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잎을 가꾸는 정성으로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면…|숲과 인간의 생존 프로젝트

나무가 잎을 가꾸는 정성으로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면…


남효창

숲연구소 이사장



친구야! 지금쯤 기억 속의 우리 고향에는 청포도 익어가고,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재롱잔치를 벌였던 기억들이 되살아나지 않니? 늘 고독함이 묻어 있는 이메일이나 카톡 같은 소통 수단이 아닌, 손 편지로 곧 찾아올 가을 소식을 나누고 싶다. 이메일이나 카톡이 때때로 미세 먼지나 초미세 먼지보다 더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 벌써 코스모스, 해바라기, 쑥부쟁이, 구절초 같은 꽃머리가 둥근, 소위 두상화서 식물들의 출현이 임박했다. 이 식물들은 왜 봄이 아닌 가을에만 꽃을 피워내는지를, 왜 이들 꽃들의 색깔이 봄보다 더 화려하고 다양한지를, 다듬어지지 않은 야생의 생각을 듣고 싶어진다. 고독함의 이 말기적 현상을 극복할 수 있을 듯해서다.  

굵고 거친 봄비가 지나간 뒷동산의 나무들은 무거운 바람을 가볍고 시원하게 만든다. 흠뻑 물을 먹고 부풀어 오른 나무줄기와 뿌리는 물을 하늘에 닿아 있는 꼭대기까지 빨아올린다. 나뭇잎은 푸르고 빛을 향해 빳빳하게 곧추세우고, 일용할 양식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간혹 몸의 균형을 상실한 나무들의 기둥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버섯이 머리를 내밀고, 나무는 버섯의 숙주가 되고 만다. 숙주가 된 나무는 기꺼이 버섯의 충만한 삶을 돕고, 장수풍뎅이의 보금자리가 되고, 딱따구리의 안락한 안식처로 자신의 삶을 대신한다. 나무가 삶을 만족스럽게 살아내는 방식은 자신의 삶만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기꺼이 다른 삶으로 자신의 삶을 전이한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환경을 비옥하게 하고, 작고 큰 생물들의 서식 공간이 된다. 숲이다. 경쟁과 투쟁을 통한 쟁취의 결과물이 숲이 아니다. 가장 강인하고, 가장 기회적인 나무들만이 살아남고 살아가는 곳이 숲이 아니다. 살아가기 위해 나무가 투쟁해야 하는 대상은 오로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신과의 다툼이며, 또 다른 하나는 변덕스러운 자연환경과의 싸움이다. 오히려 이웃 나무들과 곤충과 새들과 그 밖의 동물들과 손잡고 협력하고 나누며 살아낸 결과물이 숲이다. 숲은 누구에게나 관대하다. 삶을 포기하지 않는 생명들에게 너그럽다. 분노와 질투, 욕망과 무지가 난무하지 않는 세상을 다스리는 곳이다. 숲은 급하고 경사진 성품을 온순하게 한다. 혼자 의지로 살아남는 법을 가르친다.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익힌 나무들만이 더불어 살 수 있는 협력의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무들이 홀로 설 수 있는 힘은 어떻게 얻어지는 것일까? 나는 무엇보다도 나무의 나뭇잎에 주목한다. 나뭇잎은 나무의 가장 중요한 기관이다. 잎을 통해서만이 자신이 필요한 모든 것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잎을 통해 만들어진 포도당으로 단백질을 만들고 지질을 만들어 꽃을 피우고 매년 웅장하게 생장하게 된다. 그러니 잎이야말로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근원이다. 때문에 나무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잎을 가장 건강하게, 가장 많은 영양소를 만들어낼까에 집중한다. 나뭇잎을 자세히 보자. 나뭇잎을 지탱하는 잎자루가 있고, 물과 양분을 이동시키는 엽맥이 있으며, 광합성하는 장소를 제공하는 잎몸, 즉 엽신이 있다. 나뭇잎을 더 자세히 보면 잎의 맥이 보인다. 엽맥이라 한다. 이 엽맥으로 뿌리를 통해 빨아올린 물을 이동시키고, 엽맥을 통해 광합성으로 얻어진 포도당을 나무의 몸통으로 이동시킨다. 엽맥은 마치 수도관처럼 원통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아래위 둘로 분리되어 있다. 엽맥의 상층부로는 물이 이동하는 통로가 되고, 하층부로는 포도당이 이동하는 통로이다. 엽맥은 나뭇잎의 중앙을 관통하는 주맥이 있고, 주맥을 중심으로 측면으로 측맥이 발달되어 있다. 그리고 측맥을 중심으로 실처럼 가는 세맥이 발달되어 있다.

