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스님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한국 불교사상 출가 수행에 있어서 발심수행을 직접적으로 권고하는 글은 현존 문헌 가운데 원효대사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이 최초이다. 원효대사의 『발심수행장』은 출가수도를 근본으로 하며 최소한의 검소한 생활이 진정한 발심과 수도라 보고 시간을 아껴 젊은 시절에 마음을 내어 부지런히 수행함을 권고한 글이다.
모든 부처님이 적멸궁(寂滅宮)을 장엄하신 것은 오랜 겁 동안에 욕심을 끊고 고행하신 까닭이요, 중생들이 불타는 집에서 끝없이 윤회하는 것은 끝없는 세상에서 탐욕을 버리지 못한 까닭이다. 막는 이가 없는데도 천당에 가는 이가 적은 것은 삼독의 번뇌로 자기의 재물을 삼기 때문이요, 유혹이 없는 악도에 들어가는 이가 많은 것은 사대(四大)와 오욕(五欲)으로 망녕되게 마음의 보배를 삼은 까닭이다.
사람이 어느 누가 산에 들어가 도를 닦으려 하지 않으리오마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애욕에 얽매인 탓이다. 비록 산에 들어가서 마음을 닦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능력에 따라 착한 일을 버리지 말라. 자기의 욕락을 버리면 성인처럼 믿고 존경할 것이요, 하기 어려운 수행을 능히 행하면 부처님과 같이 존중히 여길 것이다. 재물을 아끼고 탐하는 것은 악마의 권속이요,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시하는 것은 부처님의 제자이다.
높은 산 험한 바위는 지혜 있는 사람이 살 곳이요, 푸른 소나무가 우거진 깊은 골짜기는 수행하는 이가 거처할 곳이다. 배고프면 나무 열매를 씹어 주린 창자를 위로하고, 목마르면 흐르는 물을 마셔 그 갈증을 식힌다. 좋은 음식을 먹이고 사랑하여 기르더라도 이 몸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고, 비단옷을 입혀 보호하더라도, 목숨은 반드시 마칠 것이다.
메아리 울리는 바위굴로 염불당을 삼고, 슬피 우는 오리로 뜻을 알아주는 벗을 삼아라. 절하는 무릎이 얼음과 같더라도 불 생각을 하지 말고, 주린 창자가 끊어지는 것과 같더라도 먹을 것을 찾지 말라. 백 년이 잠깐인데 어찌 배우지 아니하며 일생이 얼마나 되길래 수행하지 않고 졸기만 할 것인가.
마음속에 애욕을 여윈 이를 사문이라 하고, 세속을 연모하지 않는 것을 출가라 한다. 수행자가 비단옷을 입은 것은 개가 코끼리 가죽을 쓴 것과 같고, 도를 닦는 사람이 애정을 품는 것은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들어간 것과 같다. 비록 재주가 있더라도 속세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부처님이 이 사람에게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내시고, 설사 도행(道行)이 없더라도 산중에 사는 사람에게는 성현들이 이 사람에게 기쁜 마음을 낸다. 비록 재주와 학문이 있더라도 계행이 없으면 보배가 있는 곳에 가려고 하면서 떠나지 않는 것과 같고, 비록 부지런하지만 지혜가 없는 이는 동쪽으로 가고자 하나 서쪽을 향하는 것과 같다.
지혜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은 쌀로 밥을 짓는 것이요,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짓은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다. 모든 사람이 밥을 먹어 그 배고픈 창자를 위로할 줄은 알면서도 불법을 배워 어리석은 마음을 고칠 줄은 모르는구나. 계행과 지혜를 구비하는 것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자리와 이타는 새의 두 날개와 같다.
죽을 받고 축원하면서도 그 뜻을 알지 못하면 시주에 대하여 수치한 일이며, 밥을 얻고 심경을 외울 적에 그 이치를 알지 못한다면 또한 불보살께 부끄럽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꼬리 달린 굼뱅이가 더럽고 깨끗한 것을 가리지 못한다고 미워하듯이, 성현께서도 사문들이 깨끗하고 더러움을 판단하지 못한다고 걱정하는 것이다. 세간의 시끄러움을 버리고 천상으로 올라가는데는 계행이 사다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파계하고 남의 복전(福田)이 되려는 것은 마치 날개 부러진 새가 거북이를 등에 태우고 허공을 날으려는 것과도 같다. 자기 죄를 벗지 못하고서 어떻게 남의 죄를 풀어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계행을 지키지 못하고는 다른 사람의 공양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계형이 없는 헛된 몸은 아무리 길러도 이익이 없고, 덧없는 목숨은 사랑하여 아끼더라도 보전하지 못한다. 용상대덕(龍象大德)이 되기 위하여는 끝없는 고통을 능히 참아야 하고, 사자좌에 앉으려면 세상의 향락을 영원히 버려야 한다. 수행하는 이의 마음이 깨끗하면 모든 하늘 사람들도 다 같이 찬탄하고, 도를 닦는 사람으로서 여색을 생각하면 착한 신장들도 버리고 떠나버린다.
사대(四大)는 곧 흩어지는 것이므로 오래 살기를 바랄 수 없다. 오늘은 벌써 저녁이므로 아침부터 서둘러야 할 것이다. 세상의 향락 뒤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르거늘 무엇을 탐내며, 한번 참으면 길이길이 즐거움이거늘 어찌 도를 닦지 않을 것인가. 수도하는 사람이 탐욕을 내는 것은 수행하는 이의 수치요, 출가한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은 군자의 웃음거리이다. 할 말은 끝이 없거니와 왜 그리 탐착하고, 애욕을 끊지 아니하며, 닦아야 할 수행이 끝이 없는데 세상 일을 버리지 못하며, 번뇌가 끝없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을 끊을 마음은 일으키지 아니하는구나.
오늘이 끝이 없건만 나쁜 짓은 날마다 많아지고, 내일이 끝이 없지만 착한 일은 날마다 줄어들며, 금년이 다하지 않았건만 한없이 번뇌를 일으키며 내년은 끝이 없거늘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는구나. 시간이 흘러 어느덧 하루가 지나가고 하루하루가 흘러서 어느덧 한 달이 되며, 한 달 한 달이 지나서 어느덧 한 해가 되고, 한 해 한 해가 바뀌어서 잠깐 사이에 죽음의 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부서진 수레는 가지 못하고 늙은 사람은 수행할 수 없으니, 누워서 게으름만 피우고 앉으면 생각이 어지러워진다. 몇 생애를 닦지 않고 지냈는데 헛되이 세월만 보내겠으며 헛된 몸을 얼마나 살리려고 일생을 닦지 않겠는가. 이 몸은 반드시 죽고야 말 것인데 죽어서 다시 받는 몸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어찌 급하고 또 급하지 않겠는가.
* 이 글은 『통일불교성전』(대한불교진흥원 통일불교성전편찬위원회 편찬, 대한불교진흥원 刊, 1992년) 제10장 「수행신심부」 중에서 발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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