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음이 밝음으로
단양(丹陽)이 지닌 단심(丹心)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팔경 사인암과 청련암

단양팔경은 팔백 경 – 유수인들이 사랑한 이유
“한강의 아름다움이 이곳에서 극치에 이른다.”
-1894년 영국인 여성 ‘이자벨 버드 비숍’ 의 책 『조선과 그 이웃 나라』 중에서
단양을 굽이치는 남한강 줄기는 바다로 흘러가며 은하수 병풍처럼 절경을 흩뿌린다. 단양팔경이다.
천년 세월 단양팔경은 수많은 예술가와 학자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멈추게 했다. 유독 눈에 띄는 절경들을 여덟 개로 추려 도담삼봉, 석문, 사인암, 구담봉, 옥순봉, 하선암, 상선암, 중선암 이름을 지었으나 굳이 여덟 개의 풍경에 가둘 수 없이 눈 닿는 모든 곳이 절경이다.

누군가의 마음이 지층처럼 쌓인 변치 않는 마음 - 단심의 땅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 퇴계 이황이 발을 씻으며 지은 글귀 탁오(濯吾)
삼봉 정도전이 사랑했던 도담삼봉, 겸재 정선이 그림에 담은 석문과 삼도봉. 이처럼 단양에는 유수의 인물들이 남긴 마음이 지층처럼 쌓인 자국들이 많다.
고구려 왕실에 충성을 다한 온달 장군, 끝까지 단종을 섬긴 원호, 태조를 도와 조선왕조를 세운 삼봉 정도전, 퇴계 이황이 발을 닦으며 충심을 이야기한 일편단심까지…. 남한강 줄기 따라 단심(丹心)의 족적이 남은 것이다. 나는 그 켜켜이 쌓인 마음을 ‘염원과 기도’라 읽고 싶다. 이 손꼽히던 역사 속 인물들이 변치 않는 단심을 품고 기도를 올리기 위해 찾았던 천년 고찰이 단양팔경의 3경인 ‘사인암’ 뒤편에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
사인암 앞 천변에는 널찍한 바위들 위에 묵객들이 돌에 새긴 바둑판, 장기판도 있고, 아름다운 글귀들도 있다. 이들이 풍경과 함께 사인암을 찾아왔을 때, 치유의 시간을 맛보았던 이유 중에는 ‘변치 않는 단심’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인암은 단양 출신 고려 말 대학자이자, 고려 충선왕에게 ‘도끼를 들고 상소를 올린다’는 지부상소(持斧上疏)의 주인공인 ‘역동 우탁 선생’의 직책 이름을 딴 것이다. 임금을 보필하는 직책인 정4품 ‘사인’이라는 벼슬로 우탁 선생이 재직할 당시에 이곳에 머물렀다고 해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로 재임한 임재광이 그를 기리는 마음을 담아 이 절벽을 ‘사인암’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당연히 변하기에, 변하지 않는 일편단심을 바라고 기리는 마음
청련암에 스며든 천년의 자비심
우탁 선생의 일편단심을 수많은 묵객들이 언급하고, 기린 것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단심이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것만 해도 기도는 시작된 것 아닐까. 고려 말 공민왕 22년(1373년)에 나옹 선사가 창건한 청련암은 임진왜란에 한 번, 1876년 구한말 일본군 침략으로 한 번, 1954년 적색분자 소탕 때 또 한 번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마을 사람들과 스님들, 수많은 불자들의 원력으로 오늘의 자리까지 옮겨졌다. 그래서일까, 청련암의 불상들은 인자한 표정으로 미소를 머금고 계시다. 청련암 극락보전과 관음전, 삼성각과 마애불까지 천천히 걸으며 부처님들을 만날 때마다 ‘내가 끊임없이 변치 않고 염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보자.
청련암 삼성각으로 오르는 가파른 돌계단 옆에 평생 휘청이지 않았던 우탁 선생의 「백발가」를 읽어본다.
탄로가(嘆老歌, 백발가)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글|정진희
방송작가, KBS <다큐온>, <다큐공감>, <체인지업 도시탈출>, EBS <요리비전>, <하나뿐인 지구>, <희망풍경>, MBC <다큐프라임>, JTBC <다큐플러스> 등에서 일했고, 책 『대한민국 동네 빵집의 비밀』을 출간했다.
사진|마인드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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