는 심각하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 또한 이익 추구라는 지극히 인간중심적, 욕망중심적 관점으로 말미암아 환경문제를 유발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조차 또다시 과학과 경제 발전에만 전념하는 동족방뇨(凍足放尿)식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자연엔 직선이 없다. 인간이 행한 농토나 건축물은 직선으로 표현되지만 그 밖의 모든 것은 곡선이고 부드러운 선들뿐이다. (주엽나무)


눈부신 과학 문명의 혜택과 경제적으로 풍족한 물질을 누리고 사는 현대인에게 자연이 다시 중요해지는 이유는 바로 이 시대가 상실한 인간성과 건강성을 회복하기 위한 훌륭한 마당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 200년이란 긴 세월 동안에 익숙해진 편리함과 비교 속도란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환경이란 곳에서 생태란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직선의 길이 아닌, 곡선의 길 위에서 때로는 원의 길 위에서 가끔은 나무를 어루만질 수 있는 여유를 부려보는 것이 생태적 삶이다. 가만히 자세히 그리고 가끔은 멈춰 바라보면 아름다운 것들뿐이다. 

나는 오늘도 아름다운 길을 꿈꾸며, 즐거운 마음으로 몇 가지 생태적 실천을 하고 있다. 내가 사는 작은 39㎡ 공간에는 냉장고와 세탁기 같은 가전제품이 없다. 아니 아직까지는 필요치 않다. 손빨래와 때로는 발로 빨래를 하면서 배우게 되는 것이 많다. 빨래를 적게 하는 방법은 빨랫감을 가급적 줄이는 일이며, 더 나아가서 옷가지 등을 가급적이면 구매하지 않는 것이다. 주거지에서 조금 이동하면 마을이 있는데 그곳에 나를 위해 마련된 대형 냉장고와 식품 보관소가 있다. 바로 ‘마트’가 나의 전용 식품 보관소이다. 조금은 번거로울 때도 있지만 그때그때 신선하게 보관된 식품들을 필요할 때 사면 그만이다. 욕심스럽게 냉장고에 꽉꽉 채워둔 식품을 볼 때마다 드는 불편한 마음보다 좀 더 편안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또 얼마 전 고집스럽게 결정을 했다. 작은 공간에서 소비되는 전기를 태양광 집광판을 설치해서 자연에 빚지고 산다는 마음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졌다. 따뜻한 날 오후 신발을 벗고 숲길을 느긋하게, 여유롭게 걸으며, 물소리와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듣는다. 내 일터엔 절대 속도와 절대 경쟁이 늘 화제의 중심에 서 있다. 그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느림과 여유를 자연에서 보충한다.


남효창|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산림생태학으로 석사 학위를, 산림환경정책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학교 산림환경정책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숲을 연구하다가 귀국, 2000년까지 서울대학교 임업 과학연구소 특별연구원으로 재직했다. 현재 숲연구소 이사장, 마인바움 대표이사로 있다. 저서로 『나는 매일 숲으로 출근한다』, 『나무와 숲』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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