   

생강나무잎

자작나무잎

나무는 자신의 잎을 어떻게 발달시키고,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생사가 결정된다. 그만큼 나뭇잎의 모양이 나무에겐 중요하기에, 자신에게 알맞은 나무 각각의 특징적인 모양을 나타낸다. 나무의 나뭇잎을 보면 그 나무가 어느 지역에서 살아가는 나무인지 알 수 있다. 열대 지역이나 열대 우림에서 사는 나무의 나뭇잎은 두툼하고 반짝인다. 높은 온도에 적응해서 살기 위해선 나뭇잎 속에 있는 수분 증발을 최대한 막는 일이 절박하며, 따가운 빛에 의해 잎의 세포가 파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반짝이는 성분인 지질로 잎을 보호해야만 했다. 왁스 성분과 같은 것이다. 고무나무나 선인장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된다. 선인장은 고무나무와 달리 잎을 가시로 변화시켜야 할 만큼 건조한 환경에 적응한 식물이다. 선인장의 몸통이 결국 나뭇잎 역할을 하는 경우로 변신하게 된다. 반면 전나무나 가문비나무들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온도가 매우 낮은 곳에서 추위와 싸워야 했기에, 나뭇잎의 면적을 줄이는 것이 최상의 생존 전략이었다. 잎의 면적을 좁히면서 두툼한 바늘 같은 모양을 취하는 것이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편이었다. 잎의 면적을 줄인다는 것은 나뭇잎이 해야 하는 역할을 생각하면 치명적 결함이 된다. 그만큼 광합성을 활발하게 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자신이 건강하게 살 수 있을 만큼의 양분을 만들어내기가 어렵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침엽수들은 겨울이라는 추운 계절에도 광합성을 할 수 있는 온도가 되면 적은 양이지만 광합성을 하게 된다. 침엽수가 사계절 늘 푸른 잎으로 존재해야 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 중부 지역에 사는 나무들은 살아가는 방식이 사뭇 다르다. 나뭇잎의 모양이 확연히 다르게 발달했다. 가을이 되면 잎을 떨구는 낙엽활엽수들이다. 이들 나무들의 잎 가장자리를 섬세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산뽕나무잎

 

