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신|불교, 유신론인가 무신론인가?

불교와 신

윤원철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


불교는 무신론 종교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예를 들어 『법보신문』 ‘법거량’ 난에 다음과 같은 문답이 실린 적이 있다.

Q: 불교에서 신(神)을 어떻게 보나요?
A: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교는 무신론입니다. 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신을 경외하거나 숭배하지 않는 종교입니다. 신에게 빌고 구하는 불교는 올바르지 않으며 지혜롭지 못한 처사입니다.(출처: 『법보신문』)

하지만 현실의 불자들은 부처님과 보살, 그리고 여러 신중(神衆)에게 기도하며 가호와 복을 빈다. 그렇다면 이는 잘못된 신앙인가? 단순히 ‘불교는 무신론이니, 이런 신행은 잘못이다’라고 규정하기에는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 만약 불교가 본질적으로 무신론이라면, 이런 신행은 이단적이며 비판과 자성을 통해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단순히 옳고 그름의 이분법으로 판정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사람은 본래 초월적 존재를 상정하고 의지하려는 습성이 있다. 불교가 무신론적 전통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신론적 신행이 자리 잡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대중의 습성에 타협한 결과로 빚어진 왜곡”이라고 비판한다. 한편으로 또 다른 이는 “중생을 불도(佛道)로 이끄는 방편”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방편 개념은 다양성과 모순을 포괄할 수 있는 불교의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방편으로 치부해버리면 자칫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할 것까지도 두루뭉술 넘어가며 비판적 성찰이 무디어질 위험이 있다.

따라서 불교가 무신론임에도 유신론적인 양상도 보인다면, 교리와 신행 체계의 맥락 속에서 그 의미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불보살과 신중에 대한 신앙을 사성제·연기·무상·무아·공 같은 핵심 교리와 연결해 설명한다면, 단순한 유·무신론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보다 깊은 이해가 가능해질 것이다. 이번 기획은 바로 그 점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불교의 신앙은 단순한 유신론이 아니며, 무신론적 기조와도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유/무신론을 초월한 불교의 세계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의 신 개념을 넓혀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유대교·기독교·이슬람에서 이어온 절대 배타의 인격적 유일신 개념에 익숙해져 있지만, 인류 종교문화의 역사에서 그런 유일신은 오히려 특이한 개념이다. 유대교·기독교·이슬람의 유일신관에 익숙하다 보면 마치 그것만이 ‘신’의 전형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인류 문화에서 더 보편적인 신 개념은 다신교적 세계관이다. 그런 사정을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성해영 교수가 ‘다양한 신 개념’이라는 글에서 설명해준다. 심지어 유일신 개념에도 범신론적 유일신이나 범재신론적 유일신 등 여러 가지가 있음을 알려준다. 힌두교에서 브라만이 조물주, 유일신이라고 하면서도 “3억 3,000만”이라고 할 만큼 많은 신들을 숭배하는 양상, 즉 일종의 유일신교이면서 동시에 다신교인 것과 같은 양상도 인류 종교문화에 보편적으로 보인다. 그 글을 읽으면서, 불교는 어떤 범주에 해당할지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져도 좋겠다.

부처님과 보살, 그리고 각종 신중을 숭배하고 예배하는 불자들의 신앙은 그 다양한 인류의 신관에 비추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에 대한 풀이는 자현 스님이 ‘불교의 신중신앙’에서 제시해주었다. 한국, 중국, 일본이 모두 “원(元)”이라는 화폐 단위를 쓰지만 실제 화폐는 각자 다르듯, “신”도 종교마다 의미가 다르다고 비유한다. 아울러 불교의 신들은 대부분 불교 이전 인도 종교에서 이어받은 존재들이며, 본질적인 교리라기보다는 덧붙여진 요소라고 보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불교가 신 개념을 수용한 것은 업설과 연기설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견해도 참고할 만하다. 고통과 죄악은 절대자가 내려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은 업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며, 중생 스스로 노력해야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절대론적 신관”을 부정하고 “윤회론적 신관”을 채택했다는 것이다(안승준, 「아함경에 나타난 초기불교의 천신관」, 『구산논집』 3, 1999).

