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제3의 장경호 거사를 기다리며|대원 장경호 거사 50주기 추모

제2, 제3의 장경호 거사를

기다리며


정병조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전 금강대학교 총장


대원 장경호 거사가 남긴 향기로운 발자취

장경호 회장(1899~1975)은 현대 한국 불교에서 가장 주목받을 만한 위인이었다. 기업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남다른 불교적 신심을 실천에 옮긴 뛰어난 불자였다. 그는 1972년에 대원회를 설립했다. 불교 대중화, 불교의식 현대화, 대중을 위한 불교 교육 실시, 현대적 불교문화 등을 표방하면서 재가불교운동의 새 지평을 열었다. 일요법회를 대원정사에서 개설한 것도 처음이었고, 법당에 의자를 놓고 예불을 모시는 일도 그분의 아이디어였다. 자그마한 변화였지만 불자들의 신행 활동에는 큰 충격을 준 사건들이었다. 사실 음력 절후에만 익숙했던 당시 불자들에게 일요법회는 퍽 생소했고, 또 신발을 신은 채로 법당 출입을 해야 한다는 일이 영 불편하기도 했었다. 그 이후 대원회의 불교 강좌는 매주 화요일, 목요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주로 불경 해설, 불교문화, 불교 역사 등을 현대적 감각으로 진행했다. 나는 화요일, 고 목정배 교수는 목요일을 주로 담당했었다. 나는 아직도 그 당시 청중들의 진지하고 열정적인 호응을 잊을 수가 없다. 바꾸어 말하면 그만큼 불교 지식인들을 위한 전문 강좌가 없었다는 뜻도 된다. 당시 불교는 여전히 시대감각에 뒤떨어져 있었고, 많은 이들의 외면을 감수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대원불교대학이라는 2년제 교양대학으로 발전했고, 부산 등 지역으로 교세를 확장하기도 했다. 이를 시발로 해서 불광회, 구도회 등의 신행단체들이 생겨나서 가히 한국의 재가불교운동이 큰 호응을 얻게 된다. 대원회의 활동 이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재가운동은 엄청난 발전을 이룬다. 당시 전국의 2년제 불교교양대학은 약 200군데(사찰 포함)에 이른다.

또 하나 주목할 포교 전략은 전국의 읍면 단위 방문 포교를 시행한 점이다. 대도시에는 간혹 불교적 모임이 시행되었지만 군소도시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나는 해마다 여름철에는 그 포교단에 참여해 전국을 누볐었다. 또 1982년에 처음 간행한 『우리말 불교법요집』도 현대화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일이었다. 1974년에 법정 스님이 펴낸 『우리말 불교성전』 간행 이래 불공, 축원, 기도 등 중요한 불교 의례를 전부 한글 독송판으로 완성한 일 또한 장경호 회장의 원력이 이루어낸 아름다운 결실이었다. 나는 한 사람의 생각과 실천이 엄청난 파장과 새로운 흐름을 주도한다는 것을 이분 곁에서 느꼈고 배울 수 있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준 아름다운 보시

1975년 장경호 회장은 전 사재 30억 6,300만 원을 희사했다. 목표는 오직 하나, 불교 발전이 그분의 서원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곧 이 뜻을 받들어 대한불교진흥원을 만들었고, 이곳에서 대원 장경호의 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배려했다. 대한불교진흥원의 첫 번째 사업은 불교방송국 개국이었다. 이것은 현대 불교가 이룩한 가장 소중한 결실이었다. 대한불교진흥원의 전폭적인 지원과 조계종을 비롯한 천태종, 태고종 등 여러 불교 종파가 동참한 초유의 불교화합적 기념비였다. 지금도 불교방송은 전국적인 전파망과 해외에까지 활발하게 포교 활동을 하고 있다. 

장경호 회장의 전 재산 쾌척은 불교계는 물론 큰 사회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불교처럼 사회활동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던 종교가 진정한 의미의 보시를 완성했다는 면에서 온 국민들에게 감동과 경이로움을 안겼다. 

1,700여 년의 한국 불교 흐름 속에서 위대한 고승들과 선지식들은 끊임없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전 재산을 희사한 불자는 없었다. 더구나 장경호 회장의 보시는 어떠한 보상도 기대하지 않았던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였다. 그분은 생전에도 큰 부자이면서 지나칠 정도로 검소한 삶을 사셨던 분이다. 양복 안주머니에는 늘 누런 봉투를 지니셨는데, 그것은 길바닥에 떨어진 못이나 금속 조각들을 줍기 위한 용기(容器)였다. 회사 출퇴근 때도 번듯한 승용차 없이 버스와 도보로 출퇴근하신 분이다. 하도 주변 사람들이 권해서 마지막에 낡은 지프차를 마련하셨던 기억이 난다. 『대장부론』에서 말했던 명언이 생각나게 하는 분이었다. “부자이면서 교만하지 않는 것, 가난하지만 비굴하지 않는 것이 참 대장부이다.” 대원 장경호 거사를 가리키는 언사인 듯싶다. 장경호 거사의 등장은 한국의 기업과 국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그분은 불교의 보살정신을 온몸으로 실현한 이 시대의 진정한 선지식이었다. 또한 재가(在家)불자들의 지성화를 이룩해서 우리 불교의 밑거름이 된 자양분의 역할을 한 분이었다. 불교의 승가(僧伽)는 이 출가와 재가의 조화로운 역할 분담과 화합으로 발전할 수 있다. 특히 현대 사회 속에서 갈수록 종교의 영역이 축소되는 상황 속에서 더욱 장경호 회장의 향기가 보다 많은 이들의 호응과 관심을 얻어나가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미래 불교의 좌표를 제시한 혜안

