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金剛經)』 중에서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큰 비구 1천2백5십인과 더불어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시었다. 마침 공양 때가 되어 세존께서는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들고 사위성으로 가시어 한 집씩 차례로 걸식을 하시었다.
다시 정사로 돌아오시어 공양을 마치신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마련하고 앉으시었다.
그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의 옷을 걷어메고 오른쪽 무릎을 꿇어 합장하며 부처님께 여쭈었다.
“참으로 희유한 일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펴 주시고, 보살들에게 중생을 잘 제도하도록 당부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들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고는 마땅히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마음가짐을 다스려야 하옵니까.”
“착하고 착하도다. 수보리야, 그대 말과 같이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피고 보호하며 모든 보살들에게 불법을 맡기고 당부하느니라. 자세히 듣거라. 내 그대를 위해 설하리라. 선남자 선여인들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면 마땅히 이와 같이 머물며, 이렇게 스스로의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느니라.”
“예,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기꺼이 듣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었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다음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하느니라. 이 세상의 생명 중 알에서 깨어난 것이거나, 모태로 생긴 것이거나, 습기로 생긴 것이거나, 화(化)하여 생긴 것이거나, 형상이 있는 것이거나 형상이 없는 것이거나, 생각이 있는 것이거나 생각이 없는 것이거나, 그리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을 가리지 않고 모두 제도해서 열반에 들게 하리라.
이처럼 한량없고 가없는 중생을 제도하였으나 실로 멸도(滅度)에 든 중생은 없다 할 것이니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 마음에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있다면 그는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또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법에 얽매이지 않은 채 보시를 행할지니 이른바 색에 얽매이거나 성·향·미·촉·법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하되 상을 내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상이 없이 보시를 행하면 그 복덕이 헤아릴 수 없이 크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동쪽 하늘의 허공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능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수보리야, 동서남북 그리고 사유(四維)와 상·하 허공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상을 내지 않고 행하는 보시의 복덕이 마치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오직 나의 가르침대로 행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겉의 외모로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외모로서는 여래를 볼 수 없나이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여래 법신의 모습이란 곧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형상을 지닌 것은 모두 다 허망하느니라. 만약 모든 모습이 모습이 아님을 알면 곧 여래를 보리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먼 뒷날 많은 중생들이 이와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나 경전을 진실이라고 믿는 마음을 일으키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걱정하지 말지니라. 여래가 이 세상을 떠난 뒤 5백세가 지나가도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자만 있으면 능히 믿는 마음을 일으키고 그것을 진실이라고 여기게 되리라.
그대는 이 사람이 한 부처님이나 몇 분 부처님에게만 귀의하고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부처님 밑에서 갖가지 선근을 심었기 때문에 이 경전을 듣고 보거나 잠깐 생각만 해도 청정한 믿음을 일으킨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이런 것을 다 잘 알고 보시므로 중생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복덕을 누리게 되느니라. 왜냐하면, 그들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고, 법상(法相)도 없으며, 또 비법상(非法相)도 없기 때문이니라. 중생들이 만약 마음에 상이 있으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얽매이게 될 것이다.
만약 법상에 집착하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얽매이게 될 것이며, 만약 비법상에 집착한다 해도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얽매이게 되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법에 집착하지 말 것이며, 비법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이치가 이러하므로 여래께서는 늘 ‘너희 비구는 나의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알아차려 법마저도 버려야 하거늘 법 아님에 있어서랴’ 하고 설하느니라
수보리야,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하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제가 알기로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은 고정적으로 이름붙일 수 없는 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오며, 또한 정한 바 없는 것을 여래께서 가히 설하셨나이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다 이해할 수도 없으며, 말할 수도 없고, 또한 법이 아니며, 법이 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모든 성현이 다 무위의 법으로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그대 생각은 어떠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칠보를 모두 보시한다면 그 사람이 지은 공덕이 과연 많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매우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그 복덕이 곧 복덕성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또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다만 사구게(四句偈)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 준다면 그 복덕은 저 칠보로 보시한 복덕보다 훨씬 클 것이다. 수보리야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이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법이 모두 다 이 경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라는 것도 곧 불법이 아니니라.”
“수보리야, 어찌 생각하느냐. 수다원(須陀洹)이 ‘나는 수다원의 열매를 얻었노라’ 하는 생각을 능히 하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은 성인축에 든다는 뜻으로 일컬을 뿐이지 실은 들어간 바 없기 때문입니다. 색·성·향·미·촉·법에 집착하지 않음을 일컬어 수다원이라 하는 것입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냐. 사다함(斯陀含)이 ‘나는 사다함의 열매를 얻었노라’ 하는 생각을 능히 할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이란 ‘한 번 갔다 다시 온다는 뜻’을 일컬음이나 실은 가고 오고 하는 바가 없으며, 다만 그것을 이름하여 사다함이라 일컬을 뿐입니다.”
“수보리야, 또 어찌 생각하느냐. 아나함(阿那含)이 ‘나는 아나함의 열매를 얻었노라’ 하는 그런 생각을 능히 하겠느냐.”
수보리가 다시 아뢰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아나함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말’이오나 실은 오지 아니함이란 없기 때문에 이름하여 아나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보리야, 어찌 생각하느냐.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고 능히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실로 법이란 없음을 깨달은 이를 아라한이라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나는 아라한의 도를 이루었다’고 한다면 이는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저에게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 마음의 고요를 얻은 사람 가운데 가장 으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저는 욕망을 떠난 아라한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나는 아라한의 도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면, 세존께서는 ‘수보리는 아란나 행을 즐기는 자’라고는 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수보리가 행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수보리야말로 아란나 행을 즐기는 자라고 일컬어 주시는 것입니다.”
• 이 글은 『통일불교성전』(대한불교진흥원 통일불교성전편찬위원회 편찬, 대한불교진흥원 刊, 1992년) 제3장 「반야부」 중에서 발췌했다.
0 댓글