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만한 시대,
마음을 붙잡는 법
문진건
동방문화대학원대 불교문예학과 교수

잠시라도 세상을 ‘끄고’ 자신에게 집중하려는 마음 필요
요즘 사람들은 쉽게 산만해진다. 우리 주변에는 계속해서 자극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언제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먼 산과 지는 해를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눈이 쌓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고요한 밤을 보낸 적은 언제였던가? 이제는 이렇게 고요한 시간을 갖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잠깐이라도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하면, 곧 휴대전화 알림이 울린다. 휴대전화를 열어 잠깐만 보려 했는데, 어느새 10분, 20분이 훌쩍 지나간다. 하루 종일 우리는 이곳저곳으로 마음이 옮겨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전자 통신 기술이 발달하면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만큼 주변에서 끊임없이 자극이 오기 때문에 한 가지 일에 오래 집중하기가 어렵다. 이렇게 산만해진 마음은 다시 집중하려고 해도 쉽지 않다. 식당에 앉아 있으면 TV에 눈이 가고, 옆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리면 자신이 하던 대화는 잊어버린 채 귀를 기울이게 된다. 스마트폰, 컴퓨터, TV는 어디서나 우리를 자극한다. 이런 환경에서는 한 가지에 오래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요즘은 잠시라도 세상을 ‘끄고’ 자신에게 집중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멀티태스킹은 여러 개의 일 사이를 오가며
오히려 집중력을 반복적으로 방해하는 것
이런 세상에 살다 보니 본의 아니게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멀티태스킹이 늘어나게 된다.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을 ‘멀티태스킹(Multitasking)’이라고 부르는데, 현대 사회는 멀티태스킹이 필수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한때는 멀티태스킹이 능력처럼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특히 20세기 후반에는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잘하는 사람이 능력자라고 칭찬받았다. 회의 중에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고, 학생은 공부하면서 라디오를 듣고, 어른들은 요리하면서 드라마를 보고 전화를 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스스로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 인지심리학의 연구들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사람의 뇌는 사실 한 번에 한 가지 일밖에 할 수 없다고 한다.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게 아니라, 의식이 바쁘게 이 일, 저 일을 왔다가 갔다가 하는 것뿐이다. 우리가 자신에게 뭐라고 말하든, ‘어떤 순간에든 집중할 수 있는 정보는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능숙하게 해내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매우 비효율적으로 여러 개의 일 사이를 오가며 집중력을 반복적으로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집중력이 자주 깨지고, 효율도 떨어진다. 과학자들이 실험을 해보니 수업 중 휴대폰 벨소리에 방해를 받은 학생들은 그렇지 않은 학생들보다 퀴즈 점수가 낮았다.
현대인의 업무 환경이 급속히 변하면서 더욱 산만해지고 있다고 경고하는 라스무스 호가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멀티태스킹을 하는 업무 현장에 대해 조사한 연구가들은 새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멀티태스킹을 하는 사람들이 무의미한 것들을 다루는 데 선수들이고, 또 어느 것에나 무방비로 자극을 받아 산만해진다는 것이다. 어쩌면 당신도 의도가 뚜렷하고 단순한 일인데도, 그 일을 수행하는 길에서 벗어난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멀티태스킹처럼 산만하게 마음을 쓰는 것을 경계한다. 부처님은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그것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고, 좋은 행동을 하고, 결국에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산만한 마음은 좋은 행동(善行)을 방해하고,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산란한 마음을 알아차릴 때마다 스스로 돌아보고,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연습 필요
산만한 마음을 불교에서는 심란(心亂) 또는 산란(散亂, Vikshepa)이라고 부르는데, 집중을 방해하는 번뇌의 하나다. 마음이 산만하면 마음이 인식하는 대상을 바로 보지 못한다. 바로 보지 못한다는 말은 마음이 이미 욕심이나 충동, 선입견과 들뜸 등에 휩쓸려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경전(『성유식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산란이라는 마음 활동은 조급하고 어지러운 것을 말한다. 함께 일어나는 법(dharma)이 모두 방탕하게 흐르게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산란한 마음으로 인식되는 것은 진실로 보이지 않고, 산란에 빠진 사람은 욕망에 휩쓸려 경솔하고 나태해 선행에 등을 돌리게 된다는 뜻이다. 심지어 산란한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마음이 불안하고 우울해질 수 있다. 그래서 산란한 마음을 알아차릴 때마다 스스로 돌아보고,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연습이 필요하다.
명상을 통해 더 깊은 질문 던지고 답 찾으며 마음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야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기 위해 호흡이나 부처님과 같은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거나 자애와 연민 같은 선한 마음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단순히 산란한 마음을 억누르고 더 집중하려고 애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마음을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는 산만한 이유를 외부에서 찾기 쉽다. ‘휴대전화 때문이다’, ‘시끄러운 환경 때문이다’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외부의 자극은 그저 거기 있을 뿐이다. 소음은 그냥 소음일 뿐이고, 풍경은 그냥 풍경일 뿐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있다.
외부의 자극은 어디에 가더라도 있다. 동굴에 들어가 혼자 지내도, 그곳에도 다른 방해 요소가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방해꾼을 없애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이야기에서,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귀향하던 오디세우스는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뱃사람들을 유혹해 암초로 이끄는 바다의 요괴, 사이렌을 만난다. 그는 사이렌의 노래에 홀리지 않기 위해 부하들의 귀를 막게 하고, 자신은 돛대에 몸을 묶어 유혹을 견뎌낸다. 우리 역시 외부의 자극이라는 유혹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마음을 단단히 붙잡아두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외부의 자극은 사이렌의 노래처럼 우리를 길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불교에서는 들뜬 마음을 ‘원숭이 마음’이라고 부르는데, 늘 뛰어다니며 가만히 있지 못하는 원숭이에 비유한 것이다. 방황하는 마음을 묶고 길들이고 순하게 만드는 것이 불교 수행의 초기 단계인데, 처음부터 방만한 상태에서 집중과 평온을 유지할 수가 없으므로 산란심을 서서히 다른 마음 작용으로 대치하는 것이 필요하다. 방황하는 마음을 일단 규율이라는 돛대에 묶어둘 필요가 있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길들여서 삼매를 얻는 것을 중요한 수행으로 본다. 하지만 처음부터 집중을 유지할 수는 없다. 규칙과 연습을 통해 서서히 산란한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먼저 방해 요소를 가능한 한 줄이면 더 수월하게 수행할 수 있다. 휴대전화를 꺼놓는 시간을 정해놓거나 불필요한 앱을 끄는 것이 중요하다. 사무실이 사람들이 방해하기 쉬운 곳이라면, 가끔은 책상에서 벗어나 도서관에 가는 것은 어떨까? 가능하다면 한 가지 일만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다음으로는 산만한 마음을 용쓰며 다스리는 것보다 왜 내 마음이 산만한지 그 이유를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명상하면서 자신에게 왜 마음이 산만한지 묻고, 마음의 답변을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명상이 단지 마음을 맑게 하고 진정시키는 것이거나 운동처럼 자기 계발의 하나로 여기기 쉽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명상을 통해 더 깊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불안하게 만드는가?”
“나는 왜 이렇게 방황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피하지 않고, 한 겹씩 마음을 벗겨가다 보면 마침내 마음의 본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문진건|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통합심리대 철학 및 종교연구소에서 석사와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불교대학원 명상심리상담학과 책임교수를 거쳐 현재는 동방문화대학원대 불교문예학과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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