칡나무잎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란 뒷동산에서 즐겁게 뛰어놀던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린다. 그 시절 뒷동산에서 만났던 나무들이나 동물들은 나에게 두 가지 의미 모두였다. 무엇인가 관심을 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동물이든 식물이든 무생물이든 간에 간식거리인 식용의 대상이거나, 아니면 먹지 못하는 것이었다면, 한나절 즐겁게 놀 수 있는 장난감에 불과했었다. 한여름 머루와 다래, 산복숭아나 앵두를 따 먹고, 칡뿌리를 캐 먹었지만,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잎이 어떤 형태였는지는 영 관심이 없었다. 그냥 직관적으로 그것의 잎 모양을 알았을 뿐이다. 열매가 없으면 그것은 나에게 쓸모없는 나무에 불과했다. 나중에 나무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면서 알게 된 사실들은 제각기 고유한 잎의 특징적 형태가 있다는 것과 그러한 잎들이 왜 그렇게 발달되었는지 알게 되면서부터 나무란 존재는 단순히 열매와 땔감만을 제공하기 위해 살지 않는, 오히려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태초에 낙엽활엽수의 잎은 단순했다. 가장 원시적인 낙엽활엽수는 목련과 식물들이다. 이들의 잎은 가장 단순했다. 가장 단순하다는 잎의 특징은 잎 가장자리가 아무런 변이 없이 선으로 이어진다. 이것을 식물분류학에서는 가장자리가 ‘밋밋’하다고 표현한다. 떡갈나무나 계수나무 잎 가장자리는 더 이상 밋밋하지 않다. 마치 물 위로 바람이 지나고 나면 이는 물결 모양으로 발달했다. 벚나무 등은 잎의 가장자리가 마치 톱날처럼 발달했다. 반면 느티나무 같은 잎의 가장자리는 또 다르다. 톱날과 비슷하지만 한쪽이 각이 없는 톱날이다. 그래서 둔한 톱니라고 한다. 호랑가시나무의 잎 가장자리는 마치 동물의 날카로운 이빨을 닮았다고 해서 치아상이라고 한다. 이처럼 나무들은 자신의 잎의 가장자리를 민감하게 발달시키는데,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선 잎 가장자리의 모양들을 정의해보자. 잎 가장자리가 밋밋한 모양과 물결 모양, 톱니 모양, 둔톱니 모양 그리고 치아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 기본이다. 물론 여기서 섬세하게 더 발달해가는 나뭇잎들이 있지만 말이다. 가장자리가 밋밋한 잎은 포물선으로 표현되고, 물결 모양은 마치 밭갈이를 하고 난 이랑 모양이다. 들고 나는 곳은 그냥 둥근 모양이다. 각이 없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톱니 모양은 다르다. 톱니는 들고 나는 곳에 분명한 각이 있다. 둔톱니는 나뭇잎의 안쪽에 각이 있지만, 밖으로 튀어나온 쪽에는 각이 발달하지 않은 둥근 모양이란 뜻이다. 치아상은 둔톱니의 반대적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나뭇잎의 가장자리 모양이 다양하게 발달한다는 것은 언젠가는 기회가 되고 절실히 필요할 때 나무는 마침내 그 가장자리 모양대로 잎의 분화가 일어난다. 아카시나무나 붉나무나 호두나무나 가래나무처럼 말이다. 한 장의 큰 잎을 여러 장의 작은 잎으로 분화시킨다는 것은 나무 입장에서 그만큼 진화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광합성 효율을 극대화해나갈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며, 이는 나무들이 그만큼 많은 영양분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목련, 단풍나무, 뽕나무는 잎의 분화가 일어나지 않은 단엽이며, 가래나무, 호두나무, 아카시나무와 붉나무와 같은 나무들은 한 장의 큰 잎을 여러 장의 작은 잎으로 잎의 분화가 일어난 복엽으로 발달했다. 나뭇잎의 분화 과정을 칡나무 잎과 붉나무 잎 그리고 아카시나무의 잎을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게 된다.

칡나무 잎을 보면, 3장으로 분화가 일어나 있다. 양쪽 좌우의 잎을 자세히 보면, 중앙을 가로질러야 하는 주맥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분화 이후 아직 완전히 중앙에 위치를 잡지 못하고 있는, 중심을 향해 계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중이다. 붉나무 잎을 보면, 잎의 분화가 일어난 이후, 주맥이 잎자루가 된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 잎자루에는 아직 잎의 부분적인 잎몸을 볼 수 있다. 반면, 아카시나무는 하나하나의 작은 잎들이 완전히 독립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


한 그루의 나무가 거대한 고목이 될 수 있는 것은, 아주 작고, 아주 보잘것없어 보이는 한 장의 나뭇잎을 정성스럽게 다듬고 가꾸어내기에 가능한 일이다. 나무는 자신이 살아야 하는 터전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지만, 그 터전을 자신에 알맞게 제 몸을 변형시킬 수 있는 생물이다. 본디 자연에는 인간을 위해 설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인간의 삶의 방식을 자연에 맞게 설정해야 한다. 자연을 마음대로 가꾸고, 마음대로 재배하고, 마음대로 멸종시켜도 된다는 인간의 생각을 고쳐먹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나무가 전하는 듯하다. 물질만을 요구하고, 생존을 위해 자신만의 안녕을 요구하고, 자신만의 심신 치유를 요구하는 인간의 삶의 태도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나무들은 하나같이 전한다.  

나무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까닭에, 새들이 찾아와 노래 부르고, 모든 생물들이 기꺼이 나무가 마련한 잔치에 동참한다. 자연의 숲이다. 오늘도 나는 꿈을 꾼다. 자연의 숲과 같은 사람의 숲을. 


남효창|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산림생태학으로 석사 학위를, 산림환경정책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학교 산림환경정책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숲을 연구하다가 귀국, 2000년까지 서울대학교 임업 과학연구소 특별연구원으로 재직했다. 현재 숲연구소 이사장, 마인바움 대표이사로 있다. 저서로 『나는 매일 숲으로 출근한다』, 『나무와 숲』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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