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매체 포교로
불교 대중화를 이루다
김형균
도서출판 동쪽나라 대표

어떻게 회향할 것인가
20세기 한국 불교 포교사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재가불자로는 대원 장경호 거사가 손꼽힌다. 그는 동국제강의 창업주이자 훌륭한 기업가였으며 대중불교운동의 단초를 마련한 선각자였다. 한평생 묵묵히 수행하며 ‘유마(維摩) 거사’로 불린 그는 세심하고 자비로운 실천으로 불교 대중화의 굳건한 토대를 마련했다. 비록 사업가로 누구보다 바쁘게 살았으나, 그는 평생 일과 수행을 병행하며 부처님같이 살다간 사람이었다. 예순을 넘기자 자식들에게 사업을 맡기고 불교 대중화 운동을 서둘렀던 이유도 오직 서원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를 만난 이들은 한결같이 ‘세속의 옷을 입었을 뿐, 말과 행동은 수행자와 다름없다’고 회상한다.
사업 일선에서 물러난 장경호 거사는 부산 금정산 무위암에서 안거했고, 평소에도 매일 아침 두 시간씩 정진했다. 그 무렵 성수 스님을 찾아가 불교 발전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자, 스님은 주저 없이 이렇게 조언했다.
“옛날에는 눈 밝은 도인이 후학을 지도했으나 지금은 도인이 드문 시대입니다. 종합수도원을 지어 참된 지도자를 길러내십시오.”
이 땅에 불교 중흥을 위해 회향을 고민했던 거사는 곧바로 일을 추진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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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판 1965년, 대원 장경호 거사는 대중 불교 운동의 첫걸음으로 조계사 앞에 불서보급사를 세웠으며, 처음 간행한 책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이었다. |
대중 불교 운동의 시작, 불서보급사를 세우다
장경호 거사는 종교의 본질적 역할이 올바른 진리관을 열어주는 데 있다고 확신했다. 1967년 그 신념을 바탕으로 불서보급사를 설립했다. 산중에 머물던 한국 불교가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길은 경전을 널리 전해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우는 데 있다고 보았다. 특히 선어록 속에 잠들어 있던 부처님의 지혜와 안목을 한글로 쉽게 풀어내 대중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동국역경원장이었던 운허 스님을 찾아가 경전 번역뿐 아니라 불교 의식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불공이나 예불을 올릴 때 의식을 모국어로 진행해야 신앙이 맹목에서 벗어나 바른 이해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대중 불교 운동의 출발점이 된 불서보급사에서 처음 펴낸 책은 해안 선사의 『금강반야바라밀경』이었다.
불교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1970년 2월 장학재단을 결성하고, 뜻을 같이하는 교계 인사들과 함께 신행단체인 대원회를 조직했다. 1972년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한국 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안’을 주제로 한 정기 좌담회를 열었다. 선지식과 학자, 법사와 문인들이 모여 불교 중흥을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안을 모색했다. 그 논의 속에는 현대적 포교 수단을 개발하자(불교방송 개국, 출판사·잡지사 설립 등), 대중 불교 교육 제도를 만들자, 불교 각종 의식을 한글로 대중화하자, 시민을 위한 수행 선방을 만들자, 집집마다 부처님을 모시고 기도를 생활화하자 등이 포함되었다. 대원 거사의 노트에는 당시 논의된 내용들이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시대를 앞서간 사람
대원 거사의 발걸음은 늘 시대를 몇 걸음 앞서 있었다. 불서가 전문 출판사에만 의존하고, 어려운 한자로 되어 있어 일부 사람들에게만 읽히던 시절에 그는 직접 출판사를 설립해 대중에게 불법을 전하고자 했다. 불교 대중화 운동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먼저 깨달았던 그는 대원불교대학을 세워 저명한 불교 학자들을 초청해 대중 강연으로 문을 열었다. 이어 시민선방을 개설해 불자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수행의 장을 제공했다. 그 터전은 1970년대 남산 대원정사에서 굳건히 뿌리를 내렸다.
