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삶은
감성 계산법을 따른다
남효창
(사)숲연구소 이사장

아침의 상쾌한 숲은 마음을 자극하고, 감성이란 이름으로 온몸에서 세포의 꿈틀거림을 느낀다. 태양이 대지와 나무를 점화시키듯 마침내 내 육신도 발화된다. 나는 왜 숲에 사는 모든 생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일까. 삶이 자꾸만 무거워지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규정된 사회적 관계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일까. 나무처럼 살 수는 없지만, 소박하고 단순한 나무의 생활을 내 삶으로 전이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규정된 인공 숲과 마주하다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진, 태풍, 지구온난화 그리고 질병 등은 단순한 단어 나열에 불과할 만큼 익숙해져 더 이상 그 의미의 심각성을 일깨우기가 쉽지 않다. 물론 이러한 혼란스러운 기후나 지각운동 그리고 미생물에 의한 전염성 질병들은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구에 생명체가 살기 시작한 그 이전부터 일어나고 있었던 일이다. 지구란 생태계에서 발생하는 각종 혼란스러운 현상들은 본래 자연의 속성 아닌가. 인공 숲을 지향하는 인류에 의해 변덕스러운 자연의 속성이 좀 더 무섭게 돌진하고 가속화되고 있을 뿐. 온화한 날씨와 예측 가능한 기후변화 그리고 온순한 지각운동을 바라는 것은 인류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나무는 어떻게 이 변덕스럽고 혼란스러운 자연환경을 4억 5,000만 년이란 세월 동안 극복해온 것일까.
한 톨의 열매는 거친 세상과 맞서야 한다. 그것도 열매 안에 있는 작은 씨앗으로 말이다. 씨앗을 감싸고 있는 당도가 높은 과육은 부모가 자신의 자식을 잘 보살펴달라고 새들을 위해 준비해놓은 보시용이다. 그렇게 해서 땅에 떨어지는 씨앗은 대부분 자신이 원하지 않는, 아니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곳이 아닌 곳에 착륙하게 된다. 씨앗은 부모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는 도시락 격인 떡잎 한 장 또는 두 장으로 험난하고 거친 세상과 마주해야 한다. 기후는 늘 그렇듯이 비옥한 토양을 척박하게 만드는 속성이 있지만, 나무는 척박한 곳을 비옥하게 만들겠다는 의지의 생물이다. 나무는 기후의 의도에 저항하며, 숲을 일군다. 그렇게 만들어진 숲은 다른 어떤 생태계보다도 안정적이고 온화하다. 이러한 숲을 일구기 위해 나무가 구사하는 전략은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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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과 밭은 제초제와 살충제가 필요한 반면, 자연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뒤편 숲은 그러한 것들이 불필요하다. 그럼에도 더 건강하고 안정적이다. |
나무는 자신이 보기에 미생물보다도 작고, 귀찮은 존재로만 보일 수 있는 개미 한 마리도 정성을 다해 돌본다. 나무에게서 은덕을 입은 개미는 숲 속의 온갖 사체들을 청소하고 토양을 기름지게 한다. 건강한 열매를 맺기 위해 나무는 정성껏 꽃을 피운다. 물론 자신의 후손을 생산하기 위한 수단이지만, 꽃이 갖고 있는 포도당과 향기와 빛깔은 나비와 같은 곤충을 위한 것이다. 나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나비나 벌들과 관계를 맺고 나면, 많은 새들을 불러 모은다. 새들은 아기를 낳고 양육할 수 있는 나무를 고르고, 마침내 꽃이 지고 열매가 맺히면, 새들은 나무의 열매를 먼 곳으로 출가시킨다. 자식을 출가시키는 방법은 꼭 새들을 통해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땅의 기울기를 측정해서 가능한 한 먼 곳으로 가장 잘 이동하기 위해 자신의 자손을 가급적이면 무겁고 둥글게 생산하는 밤알이나 도토리처럼 땅의 기울기를 측정하는 수학의 귀재인 나무들이 있는가 하면, 풍향과 바람의 세기를 계산해서 자신의 자식을 멀리 이동시키는 가죽나무, 물푸레나무, 단풍나무 등이 물리학의 뛰어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한다. 새들이 날고, 네 발 동물들이 거친 숨을 내쉬며 달리고, 다시 그들로 인해 나무는 자손의 진로를 찾아낸다.
