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불교
송위지 성원불교대학 학장

캄보디아의 정식 명칭은 캄보디아왕국이며 수도는 프놈펜이다. 종교는 헌법에서 불교를 국교로 규정하고 있다. 전 국민의 약 95%가 상좌부 불교 신자이고 이슬람교 3%, 기독교 2%로 구성되어 있다.
불교의 전래와 수용
역사서로는 팔리어로 기록된 자료들과 중국 양서의 『부남전』과 수서 『진납전』 주달관의 『진납풍토기』 등의 사료가 있다.
팔리어 자료에 의하면 기원전 3세기 인도의 아소카 황제에 의해서 캄보디아에 불교가 전래했다는 것이다. 아소카 황제는 아시아는 물론 유럽이나 아프리카까지 전도사를 파견했는데 그중 한 지역이 소나 스님과 웃따라 스님에 의해 불교가 전해진 수완나부미, 즉 ‘황금의 나라’라고 불렸던 현재의 캄보디아 지역이라고 추정되는 것이다.
소나 스님과 웃따라 스님이 불법을 전할 때 이 지역에서는 궁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나기만 하면 바다에 있는 여신이 아이를 죽이는 이상한 일이 생겨서 궁에는 사내아이가 없었다. 소나 스님과 웃따라 스님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저들은 필시 바다에 있는 여신이 보낸 사자들일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그들을 죽이기 위해 무장을 하고 다가왔다. 이들을 본 스님들이 “무슨 일입니까? 우리는 그 여신의 친구가 아니고 열심히 진리를 수행하는 수행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바다에서 공포의 여신이 부하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들을 본 사람들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그때 두 스님은 신통력을 발휘해 여신과 부하들의 두 배가 되는 숫자의 신을 만들었다. 이것을 본 여신은 ‘이 나라는 필시 사람들의 소유구나’라고 생각하고는 하늘로 날아갔다. 소나 스님과 웃따라 스님은 그 자리에서 『범망경』을 설했다. 스님들의 법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귀의해 불교를 믿기 시작한 이가 6만 명이었다고 한다.
캄보디아 불교의 역사
1) 후난 왕조(A.D. 86~550)
대략 기원전 1세기부터 서기 550년까지 존재했던 후난 왕조가 캄보디아의 첫 번째 왕조로 나중에는 발남국이라고 불렸다. 인도에서 건너온 혼전(混塡)이 캄보디아로 와서 그곳의 여왕 유엽(柳葉)과 싸워 승리해 세운 나라가 후난이다.
서기 484년에는 인도 승려 나가세나가 중국 남제의 무제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후난에서는 불교 역시 활발해 신도가 많다’고 말했다. 5세기 초에는 카운디야 왕조가 들어서면서 상가팔라 같은 고승도 배출했다.
2) 첸라 왕조(550~802)
후난은 첸라의 사나바르만왕에게 멸망했고 이때에는 대승불교가 이입되었다. 사나바르만 시대에는 설일체유부 불교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고 서기 600년부터 800년 사이에는 크메르 스타일의 불상과 많은 대승 보살상들, 시바와 비슈누 같은 힌두 신상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첸라는 535~545년에 독립했으며, 후난 왕실의 후예 바바바르만 1세에 의해 새로운 왕조가 시작되었다. 바바바르만 2세 역시 후난과 싸움을 지속했으며 그 후 자야와르만 1세가 첸라를 통일했다.
3) 앙코르 왕조(802~1431)
9세기 들어 크메르 왕국을 세웠다. 이는 9세기에 시작해 13세기까지 전성기를 이룬 왕조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자야와르만 2세는 802년 자바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국임을 내세우기 위해 스스로 신으로부터 왕권을 전수했다는 데와라자(Deva Rāja) 의식을 거행했다. 크메르 왕조의 터전을 다진 자야와르만 2세는 불교와 함께 힌두교도 동시에 숭상해 두 종교가 공존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크메르에서 캄보디아로 국호를 바꾼 인드라바르반(877~889)은 앙코르와트(Ankor Wat)의 건설을 시작했다. 라젠드라와르만 2세는 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여 열심히 불경을 공부했다. 카윈드라아리마타나 시기에 스리랑카의 폴론나루와 왕조의 도움으로 세워진 사찰인 랑카위하라는 캄보디아의 대표적인 상좌부 불교 사원이 되었다. 수리야와르만 1세(1002~1050)는 불교를 국교로 선포해 상좌부 불교의 전통만을 채택했다.