불교 포교를 위해 창립한 대원회와 문서 포교를 위한 출판사 설립은 불교 대중화의 새로운 줄기를 세우는 전환점이 되었다. 대원 거사가 구상했던 출판과 잡지 사업은 1980년대에 이르러 그의 아들 장상문 거사에 의해 꽃을 피웠다. 대한불교진흥원을 통해 우리말로 된 불교 의식집과 문서 포교의 일환으로 불교 경전을 간행·보급했고, 불자들의 교육장인 다보사와 다보수련원 운영, 대중불교결사 전국대회, 청정운동, 전국순회법회 등 재가불교운동을 확산시켰다.
또한 1990년, 마침내 대원 장경호 거사의 오랜 염원인 불교방송국이 개국의 결실을 맺었다.
방송 포교, 세상에 부처님의 음성을 전하다
BBS불교방송 개국은 한국 불교사에 길이 남을 대작 불사로 기록되었다. 대원 장경호 거사는 일찍이 불교 포교에서 현대적 매체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했다. 그가 떠난 지 꼭 15년 만의 성과로 한국 불교 중흥의 결정적 계기가 된 셈이다. 부처님의 참된 말씀으로 온 겨레를 하나로 묶고, 함께 나누는 기쁨을 전하는 소중한 매체가 되었다. 대한불교진흥원이 주도한 가장 커다란 사업이었으며 대원 장경호 거사의 비원이 고스란히 담긴 불사였다. 그는 불교가 대중 속으로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언론·방송을 통한 생활 속 포교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다. 특히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가정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주목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 국민에게 일상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 불교방송국 설립을 구상하고 추진했다.
‘라디오에서 목탁 소리가 나오고, 스님들의 법문을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방송국을 세워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던 장경호 거사는 대원정사를 지을 때부터 방송국 용도로 설계했다. 방송 관계자들에게 자문을 구하며, 천장을 높이고 벽에 방음 시설을 설치하는 등 방송 환경에 적합하도록 건물을 시공했다. 공사 과정에서는 여러 차례 수정하며 직접 현장에 나와 공정을 지휘했다. 기자재를 도입하고 설립 허가를 받기 위한 신청서도 관계 기관에 제출하는 등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비록 생전에는 방송국 개국이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장상문 거사의 노력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는 한국 불교 포교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BBS불교방송은 개국과 동시에 예불, 법문, 불교음악, 명상, 불교문화 등 폭넓은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신행과 교육을 수행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지역과 세대를 아우르는 생활 속 불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BBS불교방송을 통한 포교는 장경호 거사가 추구했던 대중과 함께하는 ‘세상을 위한 불교’의 비전을 구체적으로 실현했다. 이러한 결실은 그의 원력과 선견지명이 시대를 앞섰음을 증명하는 상징적인 업적으로 기록되었다.
유마 거사의 환생을 기다리는 마음
대원 장경호 거사가 생전에 세운 이상과 실천은 오늘날 대한불교진흥원의 주요 사업과 지원 활동으로 계승되고 있다. 불교 중흥을 위한 그의 헌신은 입적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곳곳에서 활짝 피어나 한국 불교 발전의 큰 산맥을 이루고 있다.
그가 품었던 구상과 계획들은 비록 10여 년의 시차를 두었으나 차례로 현실이 되었으며, 오늘날에는 더욱 크게 확산되고 열매를 맺고 있다. 시대를 선도한 혜안, 그리고 구도자와 같이 철저하고 진실한 실천으로 살아간 그는, 분명 한국 불교사에서 손꼽히는 선각자이자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다.
거사의 환생을 기다리는 마음 절실하다.
김형균|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했다. 『불교신문』 기자를 시작으로 불교 언론과 인연을 맺고, 월간 『법륜』, 월간 『대중 불교』 , 월간 『금강』 편집장과 월간 『굴렁쇠 어린이』 발행인을 역임했다. 현재는 도서출판 불지사, 동쪽나라 대표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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