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의 원리 - 사띠 수행으로 가는 길|재가자의 바라밀다

명상의 원리
- 사띠 수행으로 가는 길

남시중
미국 변호사


명상은 왜 필요한가?
인간의 뇌는 외관상 아무런 과제를 수행하지 않을 때 실질적으로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이는 뇌과학에서 ‘기본 설정(Default Mode Network)’이라 부르는 기능적 회로의 과잉 활성화에 기인한다.

‘기본 설정’ 상태에서 뇌는 과거의 상처를 반추하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시뮬레이션하며, 자아 중심의 서사를 반복해 불안을 생성한다. 진화 과정에서 형성된 위험 감지 장치지만, 현대에선 오히려 불안과 스트레스, 심리적 고통의 주된 원인이다. 붓다가 말한 고(苦)의 ‘조건적 작동 방식(알고리즘)’이라 할 수 있다.

‘기본 설정’에서는 이른바 ‘잡생각(mind wandering)’이 끊임없이 흐르며, 지속적 긴장이 뒤따른다. 극도의 경계 태세가 뇌의 기본값인 셈이다. 이 과도한 활성화를 누그러뜨리고,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을 중심으로 한 이성적 조절을 회복하는 것이 바른 명상의 목표이자 원리다.

성공적인 명상은 뇌가 에너지 소비를 줄이며 자연스럽게 명상 모드로 이행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참선이 하고 싶어져야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라는 승가의 말은 신경과학적으로도 타당하다. 이 점에서 불교 명상은 가장 과학적이며 통합적인 신경심리학적 방법이다.

불교에서 명상의 핵심이란 무엇인가?
각 문화권에서 불교 수행은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했고, 때로는 몰입과 인지 작용의 중단을 추구하는 요가 명상과 혼합되기도 했다. 한 가지 분명한 기준이 있다면—‘사띠(sati, 마음챙김, 알아차림)’ 없는 명상은 불교 고유의 수행이라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오늘날 ‘마음챙김’은 사띠의 우리말 번역으로 널리 쓰이며, 표현도 아름답지만, 최근 미국에서 개발된 ‘심리치료 명상’의 의미로 오해되기 쉽다. 팔리어 ‘sati’는 영어 ‘mindfulness’로 번역되어 MBSR과 같은 스트레스 완화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에서 대중화되었고, 이후 ‘마음챙김 명상’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국에 역수입되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사띠를 오래전부터 ‘수의(守意)’, ‘념(念)’, 또는 ‘정념(正念, sammā-sati)’이라 불러왔다.

사띠는 붓다가 팔정도에서 제시한 수행의 핵심이자 실천의 토대다. 만약 ‘불교 명상’을 정의한다면, 그것은 사띠와 사띠에 기반한 ‘불법을 보는 통찰,’ 즉 ‘위빠사나(vipassanā)’이어야 하며, 몰입·이완·신비 체험을 추구하는 요가 계열 명상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어야 한다.

사띠는 명상인가, 아니면 수행 그 자체인가?
사띠는 불교에서 일관되게 강조된 핵심 수행으로, 몸과 마음, 외부 현상을 한 걸음 물러나 판단 없이 지켜보는 메타인지적 관찰, 즉 ‘봄’ 혹은 ‘깨어 있음’이다. 이러한 현상학적 관찰은 자연스럽게 적절한 몰입과 심리적 안정으로 이어지며, 수행자는 궁극적으로 ‘여실지견(如實知見)’의 ‘통찰(위빠사나)’에 이른다. 따라서 사띠는 명상이라 할 수 있지만, 명상이 사띠는 아니다.

불교 수행은 불법을 배우고 익히며, 계율·보시·사띠·위빠사나에 이르기까지 삶 전체를 전환하는 통합적 실천 체계다. 이 가운데 사띠는 지금 이 순간의 몸·감정·생각을 비추는 자각의 힘이며, 위빠사나는 그 자각을 통해 일어나는 인식의 전환이다.

사띠가 지속되면 우리는 경험을 자동 반응이 아닌 새로운 시각으로 관찰하게 되고, 그로부터 통찰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사띠와 위빠사나는 특정 명상 테크닉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드러나는 정신 작용이며 인식 구조의 점진적 변형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사띠는 붓다가 직접 가르친 수행 방식인가?
그렇다. 팔리어 경전에는 ‘사띠’가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그중에서도 붓다가 사띠를 하나의 수행법으로 가장 정교하게 설한 대표 경전이 『사념처경(四念處經, Satipaṭṭhāna Sutta)』(MN 10 / DN 22)이다. 이 경전에서 붓다는 관찰 대상을 네 가지로 나누어 이른바 ‘사념처 수행’을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 ‘몸에 대한 관찰(身念處, kāyānupassanā)’은 호흡, 걸음걸이, 자세, 장기 반응, 위장 활동 등 신체의 생물학적 작동을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이다.