앙코르와트는 12세기 초에 건립되었다. 앙코르와트는 수리야와르만 2세가 건립한 브라만교 사원이었다. 후세에 이르러 불교도가 브라만교의 신상을 파괴하고 불상을 모시게 됨에 따라 불교 사원으로 보이기도 하나 건물, 장식, 부조 등 여러 면에서 브라만교 사원의 양식이다. 키르티판디타는 불교 신도로서 다른 나라들로부터 전래해온 불교 문학과 철학에 깊은 조예를 보였다. 이후 캄보디아는 세력이 약해져서 1177년에는 참파의 공격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었으나 자야와르만 7세가 즉위하면서 캄보디아는 다시 흥기해 참족을 몰아내고 참파를 다시 17년간 지배하는 등 마지막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그는 백성들의 국리민복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주요 도로를 만들고 병원을 지었다. 한편 왕은 외국과의 불교 교류에도 힘써 아들 타말린다를 스리랑카에 파견해 스리랑카의 마하비라 사원에서 승려로서 득도하고 팔리어 경전을 수학하고 정통 상좌부 불교를 공부하게 했다. 특히 자야와르만 7세의 왕비가 된 인드라데위는 타이에서 도입된 상좌부 불교를 깊이 수행하며 계급에 대한 편견이 없어 낮은 계급 출신의 나젠드라퉁가, 틸락그다라, 나렌드라슈라마를 비구니로 득도시켜 공경했다.
14세기에 상좌부 불교가 완전히 정착한 캄보디아는 특히 라오스와의 활발한 교류로 라오스의 왕 화농과 캄보디아의 공주가 결혼했는데 캄보디아에서 상좌부 불교를 교육받은 공주의 영향으로 라오스 왕실은 물론 라오스 전국에 걸쳐 상좌부 불교가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14세기 들어, 3차에 걸친 타이족의 앙코르톰 공격으로 앙코르와트는 쇠락하기 시작했다. 태국에서 아유타야 왕조가 강해지자, 캄보디아인들은 1431년 수도를 프놈펜으로 옮기게 되면서 앙코르와트 시절을 마감하게 되었다.
4) 암흑기와 프랑스 식민 지배기(1431~1953)
시암과 라오스의 압박이 지속되어 1593년 앙창 1세가 세웠던 로베크가 함락되었다. 이후 시암의 서북지방 지배와 베트남 완조 이민의 메콩강 지배로 인해 결국 19세기에 들어서서 캄보디아는 두 국가에 분할 복속되고 말았다.
캄보디아에는 16~17세기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선교사들이, 17세기에는 네덜란드와 일본인들이 진출했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이후 캄보디아를 1860년에 프랑스 보호령화했다. 1863년부터 프랑스는 가톨릭 중심의 정책을 펴서 캄보디아인들을 개종시키려고 심혈을 기울였으나 캄보디아인들이 잘 대처해서 프랑스의 식민 지배 동안 종교적 갈등을 이겨냈다. 1953년까지 캄보디아를 지배했던 프랑스는 캄보디아에서 대대적으로 불교 탄압을 자행하기도 했으나 불교 사원을 중심으로 캄보디아인들은 공동체 생활을 영위했다. 외국인들은 캄보디아를 ‘승려의 나라’라고 부를 정도로 캄보디아의 불교는 민중의 의식에 완전히 뿌리 내리는 데 성공해 웬만한 정치적 격동기에도 종교적 동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1953년 독립 후, 캄보디아 왕국과 크메르공화국으로 역사를 이어오던 캄보디아는 론 놀 정부를 무너뜨린 크메르 루주의 폴포트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1975년 4월부터 1979년 1월 사이에 200만 명에 이르는 국민과 6만여 승려가 학살되었다.
캄보디아의 불교 현황
1991년 캄보디아 국민당 정부는 불교를 국교로 선포했다. 캄보디아 불교의 기반은 비구승들과 사원인데, 사원은 캄보디아인들의 영혼의 안식처이자 생활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캄보디아 국가를 유지하는 3대 덕목은 국민(nation), 종교(religion) 특히 불교, 그리고 왕(king)이다. 불교는 캄보디아인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생활의 덕목으로서 그 위치를 굳건히 유지해나가고 있다. 즉 불교 사원은 영혼의 안식처이자 생활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런 현상은 외국 종교의 무수히 많은 침투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아직까지는 꿋꿋이 버텨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된다. 캄보디아 불교의 특징을 말해주는 말을 떠올려본다. “우리는 염려 없다. 불교라는 보물을 잃지 않는 한….”
송위지|한국외국어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스리랑카 국립 켈라니아대 대학원 빨리불교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철학 박사). 을지대 교수를 지냈고 현재는 성원불교대학 학장으로 있다. 주요 역서로 『불교 선수행의 핵심』이 있고, 「상좌부불교 국가의 민족 분쟁」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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