장경호 거사의 불교 발전 원력은 구체적인 세 가지 방안으로 압축된다. 불교의 현대화, 생활화, 대중화는 그분이 입버릇처럼 내세운 불교 발전의 ‘화두’였다. 불교 현대화는 우선 경전의 한글화로 시작되어야 한다. 다행히 한글대장경이 완간되었지만, 여전히 의문부호는 남는다. 왜냐하면 한문 원문을 우리말로 번역했으니까, 이제는 그 내용이 제대로 읽히는 책을 만들어야 한다. 말 그대로 경전의 현대적 응용이 절실한 시점이다. 현대화의 다음 부분은 법회 형식과 내용의 변화이다. 기도 의례만으로 현대 불자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불교가 현실적으로 우리들에게 유익한 종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을 사회화(Socialization)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화의 본질은 인간화(Humanization)다. 중생 곁에 있는 불교, 중생을 지켜주는 불교, 중생의 아픔을 다독이는 불교로 거듭나야 한다. 이 현대화 과정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불교의 상업화, 세속화 경향이다. 미래 불교의 성패는 이 현대화의 완수에 있다고 본다.

그다음으로 장경호 거사가 강조했던 점은 불교의 생활화다. 한국의 불자들은 대부분 이중적인 신행 구조를 갖고 있다. 절에서만 불자이고 문밖을 나서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오계는 스님들만 지니는 것이고 나와는 무관하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삼귀오계(三歸五戒)는 부처님 당시부터 2,600년을 지켜온 불자들의 신행서원이었다. 머리만 불자여서도 안 되고 가슴으로만 불교가 고마운 불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머리와 마음과 행동이 온전히 불교적으로 순화되고, 불교적 삶을 살 수 있어야 불교 생활화는 이루어진다. 불교 공부의 단계를 문사수(聞思修)로 열거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우선 불교를 많이 배워야 한다. 듣고 읽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다음으로 깊이 생각해야 한다. 내가 배운 불교, 내가 아는 불교는 나의 생각을 거쳐서 내 것이 될 수 있다. 그다음은 수행이다. 열심히 배우고 생각한 것을 실천해야만 불교는 온전히 나와 한 몸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분이 강조했던 것은 불교 대중화였다. 앞서 언급했던 소규모의 농어촌 지역에 불교를 전파하려는 노력이 그 표본이다. 대중에게 어필하려면 우선 ‘쉬워야’ 한다. 어렵고 복잡한 불교 해설로는 결코 대중들을 조복(調伏)받을 수 없다. 동시에 불교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막연한 기복적 행태를 없애주어야 한다. 불교 믿어 복 받는 일은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단지 남이야 어찌 되든 나 혼자 잘 먹고 잘살려는 이기심은 극복해야 한다. 또 우리의 행복에 대한 환상이 반드시 물질적 완성에 있지 않다는 것도 일깨워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불자들의 의식 전환, 신행의 질적(質的) 고양이 이루어질 수 있다.

현재 대한불교진흥원에서는 이 장경호 거사의 세 가지 서원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장학사업, 학술사업, 문화사업(콘텐츠 개발)으로 대변될 수 있다. 장학사업은 물론이고 대원상이라는 상도 무게 있는 불교계의 큰 상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토인비의 지적대로 21세기는 종교의 세속화, 종교에 대한 일반적 무관심 때문에 종교적 질서가 크게 위축될 것이라고 조망한 바 있다. 한국을 이끄는 3대 메이저 종교는 불교, 개신교, 가톨릭이다. 이들의 선의적 경쟁과 각 종교의 아이덴티티 확립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불교의 가치는 수행에 있고, 가장 미약한 부분은 사회참여의 측면이다. 대한불교진흥원의 올바른 방향 정립이 곧 제2, 제3의 장경호 거사를 탄생시키는 모티프라고 생각한다.  



정병조|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졸업 및 영남대 대학원 석사, 동국대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도 네루(Nuhru)대 교수 및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교수, (사)한국불교연구원 이사장 겸 원장, 동국대 부총장, 금강대 총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동국대 명예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인도철학사상사』, 『불교문화사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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