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해야 자존감을 지킬 수 있을까요?|길 위의 명상

나의 존엄성을 지켜준
최고의 멘토,
공부

헤르만 헤세의 글쓰기 도구였던 타자기

내 프로필을 보면 참으로 잔잔하고 평화롭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에 들어갔고, 열심히 글을 써서 전업 작가가 된 것으로 ‘보인다’. 프로필만 보면 나는 대단한 모범생 같다. 하지만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나를 이룬 팔 할의 감성은 삐딱함과 서글픔과 왕따의 공포였다는 것을. 프로필은 어쩌면 ‘내가 누구인지를 최대한 가리기 위한 분장술’인 것 같다. 내 프로필에는 내가 한국 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면서 느낀 절망감, 오랫동안 고학력 백수로 살아오면서 느낀 모든 좌절감이 은폐되어 있다. 나는 한 번도 일을 쉰 적은 없지만, 겉으로는 ‘문학평론가’라는 정체성을 고수했지만, 10여 년 동안 스스로를 고학력 백수라고 규정했다. 늘 일했지만 어디에도 소속된 적이 없으니 나는 항상 허공에 매달린 덧없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그 쓸쓸함의 밑바닥에는 ‘공부로는 취직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제는 문학평론가보다는 ‘작가’라고 말하는 것을 마음 편하게 여기게 된 지금, 나는 그 오랜 정체성의 불안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있다. ‘글을 쓰는 사람’, 그것이면 내게는 충분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더 많은 것을 바랄수록 내 어깨는 무거워지고 가슴은 답답해져왔다. ‘그저 열심히 글을 쓰자, 다른 욕심은 부리지 말자’고 생각하기 시작하니 비로소 마음에 작은 평온이 찾아왔다. 이제는 두려움의 눈망울을 굴리며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도 던지게 되었다. 어느 순간 건강이 나빠지거나 삶의 흥미를 잃어버려 ‘글쓰기’도 할 수 없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을 다 멈춰버린다면, 이 모든 인간관계들이 단절된다면, ‘작가’라는 알량한 타이틀마저 빼버린다면, 나에겐 무엇이 남을까. 그런데 뜻밖에도 내 마음에는 ‘그저 공부하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 모습은 전혀 슬프거나 못난 것이 아니었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내가 나를 폄하하는 자괴감을 벗어버린다면, ‘공부하는 나’는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당당한 모습이었다.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어떤 대단한 목적도 없이, 그저 저절로 신명이 나서 공부하는 내 모습. 어떤 목적도 없이 공부 그 자체에 몰입하는 나 자신이야말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모습이었다.

나는 딸을 결코 환영하지 않는 집안 분위기에서 태어나 오직 공부만이 살 길이라는 부모의 주입식 교육관에 철저히 순응하는 척했지만,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그동안 ‘공부’라고 믿었던 것들이 그저 ‘문제풀이 기술’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오지선다형 문제풀이에 익숙했던 나에게 진정으로 절실한 공부의 기술은 ‘맞지 않는 답을 지우는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수업 시간에 걸핏하면 엉뚱한 몽상에 잠겨 남몰래 ‘나만의 무의식’과 만나던 순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학교 다닐 땐 ‘왜 자꾸 난 딴생각에 빠지는 걸까’ 하고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곤 했지만, 내가 원하는 공부가 무엇인지 알게 되니 그 딴생각이야말로 나의 진짜 고민이자 인문학의 화두임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진짜 공부란 무엇인가’를 20년 동안 찾아 헤맸다. 기나긴 방황이었지만 나를 끝내 성장시키는 값진 헤맴이었다. ‘학문’이라 한다면 너무 거창하다. 하지만 ‘공부’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에게는 공부가 가장 소중한 마음챙김 기술이었다. 자격증이나 점수를 따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문학과 철학과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미치게 좋았다.

스스로 이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학교 다닐 때는 우등생인 적도 있지만, 문학과 철학과 역사를 공부할수록 나는 치유 불능의 열등생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열등감마저 좋았다. 병적인 즐거움이었다. 인문학 공부의 무서운 맨얼굴은 파고들수록 ‘넌 지독한 무식쟁이야!’라는 것을 기쁘게 깨닫게 해준다는 것이다. 내가 무지함을 알게 될수록 나는 신이 났다. 내가 무엇을 아는지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모르면서 아는 척하며 살아왔는지를 깨닫는 순간 진짜 배움이 시작되었다. 신화와 예술과 정치에 관한 모든 공부가 신명났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집에 돌아가면 밤새 읽을 수 있는 책이 있다는 것이 가장 커다란 위로가 되었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가 정거장을 놓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잘못 내린 정거장에서 다음 열차를 타고도 또다시 책을 읽다가 아까 그 정거장을 또 놓치고 나서도, 책 읽는 것이 그저 좋았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상처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일이었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스스로 마취약도 없이 내 상처를 꿰매는 멋진 (그러나 조금은 엽기적인) 치유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내 상처를 꼭 끌어안은 채 공부 삼매경에 빠져 있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이런 기쁨을 더 많은 사람과 은밀하게 공유하고 싶었다.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어도 ‘삶은 아직 더 살아야만 풀어지는 아름다운 신비’임을 깨닫게 한 것이 나에게는 공부였다. 어떤 제대로 된 직함도 없기에 남들 앞에서 내 소개를 하는 것이 꺼려지는 순간에도 마음 깊은 곳에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공부하는 사람이야. 그것만으로 당당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 줄 아는 용감한 나 자신이 있었다. 그것은 수많은 자아의 얼굴 중에서도 내가 가장 아끼고 지켜주고 싶은 자아였다.

요새 인문학 강의를 나갈 때마다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있다. “어떻게 해야 자존감을 지킬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아프다. 사람들이 점점 더 각박해지는 세상에서 매일매일 자존감에 상처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실감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렇다. 다만 나는 ‘내 자존감을 이루는 사회적 근거’를 매일 곱씹어본다. 나의 자존감이 약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여자이고, 번듯한 직장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자존감에 상처를 입는가. 그것만은 아니다. 자존감에 상처를 입는 이유는 매번 다른데, 그 천차만별의 이유 중에서 공통적인 근거는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내가 스스로에 대해 당당할 때는 아무리 나쁜 일이 있어도 ‘아무도 나를 망칠 수 없어! 날 무너뜨릴 수 있는 건 오직 나 자신이야!’라는 주문이 통한다. 하지만 내가 나를 미워하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순간에는 지극히 하찮은 상처조차도 결정적인 트라우마가 되어버린다. 사실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강의가 ‘우리의 자존감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이 아닐까. 나는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내 손이 닿을 수 있는 모든 책들과 사람들과 사건들 속에서 찾아내고 싶다. 자격증을 따거나 입시를 위해서가 아닌, 이 세상이 만들어진 원리에 대한 공부, 나 자신을 알기 위한 공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답을 얻는 공부. 우리가 가장 궁금해하는 바로 그것을 공부할 권리야말로 우리의 잃어버린 자존감을 되찾아줄 것이다. 우리가 ‘공부할 권리’를 스스로 되찾는 순간, 새로운 인생의 제2막은 비로소 활짝 열릴 것이다.


정여울|작가. 『문학이 필요한 시간』 저자. KBS <정여울의 도서관> 및 EBS <클래스e>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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