거칠고 야속하기만 했던 기후를 나무는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생물들과의 정성스러운 관계로 온화한 기후로 변환시켰다. 마침내 인간이 만든 숲이 아닌, 나무가 만든 숲의 탄생이다. 나무가 만든 숲은 아주 정교하고 복잡한 관계의 그물망이다. 관계의 숲에는 어느 한 생물도 고립이란 의미를 알지 못한다. 관계의 숲에는 어느 한 종도 점령군으로 군림하지 못한다. 모두 저마다의 역할을 수행해 실직 사태란 없는 곳이다.
과학기술 문명이 발단이 되어 인간은 ‘인공 숲 조성’을 선언했다. 그 결과는 참혹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관계 사슬의 절단이다. 벌들은 방황하고, 개미는 불균형적으로 번식하고, 새들은 둥지를 만들 집 한 채 마련하기도 쉽지 않으며, 말벌들은 더욱더 포악해지고, 멧돼지나 고라니는 균형감을 상실했다. 이뿐 아니다. 인공 숲에는 나무가 개미를 사육하는 진정한 의미를 담고 있지 못하며, 일개미가 자신의 군집을 위해 6개의 다리로, 후각 기능을 담당하는 2개의 더듬이로, 잘록한 허리로, 몸집에 비해 유난히 크고 강인한 입을 가지고 세상과 소통하는 의미가 인공 숲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개미가 노동을 하는 진짜 의미와 존재의 가치를 인공 숲은 담아내지 못한다.
나무가 향기를 내뿜으면 인간은 곧바로 향기를 채취해서 자신의 소유물로 만든다. 향기가 갖는 본질적 의미를 살피지 않는다. 나무에게 향기의 본질은 소통 수단이며, 관계의 끈이다. 인공 숲은 자연 숲이 갖는 이 중요한 속성을 계산하지 않는다.

(왼쪽) 붉나무 잎이다. 단풍이 물든 잎이 강력한 붉은색을 띤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붉나무 잎을 보노라면, 알프스 소녀 하이디 동화가 생각난다. 어린 하이디는 단풍이 든 가을 숲을 처음 보고는 놀란 나머지 산이 불타고 있다고 소리치며 산을 뛰어내려온다.
(오른쪽) 우리에겐 단풍이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는 즐거움이지만, 나무에게 단풍은 기나긴 겨울을 준비하는 자기표현이다.
인공 숲에 사는 모든 생물들에겐 자유가 없다. 그들을 스스로 자라게 놓아두지 않는다. 스스로 자라게 내버려두면, 인간이 원하는 양과 질을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공 숲에서 가능한 한 많은 양과 질 높은 먹을거리를 원한다. 대량 생산을 위해 단일 생물을 원하고, 대량은 반드시 제초제와 살충제 살포가 필수적이다. 생물들의 대량 생산 문제는 건강성의 상실이 따른다. 인간이 원하는 곡식이나 과일은 마치 기계 공장에서 찍어내는 규격이 일정한 상품 같은 것이 아닌가. 자연의 숲이 추구하는 다양성은 곧 건강성이다. 인공 숲은 단순성과 빈곤을 상징한다. 우리는 다양성을 붕괴시킨 인공 숲이 몰고 오는 두려운 결과물들을 하나하나 받아들고 있지만, 그에 대한 대비는 미약하기 짝이 없으며, 속수무책이다. 종의 멸종 순위 다음 순번이 우리 인류가 아니길 기도할 뿐이다. 일찍이 노학자가 언급한 바가 있다. 멸종은 소리 없이 진행되고, 종들은 말없이 사라지고 있다고.
나뭇잎은 단순히 산소와 이산화탄소가 오가고, 탄수화물을 만들어내는 기관이란 자연과학적 의미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 더 큰 의미는 세상의 모든 생물을 하나로 묶어내는 관계의 끈을 탄탄하게 쥐고 있는 것이다. 그 관계 안에서 모든 생물은 저마다의 모습과 소리와 빛깔과 향기와 질감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그 표현들은 생물종마다 다양하게 표출되지만, ‘아름다움’이라는 한 단어로 압축된다.