둘째, ‘느낌에 대한 관찰(受念處, vedanānupassanā)’은 모든 감각이 수반하는 쾌·불쾌·중립의 자동 반응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여기서 사띠는 반응을 억제하지 않고, 지켜만 봄으로써 반응과 반응 사이의 틈을 만들고, 조건반사적 반응 대신 이성적 선택이 가능하게 한다.

셋째, ‘마음에 대한 관찰(心念處, cittānupassanā)’은 현재의 감정, 욕망, 사고의 방향성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이 과정에서 전전두엽 기반의 고차원적 ‘자기 인식(self-monitoring)’ 기능이 강화된다.

넷째, ‘법에 대한 관찰(法念處, dhammānupassanā)’은 우리의 경험을 구성하는 조건들과 인과 구조 전체를 통찰하는 것으로, 붓다가 연기법으로 설한 바로 그것이다.

법념처에 이르면, 수행자는 감정의 발생 구조, 기억의 작동 방식, 자아 형성의 인식 알고리즘을 모두 통찰하게 된다. 단순한 관찰자를 넘어 자신의 인식 구조를 조정하고 행동을 주도하는 개입자로 전환해, 대승불교의 이상인 ‘보살행(菩薩行)’의 출발점에 서게 된다[남방 불교에서 흔히 ‘위빠사나 명상’이라 부르는 다양한 수행 테크닉은 모두 이 ‘사념처(satipaṭṭhāna)’를 기반으로 한다].

사띠의 수행 원리는 왜 선정이나 좌선과 다른가?
‘선정(禪定, jhāna)’은 붓다 이전부터 인도 요가 전통에서 수행되던 몰입 명상이다. ‘좌선(坐禪)’은 문자 그대로 ‘앉아서 하는 선(禪)’을 뜻하지만, 선불교 전통에서는 몰입, 참구, 화두 수행 등을 포괄하는 전업 수행자 중심의 훈련 체계를 의미한다.

초기 불교 내부에도 선정을 외도의 명상으로 배제하려는 흐름과, 이를 불교화하려는 시도 사이에 긴장이 있었다. 결국 ‘선정’은 요가 명상을 불교 수행 체계로 재구성한 개념이다.

반면 사띠는 스승과 제자 간 훈련이나 성취 검증이 어려운 특성이 있다. 수행 단계를 보다 명확히 규정할 수 있는 선정이 승가의 훈련 방식으로 자리 잡은 배경이다. 이로 인해 출가자 수행 지침서들은 대개 선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선정이나 좌선 없이도 사띠는 실천될 수 있는가?
선정이나 명상 기법을 사띠와 혼동하는 것은 불교 수행 이해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오류다. 선정이나 특정한 명상법이 사띠 수행의 일부가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사띠는 아니다.

사띠는 언제 어디서든, 내면의 ‘자세’만으로 실천할 수 있는 생활 명상이며, 삶 전체와 함께하는 ‘깨어 있음’ 그 자체다. 밥을 먹을 땐 씹고 삼키는 감각을, 손을 씻을 땐 물의 촉감을 지켜보며, 뇌가 ‘기본 설정’으로 회귀하지 않도록 하는 일상적 주의가 그 출발점이다. 재가자가 일상 속에서 중단 없이 실천할 수 있는 수행이다.

이처럼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감각 관찰의 사띠에서 출발해, 점차 감정과 사고의 패턴을 관찰·탐지하고, 궁극적으로 그것들을 자유롭게 조정해나가는 통찰의 작용—곧 위빠사나—에 이르는 것이 불교 수행의 길이다.

수행은 삶과 분리된 특별한 행위가 아니라, 삶 그 자체여야 한다.


• 11월호에 <수행의 원리-위빠사나로 가는 길>이 2부작으로 이어집니다.


남시중|시카고에 거주하며 성균관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저널리즘 석사(MSJ)를, 캘리포니아주립대에서 법학 박사(JD) 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개를 위한 변명-보신탕과 동물 권리론에 대한 철학적 성찰』, 『벤처@실리콘 밸리』, 『Why Meditat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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