대승불교의 삼신불(三身佛) 사상은 불자들의 숭배 대상인 “부처님” 개념을 더 확장시킨다. 부처님을 단지 역사적 인물 석가모니로 한정하지 않고, 시공을 초월하는 무수한 부처님이 존재한다고 본다. 영어권 불교 교과서에서는 이를 “우주적 부처님들(Cosmic Buddhas)”이라 표현한다. 그 무수한 부처님들은 개별적인 존재이면서도, 개체성의 차원을 넘어서는 법신불(法身佛)로 수렴된다. 삼신불 개념은 대승불교 신앙과 세계관의 가장 광대하고도 심오한 차원을 담고 있어서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운데, 전남대 철학과 이중표 명예교수가 ‘법보화 삼신의 의미’라는 글에서 그 내용과 의미를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삼신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부처님”이라는 존재가 신/인간, 유신/무신, 초월/내재, 유일신/다신 등 이분법적 개념틀이 적용되지 않는 차원의 의미임을 알게 된다.

혜담 스님의 글에서 설명하듯이 불자들의 신행은 크게 구도행, 가피신앙, 중생제도로 나눌 수 있다. 구도행은 자기 힘으로 깨달음을 구하는 자력의 수행이고, 가피신앙은 부처님과 보살 및 신중의 가호와 은혜, 도움을 믿고 의지하는 타력 신앙이다. 제도행은 중생을 돕는 실천으로, 행위 주체자의 입장에서는 자력의 수행이고 도움을 받는 중생의 입장에서는 타력이다. 자력과 타력이 모순되지 않고 유기적으로 함께 한꺼번에 작동하는 그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신행 체계의 원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부처와 범부중생을 구별하고 신과 인간을 구별하며 나와 남을 구별하는 사바세계의 주객이분법 사고의 습성에서는 초월적인 존재들에게 의지하고 간절하게 청해 도움을 받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혜담 스님이 언급하는 현훈가피(감각과 지각으로 경험되는 도움)이다. 이는 다분히 일반 유신론 종교의 인격신 신앙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할 궁극적인 불보살의 가피는 명훈가피(드러나지 않고 깊이 스며드는 은혜)라고 혜담 스님은 분명하게 가르쳐준다. 우리가 요청하든 않든, 알아차리든 모르든, 복과 화를 포함해서 세상 모든 일과 나아가 우리의 존재 자체에 다르마, 즉 정법(正法)의 이치가 깊이 스며들어 있다는 뜻이다.

“부처님”은 한 사람이기도 하고, 산신, 용왕, 성황, 삼신할머니 등 천지신명과 야훼, 알라와도 같이 기도를 듣고 소원을 들어주는 인격신이기도 하며, 도(道)와 같은 비인격적인 궁극의 진리, 즉 다르마 그 자체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범주인 듯 보이지만, 법신불(法身佛)의 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부처님의 작용이기에 결국 그 구분이 무의미하다.

불법의 핵심은 무아와 연기이다. 우리는 누구나 고정된 독자적 개체가 아니고 세상 모든 것과 서로 의존하는 연기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나의 선행의 향훈도, 또한 악행의 독기도 나 혼자만의 업으로 작동하는 게 아니라 이 세상 전체에 스며들어 업보를 일으킨다. 불보살의 드높은 구도행의 공덕이 우리를 제도하는 가피력을 발휘하고, 우리의 구도행이 곧 중생을 두루 제도하는 자비의 가피력과 함께하는 이치가 거기에 있다.

정리하자면, 불교는 유신론인가 무신론인가라는 문제는 경전과 논서에서 많이 쓰이는 이른바 사구부정(四句否定)으로 답하는 게 좋겠다. 논리적으로 상정 가능한 네 명제를 다 부정하는 것이다: 불교는 (1) 유신론이다; (2) 무신론이다; (3) 유신론이기도 하고 무신론이기도 하다; (4) 유신론도 아니고 무신론도 아니다.

부정을 뒤집어 다 긍정해도 괜찮다. 사구부정(또는 사구긍정)은 언어와 개념을 가지고 실상을 재단하려고 하는 습성에 제동을 걸고, 성급하고 단순한 일반론의 편안함에 안주하려고 하는 게으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해준다. 모든 명제가 다 부정될 수도 있고 긍정될 수도 있는 언어도단과 불가사의의 벽은 언어·개념·논리로는 넘을 수 없다.


윤원철|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미국 스토니브룩 뉴욕 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 월간 『불교문화』 편집위원으로 있다. 『불교사상의 이해』,『종교와 과학』 등의 공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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