자극을 받아 반응하는 신경조직을 갖고 있는 동물과 달리 나무는 전달 물질을 통해 반응한다. 물관과 체관을 통해서, 잎의 주맥과 측맥과 세맥을 통해서 그들은 매우 섬세한 차원까지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잎을 따거나 줄기를 자르면 진액이 흘러나오거나 메틸자스몬산(Methyl jasmonate)을 분비해 자신이 불편하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표현한다. 나무도 동물과 다르지 않게 자극에 대해 자가 치유적 반응을 보인다. 단지 반응 속도가 느려서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또 나무가 광합성을 한다는 것은 빛의 파장을 구분한다는 의미이다. 흡수와 반사와 투과를 통해서, 자신이 필요한 빛의 파장이 어떤 것이고, 어떤 것이 불필요한지를 구분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가을철 나뭇잎이 단풍이 든다는 것은, 나무에겐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한 해의 노동을 통해 얻은 결실인 열매로 개체의 유한성을 영원성으로 확보받겠다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긴 겨울을 무사히 지나 다음 해의 봄을 위해 필요한 양분과 방어 물질을 가공해내는 일이다. 가을이면 나무는 단풍이 들고 그 단풍을 땅으로 떨어뜨린다. 자연현상이 살아 있기를 희망하는 나무에게 요구하는 강력한 메시지이다. 자연현상은 나무에게 철이 들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쯤 된다. 찰나라도 멈춰 있는 생명체들이 있는지를 수색하고 삭제하는 일이 자연현상의 역할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변화를 요구당한다. 아니, 표현을 요구당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적합하겠다. 그 변화의 요구는 모두에게 똑같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를 나타낸다. 때문에 소위 ‘변이’가 일어나고, 같은 종에서 변종이, 또 아종이 생겨난다. 나무는 사람이 세상을 표현하듯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하지만, 느낌은 더 큰 듯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기술과 기교를 부리지 않지만 꿀벌과 나비를 유혹할 만큼 충분히 자기를 표현할 줄 알며, 봄에 꽃을 피우고 가을이면 잎을 떨어뜨려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판단만큼은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많은 시간을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같은 기계에 쏟아부으며 사는 현대인들이 나무를 만나야하고 그 밖의 생물들의 삶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들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감성이나, 그들도 우리처럼 자기를 표현하는 생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기계나 물질은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지 못한다. 일방적인 소유를 위한 끝없는 질주만 부추길 뿐이다. 우리의 유전자는 나무나 동물 같은 생물에 더 가깝지만,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와는 일치하는 유전자가 단 하나도 없다. 숲에서 나무를 만나고 다양한 생물을 만난다는 것은 분명 내 몸의 건강성을 확인하는 작업일 뿐 아니라 내 자아나 내 영혼의 건강성을 들여다보는 기회다. 숲은 나에게 생각할 기회를 준다. 그리고 진정으로 생각할 가치가 있는 사고법과 계산하는 법을 새삼스럽게 가르쳐준다. 오로지 산술적 계산법만을 요구하는 인간 사회와 달리 느낌(감성)을 기반으로 하는 계산법을 알려준다.
오늘도 나는 자연 속 생물들의 속삭임을 느끼며 숲을 빠져나온다. 가래나무, 물박달나무, 산수국, 쑥부쟁이, 마타리… 이름을 모두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생물이 더불어 사는 모습을 엿본다. 그들은 최소한 수천만 년에서 많게는 수억 년의 긴 각자의 고유한 이야기를 담고, 수억 년 전 그들의 조상이 그랬듯이 숲을 천이시켜가고 있다. 숲을 산책한다는 것이 마치 성스러운 성지를 돌아 나온 기분이다. 생명의 역사가 짧은 인류의 삶의 방식보다 나는 그들의 삶의 방식을 더 신뢰한다.
남효창|독일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산림생태학을전공했다. 동대학산림환경정책연구소에서연구원으로활동하며석사(1994 년)와 박사(1998년)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임업과학연구소 특별연구원을 지냈고, 현재는 (사)숲연구소를 설립해 이사장으로 있 으면서이땅에숲과인간이더불어사는법을위해노력하고있다. 환경부환경교육자문위원, 세계생명문화포럼추진위원, 생태체 험교육전문지『애벌레』발행인, 한국휴양학회상임이사로활동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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